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0화 (380/649)

380화. 13호 유적

장목화가 다시 리만을 보며 정색했다.

“이번에 퍼스트 시티에 온 주요 목적이 뭐야?”

리만은 감히 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답했다.

“너희랑 거래하기 위한 것도 맞지만, 대형 고객한테 무기를 팔려고 왔어. 그 거래는 이미 완료됐고. 근데 진짜 아무 문제도 없었고, 우리가 여기로 온 건 그 후의 일이었어.

만약 너희를 위해 남겨둔 군용 외골격 장치와 기계 팔을 노린 거면, 그 거래가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여태 아무 기척도 없을 리가 없어.

아니면 날 납치하고 감금해 돈이나 정보, 혹은 특정 증거를 뜯어내는 게 목적이었다면, 굳이 내가 아닌 리처드슨과 부하들을 노릴 필요도 없어.”

리만도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손까지 펼치며 결백을 주장했다.

장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너한텐 어느 정도 틈이 있었지. 우리한테 전보를 보낼 정도의 여유가 있었잖아.”

리만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목표는 너희들이었던 건가?”

“내가 기대하는 게 바로 그거야.”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대꾸했다.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퍼스트 시티에서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고 거래할 예정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건 잠시 차치해두자고. 네 곁에 있는 누군가 이 정보를 흘렸다 한들 상황이 이렇게까지 발전된 건 아무래도 이상해. 적어도 여태까지 우리는 어떤 위험도 느낀 적이 없어. 방송의 영향도 우리 팀에선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어려움이었다고.”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어려움?’

리만은 경호원들을 쳐다보다 전보다 훨씬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지금 든 생각이 어떤 대가를 들여서라도 최대한 빨리 머신 헤븐 경호원형 로봇을 한 대 주문해야겠다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다시 장목화에게 고개를 돌린 리만이 조금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 방송국의 주인이 원하는 건 대체 뭘까?”

장목화는 두 걸음 정도 서성이며 고민했다.

“어쩌면 목표는 네가 아닐지도 몰라. 심지어 목표가 없는 걸 수도 있어.”

“뭐?”

혼란스러워하는 리만을 보고, 성건우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무차별 살인이라는 거지.”

‘……아직 누굴 죽이지는 않았는데?’

리만도 그간 여러 풍랑을 겪은지라 구조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 방송국 주인은 줄곧 방송을 통해 청취자들한테 그 사람들 신분이 뭐든, 어디에 있든, 뭘 하든 관계없이 영향을 미쳐왔다는 거야? 우리는 불운하게 그 덫에 걸린 거고?”

그 불운은 리처드슨의 개인적인 취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추측에 리만의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급기야 인간인지 뭔지 알 수도 없는 신비한 미지의 존재가 우연히 찾을 수밖에 없는 주파수로 매일같이 바뀌는 청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광경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밖에는 못 해.”

장목화는 모호한 답만 내놓았다.

잠시 후, 리처드슨의 방문이 열리고 게네바가 그 안에서 나왔다.

“방송 끝났어. 너희가 나간 뒤엔 전자 제품 수리 관련한 단순 지식과 도에 관한 얘기만 나왔어. 특별한 부분도, 기이한 파동도 없고. 물론 난 탄소기반인이 아니니 방송에 정말 아무 문제도 없었는지 확신은 못 한다. 그래도 녹음해야 할 부분은 다 녹음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물었다.

“고마워, 그 방송국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했어?”

게네바도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응, 북안 뭇 산과 불모지 경계 모처에 자리해 있어. 동북쪽으로 치우쳐졌고, 여기랑 직선거리 상으로 보면 40킬로미터도 채 안 떨어져 있어. 지도랑 대비해보니까 구세계 폐허 도시에 속했더라고. 퍼스트 시티가 붙여둔 번호는 13이야.”

불모지의 13호 유적? 장목화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리만은 귀신 얘기라도 들은 양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사실 퍼스트 시티를 어느 정도 안다면 13번 유적이 낯설지 않을 터였다.

타웨이 리버 이북, 북안 뭇 산 이남의 레드리버 양안은 구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 중 하나로, 인구도 많고, 산업도 밀집된 도시권을 형성했었다.

하지만 구세계가 파괴되고 그곳 대부분은 불모지로 변해버렸으며, 그 화려했던 도시들은 물리적인 파멸로 무심자와 변이 생물의 낙원이 돼 버렸다.

그 이후, 그곳에 남은 비교적 온전한 도시를 기반으로 건립된 것이 바로 퍼스트 시티였다. 일정 정도 실력을 갖추게 된 뒤엔 퍼스트 시티는 폐허나 유적들을 탐색하며 자원을 취하고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렇게 애쉬랜드 내 명목상 최고의 세력이 된 퍼스트 시티가 수십 년간 눈앞에 자리한 폐허 도시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을 리는 없었다.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자원은 벌써 다 챙기고도 남았을 터, 황야 유랑자들과 유적 사냥꾼에게 남겨둔 건 사실상 먹다 남은 찌꺼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그게 13호 유적이었다.

그곳은 퍼스트 시티에서 상당히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개발은 되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현지의 유적 사냥꾼들은 그곳에서 나온 물자와 기술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퍼스트 시티에서 자체적인 탐색을 진행하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군대를 파견해 진입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모든 길목마다 군대가 있어, 누구도 13호 유적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선 점차 소문이 번졌다. 13호 유적에 굉장히 위험한 뭔가가 숨겨져 있으며, 심지어는 퍼스트 시티에서 파견한 군대도 소식이 끊긴 채 사라져버렸다는 소문이었다.

그 외에 13호 유적에서 구세계 파괴 관련 자료를 발견한 퍼스트 시티가 사람들을 조직해 그곳에 비밀 실험실을 세워 금기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각종 소문과 추측에 휩싸인 13호 유적은 이미 퍼스트 시티 주민들 사이에 신비롭고 무시무시한 인상으로 각인된 상태였다.

그런데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이 그곳에 자리해 있다니!

리만은 오하명이 방송을 통해 경호원 모두를 통제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몸서리를 쳤다. 불모지 13호 유적에 관한 갖가지 소문도 더 이상 농담으로만 여길 순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성건우가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귀신 이야기를 지어낼 수도 있겠는데?”

‘그래서, 지어낸 얘기를 회사 방송국에 투고라도 하게?’

장목화도 무의식적으로 성건우의 장단을 맞추다가, 얼른 잡생각을 거두고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내일 한 번 더 확인해줄래? 무슨 변화가 있는지.”

“그래.”

게네바의 굵직한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장목화는 다시 리만을 보며 웃었다.

“현재 상황으로 보면 널 노렸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그보다는 너희들이 충분히 조심하지 않아서 생긴 무시무시한 우연이었을 거야.”

몇 차례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인 리만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론달과 리처드슨을 비롯한 애들은 전부 원상태로 돌아온 건가?”

장목화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런 건 마술이랑 같아서 발각되면 효과가 그대로 사라져.”

‘적어도 이번에는 그랬지. 근데 그러지 않는 것들도 있는데…….’

언제나처럼 솔직하게 말하려던 성건우는 장목화의 눈총을 받고 그대로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리만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희랑 거래가 끝나는 대로 퍼스트 시티를 떠나야겠어.”

리처드슨은 이곳에 온 후에야 처음으로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을 들었다고 했었다.

‘우리가 굳이 재촉할 필요도 없겠네.’

장목화는 속으로 몰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당장 할까? 우리한테 장원이 하나 있어. 논밭 면적은⋯⋯.”

리만은 구조팀이 제시한 모든 교환 조건을 듣고 약간 인상을 썼다.

“장원 처분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야. 아무리 빨라도 4, 5일은 걸려.”

장목화가 보기에 리만은 오늘 밤이라도 당장 퍼스트 시티를 떠나고 싶어 안달인 것 같았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성건우가 자원했다.

하지만 리만은 그의 말은 아예 무시한 채 몇 초간 고민하다 말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내일 인수할게. 오레이는 이 계좌로 입금해줘.”

그 어마어마한 양의 현금은 구조팀이 테렌스에게 빌린 것이었다. 여기에 그만한 양의 물자도 강 왼편 장원과 함께 리만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

‘훌륭해, 과연 진정한 장사치다워. 돈이라면 목숨도 내걸겠는데.’

사실 장목화는 한시라도 빨리 퍼스트 시티를 뜨고 싶어 하는 리만의 마음을 이용해, 가격을 더 깎고 장원의 후속 대리 처분권을 쥐려 했었다. 그렇게 되면 리만에게 늑대소굴에 있는 여자들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리만은 위험을 좀 더 감수하더라도 비용을 아끼는 쪽을 택했다.

“이번엔 너희한테 큰 신세를 졌어. 물건값은 좀 더 깎아줄게.”

리만의 목소리에선 아쉬움이 물씬 묻어나왔다.

짝짝짝!

성건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리만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장목화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깎아줄 필요는 없고, 우리 조건만 들어줘. 두 가지야.”

“뭔데?”

리만도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장목화는 소나영을 비롯한 사람들의 패스트푸드점을 설명하며, 그들에게 상응하는 기한까지 가장 낮은 가격에 식재료를 공급해달라는 조건을 말했다.

“그런 조건이 붙은 장원은 비싼 가격에 팔아넘기기 힘든데⋯⋯. 그래, 뭐 좋아! 너희한테 10퍼센트 할인해준 셈 치지 뭐!”

리만은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그 제안에 응했다. 뒤이어 그는 쇠뿔도 단김에 빼겠다는 기세로 물었다.

“두 번째 조건은?”

“혹시 격투장 VIP 귀족석 표를 얻어줄 수 있어?”

장목화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내 리만은 구조팀을 바라보다 푸근한 농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근데 전제조건이 있어.”

“뭔데?”

장목화가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리만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퍼스트 시티를 떠난 이후의 표밖에 안 돼.”

‘예리하군. 역시 무기를 팔면서도 여태껏 잘 살아남은 이유가 있었어.’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문제없어. 총 세 번 관람할 표가 필요해. 각각 다섯 장씩.”

“그렇게 많이?”

리만은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았다. 그만한 표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상당한 인맥과 자금, 물자를 들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얼굴을 한 장목화를 보고, 리만도 차차 예의 바른 미소를 보였다.

“많기는 하지만, 내 목숨과 비교하면 일도 아니지.”

리만이 격투장 표를 구해야 했기에 물자 인수 시간은 모레 저녁 8시 정각으로 미뤄졌다.

* * *

코르네 스트리트 55호에서 나온 장목화, 성건우, 게네바는 2바퀴를 우회한 끝에야 개조한 지프에 올랐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든 상자를 짊어진 용여홍과 백새벽도 차로 돌아왔다.

곧 이어진 장목화와 성건우의 설명을 듣고 용여홍은 약간 겁을 먹었다.

“오하명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하네요.”

만약 그가 정말로 라디오를 듣는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영향을 미친다면, 충분한 조건이 주어진 상황에선 도시 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생명과 타인, 질서에 대해선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처음 그 이름을 듣고 오하아몽(*吳下阿蒙: 무예는 출중해도 학식은 없음)이란 말이 생각나더라고.”

장목화가 말했다.

“전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직접 지은 이름일까요?”

백새벽은 역시 곧바로 장목화의 말뜻을 이해했다.

“부모가 축원을 담아 지어준 이름일 수도 있지.”

게네바 곁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분석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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