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1화 (381/649)

381화. 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야

이내 장목화는 천천히 뭔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구세계가 막 파괴되고 혼란의 시대, 질서의 속박에서 벗어나 일정한 능력과 물자를 얻은 사람들은 타인의 생명과 인격을 극도로 경시했었어.”

“혼란의 시대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야. 신력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적잖게 발생했으니까.”

게네바가 자료에 근거해 설명을 보충했다.

“팽창됐지.”

성건우도 평가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오하명도 그럴 거라는 건가?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무시무시한 힘을 얻은 걸까?’

하지만 용여홍은 이 세세한 추측을 밝히기보단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퍼스트 시티에는 정말 숨은 인재가 많네.”

이곳에 온 지 겨우 며칠 지났지만, 무시무시한 숨은 강자를 너무 많이 만났다. 그런데도 이 퍼스트 시티가 수준 이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이 도시의 내공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이 틈을 타, 장목화가 팀원들 교육에 나섰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 신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고 퍼스트 시티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안 돼. 앞으로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면서 우리 주요 임무에 집중해야 해.”

리만을 통해 격투장 표를 구할 수 있게 된 구조팀은 오레이 후손과의 접촉이라는 주요 임무에서 실질적인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애초에 장목화가 표를 꽤 많이 구해달라고 한 건, 그녀의 말처럼 최대한 신중한 자세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다짜고짜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에게 달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은 한두 차례 상대를 관찰하면서 상황에 따라 행동에 나서는 게 제일 최선이었다.

* * *

리만이 표를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구조팀은 쉬지 않았다. 다시 조를 나눈 이들은 수종이와 한명호를 찾기 시작했다.

백새벽과 용여홍 조는 안타나 스트리트 지하 암시장으로 가, 그곳에서 장기매매 업자 엄준모를 만났다.

“팔려고, 사려고? 파는 거면 구매자가 있는지 없는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최종 금액 산정이야.”

엄준모가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백새벽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엄준모가 말하는 내내 자신과 용여홍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백새벽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한명호의 초상화를 들이밀었다.

“이 사람 본 적 있어?”

엄준모는 초상화를 힐긋 보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못 봤다고 말한다면, 믿을 거야?”

“아니.”

용여홍은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답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엄준모가 웃으며 대꾸했다.

“못 믿는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지.”

“⋯⋯.”

용여홍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다행히 엄준모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보기는 봤어. 심장을 사려고 하더라고. 이식하고 싶다고. 하지만 적합한 장기를 찾지는 못했어.”

“언제?”

백새벽이 냉정하게 물었다.

엄준모는 눈을 위로 치뜨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 그래, 어제 오후.”

‘어제 오후 일도 그렇게 곰곰이 생각해야 떠올릴 수 있는 거냐?’

용여홍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엄준모는 백새벽과 용여홍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류인이 어디 적합한 심장 찾는 게 쉽겠어? 일반인도 운이 엄청 좋아야 하는데. 무려 2, 3년이 지나도 적합한 장기를 못 찾는 손님들도 있다고.

하하, 기다리는 시간이 그 이상으로 길어지지는 않지만. 그때까지 적합한 장기를 못 찾으면 그대로 죽거나 다른 방법을 찾거나, 보통 이 둘 중 하나잖아.

근데 이 사람은 왜 찾아? 너희한테 어마어마한 돈을 빌렸나? 아니면 너희 뒤통수치고 도망갔어? 그런 사람 같지는 않던데? 좀 거칠게 생기기는 했어도,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거든.”

‘와, 저렇게 단숨에 저 많은 말을 쏟아낼 수 있다고?’

급기야 귀가 윙윙 울리는 듯한 느낌에 용여홍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반면, 백새벽은 덤덤하게 물을 것부터 물었다.

“혹시 어디 사는지 알아?”

엄준모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 알고 싶었는데 안 알려주더라고. 암흑가를 오가는 사람이면 다 알지. 자기 정체랑 거주지를 절대 드러내면 안 된다는 걸. 너희는 안타나 스트리트에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여기선 아무리 길가에 쪼그려 앉아 똥을 싸는 개라도 어느 재수 없는 놈 뒤를 졸졸 쫓아가다 보면, 그놈이 걔를 쓰러뜨리고 으슥한 골목길로 끌고 들어가 뜯어먹었을지도 모른다니까?”

용여홍도 이번만큼은 엄준모의 수다가 그렇게 짜증스럽지 않았다. 퍽 흥미로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변이 생물이 굉장히 많은 애쉬랜드에선 평범한 개도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또 그린올리브 구역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은 주민들 눈에는 식재료로 보였기에, 별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애초부터 아예 살아남질 못했다.

이때 백새벽이 화제를 전환했다.

“이 사람의 적합성 관련 자료를 살 수 있을까?”

엄준모는 실실 흘리던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안타나 스트리트에 처음 온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나에 대해 들어봤을 거 아냐. 설마 내가 퍼스트 시티에서 나름 유명한 장기매매 업자가 될 수 있었던 게 무거운 입 때문이란 걸 모르는 건가? 난 너희 뒤통수를 칠 때도 당당하게, 너희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치는 사람이라고.”

엄준모가 웃으며 말을 마쳤다.

백새벽은 다시 이 화제를 마무리 짓고, 퍼스트 시티 내 다른 비공인 장기매매 업자에 관해 물어보았다.

* * *

잠시 후 지하 암시장에서 나온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명호는 진짜 불행한 것 같아.”

엄준모에게 아류인과 심장 등의 중요한 단어를 듣게 된 직후부터 백새벽과 용여홍은 엄준모가 만난 사람이 한명호임을 확신했다.

한명호는 결국 장기매매가 가장 활성화된 이곳에서도 맞는 장기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명호에게 남은 방법은…….

점점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백새벽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우리가 있고, 기계 심장이 있잖아.”

백새벽을 잡았던 노예 상인 유진도 일찍이 기계에 가까운 인조 심장을 이식받은 바 있었다. 물론 이 기술에는 적잖은 문제가 있는 데다 각종 후유증도 따랐지만, 생명을 유지하기엔 충분했다. 심지어 일반인을 능가하는 힘까지 발휘할 수 있었다.

‘기계 심장 이식은 엄청 비싸고 통제도 받잖아. 노예 상인단 수장 유진도 저렴한 작업장을 찾아 조잡한 제품을 이식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용여홍은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할 뿐, 차마 소리 내어 이야기하진 못했다. 백새벽은 이미 과거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녀 앞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간 공백을 두고, 용여홍이 애써 할 말을 찾아냈다.

“저 장기매매 업자,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네 생각은 어때?”

백새벽은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한명호가 저 사람을 찾아 심장 이식에 관한 얘기를 했다는 것뿐이야. 그 외의 다른 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네. 근데 우리를 볼 때나,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이 많아지더라고. 아무튼 계속 저 사람을 지켜보면서 다른 장기매매 업자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그래.”

용여홍은 한명호를 찾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 * *

지하 암시장 안, 엄준모 구역.

돌아서 뒤쪽 방으로 다가간 엄준모가 가볍게 웃으며 문을 두드렸다.

“이제 나와도 돼.”

끼익-

문이 열리고, 안에선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짧게 깎은 머리에, 흰자는 누르스름했고, 눈썹은 난잡하게 자라있는데다 얼굴에는 가로 세로로 흉터가 한 줄기씩 나 있었다.

굉장히 사나운 인상의 남자는 바로 구조팀이 그렇게 찾던 한명호였다.

등에 소총을 멘 한명호는 암시장 출구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엄준모가 씩, 미소를 지었다.

“적이야?”

한명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야.”

“근데 왜 피해?”

엄준모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캐물었다.

“넌 알 필요 없어.”

한명호는 그저 간단히 대꾸할 뿐이었다.

다시 엄준모가 웃었다.

“하하! 내가 선심 써서 널 숨겨주지 않았으면 진즉에 들켰을걸? 그런데도 아직 나한테 말 못 할 게 있다고? 친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거나, 지금의 모습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거나, 그냥 표면적으로만 친한 사이인 거겠지.”

한명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엄준모의 수다가 끝나길 기다렸지만, 엄준모는 화제 전환도 빨라서, 한 주제가 끝나면 금세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근데 오늘은 왜 왔어? 적합성 테스트가 그렇게 빨리 끝나는 줄 알아? 기계를 돌리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하루 만에 뚝딱 결과가 나오면 그걸 믿을 수나 있겠어?

게다가 네가 원하는 건 심장이잖아.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가는 수술대 위에서 잘못될 수도 있다고. 아, 그러니까 수수료는 미리 지불해야 해. 죽은 사람한테서 돈 뜯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하하! 근데 말이지, 이번엔 꽤 희망이 있어. 마침 심장을 팔기를 원하는 사람과 네 상황이 좀 비슷하거든. 적합성 테스트 통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웃는 엄준모를 보고, 한명호도 약간 기대감을 드러냈다.

“상황이 비슷하다니?”

엄준모는 계속 웃는 낯으로 답했다.

“판매 지원자는 여자야. 원래는 정상인이었는데 북쪽 기슭 불모지에서 감염되는 바람에 후천적으로 변이됐고, 그 변이는 주로 심장에 집중돼 있어. 그 때문에 모종의 병에 걸리게 된 거지.

병이 여태까지 이어져서 거의 불치병에 가까워졌긴 한데, 걱정하지 마. 그 사람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이식도 가능해. 근데 조건이 하나 있대. 이건 그 사람이 자기 장기를 파는 이유기도 해.”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한명호가 물었다.

“어떤 조건?”

“지금은 얘기 못 하고, 적합성 테스트 통과하면 그때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조건의 난도가 약간 높다는 것뿐이고. 그건 그렇고, 정말로 저 친구들 안 만날 거야? 보니까 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실력도 있는 것 같고. 어떻게든 너한테 도움 줄 수 있을걸?”

간단히 대꾸한 엄준모가 암시장 출구 쪽을 보며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한명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어.”

* * *

그린 올리브 구역.

장목화와 성건우는 이번 무심병 폭발 사건 관련 자료를 가지고 집마다 찾아다니며 탐문 중이었다.

범위를 좁힐 수도, 단전으로 수종을 튀어나오게 할 수도 없게 돼서, 구조팀은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갔다. 부디 이번 무심병 사례 속에서 실낱같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기만 바라고 있었다.

물론 이는 이번 무심병 폭발 사건이 확실히 수종과 관련돼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장목화가 들고 있는 자료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다 돌아다녀 봤어. 아마 이 거리를 담당하는 치안관보다 더 열심이었을 거야. 하지만 우리한테 월급을 주는 사람은 없지.”

턱을 만지작거리던 성건우는 장목화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봐야겠어.”

장목화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조사해야 할 방향은 전부 다 조사해 봤잖아.”

“그러니까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죠. 목표를 바꿔봐야겠어요.”

성건우는 매우 정확하지만 어떤 소용도 없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장목화는 흠칫 놀란 듯 중얼거렸다.

“목표를 바꿔? 그래, 수종이는 혼자가 아니야. 아니, 혼자긴 하지만 가위 말과 수면 고양이라는 애완동물을 데리고 있어. 일단은 수종이를 찾는 건 그만두고 가위 말이나 수면 고양이를 찾아볼까?”

짝짝짝!

성건우가 자신을 쳐다보는 장목화에게 박수를 보낸 뒤, 환하게 웃었다.

“가위 말과 유령 고양이는 매일 집에 틀어박혀 있지는 않을 거예요. 밖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것 같았거든요.”

장목화의 얼굴이 점차 밝아졌다.

“거기다 동물이잖아? 인간들한텐 동물을 꿰어낼 방법이 아주 많지?”

성건우 역시 흥분했다.

“맞아요! 차으뜸만 잡으면 걔를 이용해 가위 말을 꿰어내면 되죠!”

장목화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그러려면 넌 일단 차으뜸부터 찾아야 해.”

이후 두 사람은 많지 않은 행인들을 의식하며 목소리 크기를 조절해, 말과 고양이를 꿰어낼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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