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79화 (379/649)

379화. 도와 전자 제품 수리

장목화가 볼 때 리만의 부하들은 최면에 걸린 듯했다. 키워드로 촉발되는 최면이라, 그 키워드를 듣는 순간 무조건 발화자의 최면에 걸려드는 것이다.

‘근데 정말 최면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방식이 있었을 텐데. 게다가 리만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왜 정작 리만은 그냥 둔 거지?’

장목화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 게네바는 절차에 따라 리만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당신이 거금을 들여 고용한 경호원인데 왜 당신과 다른 층에 묵고 있었던 거지?”

론달을 비롯한 수하들을 보던 리만이 전보다 훨씬 안심한 듯 답했다.

“원래는 줄곧 내 옆방에 머물렀었어. 근데 갑자기 낯설어진 이후부터 2층으로 방을 옮겼어. 3층 전체를 감옥으로 만들려는 것처럼.”

성건우는 기절한 리처드슨을 보며 큰 의욕을 드러냈다.

“그럼 이제 답을 확인해볼까?”

“급하게 굴 것 없어. 아껴둬.”

장목화가 성건우를 저지했다. 성건우는 숙명주를 이용해 리처드슨의 기억을 뒤져보려 하고 있었다.

론달이 전에 보인 모습을 보면 그들이 겪은 일은 추리 광대 능력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듯했다. 추리 광대가 분명 효력을 발휘했음에도 그들은 모든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 성건우와 친구가 된 상태인데도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방부터 살펴보자. 단서가 될만한 게 있는지.”

장목화가 리처드슨의 방을 가리켰다. 뒤이어 그녀는 론달을 비롯한 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밖을 지키고 있어. 안전 제일!”

“안전 제일!”

리만의 부하들도 진지하게 호응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리만과 함께 리처드슨의 방으로 향했고 게네바는 리처드슨을 끌며 그 뒤를 바짝 따랐다.

* * *

리처드슨의 방은 주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전선, 스위치, 자석 등이 쌓여있는가 하면 라디오 등의 물건도 흐트러져 있었다.

성건우가 눈을 번득이는 사이 리만이 설명했다.

“이건 리처드슨의 취미야. 각종 기기와 전자 제품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좋아해. 원래부터 이쪽을 전문적으로 공부했던 사람이라 솜씨도 좋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장목화는 장갑을 낀 손으로 방에 놓인 물건 모두를 하나하나 검사하기 시작했다.

성건우 역시 비슷한 작업을 진행하며 곧장 라디오로 향했다.

그때, 리만이 녹음기를 힐긋 보며 말했다.

“리처드슨은 방송 듣는 걸 좋아했어. 퍼스트 시티에서는 관영 주파수 말고도 소형 방송국 주파수가 잡힌다고, 그 방송이 꽤 재밌다고 했어. 근데 난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신경도 안 썼어.”

장목화와 게네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사이, 성건우가 라디오를 켰다.

지직-

“이따 기록을 찾아 리처드슨이 어느 방송국 방송을 들었는지 확인해보자. 그 안에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장목화가 말했다.

소음 외의 소리가 나오지 않자, 성건우는 약간 실망한 듯 라디오를 툭 치고 돌아섰다. 그러곤 이번에는 글이 적혀 있을 만한 것들을 살폈다.

그렇게 한동안 바삐 움직였지만 그다지 유용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숙명주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나.’

장목화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직, 소리만 나던 라디오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119.2,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 방송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친구,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오하명입니다.

레드리버어로 이뤄지는 방송에, 오하명이 직접 통역을 담당했다.

‘도와 전자 제품 수리?’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라디오를 팩 노려보았다.

계속 오하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사랑은 대등한 것입니다. 덮어놓고 주기만 하거나 갈구하기만 해선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죠. 공평은 아주 중요합니다. 하지만 애쉬랜드에서는 공평을 실현할 능력을 갖는 게 더 중요해요.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보호하려 한다면, 그 어떤 외부인도 없는 환경에 두어 절대로 무슨 위험과도 접촉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매력적인 목소리는 점차 낮아지면서 방 전체로 울려 퍼졌다.

장목화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때, 성건우는 곧장 문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작은 빨강이를 가둬 위험에서 보호해야겠어요. 팀장님도, 게네바⋯⋯.”

갑자기 말을 멈춘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결정을 번복했다.

“아니지, 겁을 줘서 회사로 돌려보내는 게 낫겠네요.”

그 순간, 또 걸음을 멈춘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가 왜 저 방송을 믿어야 하는 거지? 저 남자가 어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준 것도 아닌데?”

장목화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간 성건우의 말 한마디로 자신의 것이 아닌 영혼을, 혹은 생각 그 자체를 몰아낸 것 같았다.

그러나 리만은 매우 기이한 성건우의 반응을 보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좌우를 살폈다. 그에겐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방금 그 말에 문제가 있었다.”

게네바는 동료들 상황을 보고 이상 현상을 분석한 뒤, 신중하게 알렸다.

장목화는 다시 성건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스피커에선 계속 그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설교를 마쳤으니 이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전자 영역의 모든 기초는 0과 1이죠. 0과 1의 조합은 서로 다른 숫자를, 옳고 그름을, 열림과 닫힘을, 직렬과 병렬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0, 1,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상태가 온 전자 세계를 구성하는 겁니다.

도 역시 이와 매우 비슷합니다. 음, 양,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여러 사물이 이 세상을 구성하죠. 그래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이 나온 겁니다. 전자 제품들을 수리할 땐 그 안에 담긴 도만 파악해도 어떤 문제든 간단해진답니다.

‘뒷부분은 아까 같은 특이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네.’

귀를 막을 준비를 하던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일단 나가자. 겐은 여기 남아서 방송을 녹음하고, 그 방송국의 대략적인 위치 파악 좀 부탁해.”

“그래.”

게네바는 아주 시원스럽게 답하고는, 의자엔 아주 살짝 걸터앉았다.

* * *

리처드슨 방에서 나온 장목화는 나무 문을 꼭 닫았다. 그 기이한 방송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정신 좀 차렸어?”

장목화의 물음에, 성건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뇨. 근데 영향받은 건 우리 중 한 명밖에 없었어요. 이따 다 같이 회의를 열어 얘기하면 문제는 바로 해결될 거예요.”

‘그래, 원래 네가 가진 문제가 조금 전 방송보다 훨씬 더 심각하지.’

장목화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대신했다. 곁에 외부인이 있어서였다.

물론 둘만 있었어도 솔직할 순 없었을 터였다. 자칫 잘못했다간 성건우를 자극할 수도 있고, 그 사이좋은 성건우 무리의 갈등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가?”

리만이 다소 어색한 애쉬랜드어로 물었다.

장목화는 론달을 비롯한 이들을 두루 훑어보며 말했다.

“이따가 알려줄게.”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건우가 활짝 웃으며 리만의 부하들에게 갔다.

“혹시 최근에 어떤 방송을 들은 적 있어? 괜찮은 개인 방송국이라든가.”

이젠 상태가 퍽 안정된 듯 보이는 론달이 답했다.

“전에는 안 들었는데 리처드슨을 따라 두어 번 듣다 보니 꽤 재밌던데? 전자 제품 수리인가 뭔가 하는 방송이었는데, 실용적이기도 하고 재밌었어.”

순간 성건우의 눈이 반짝였다.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맞아! 맞아, 맞아, 너도 들어봤어?”

론달도 반색했지만, 성건우는 론달과 부하 모두를 보며 물었다.

“너희들, 그 방송 다 같이 들었어?”

론달이 중얼거렸다.

“응. 퍼스트 시티로 온 이후엔 휴식 시간에도 집에 못 돌아가지, 보스를 지켜야 하니 밖에 나가서 놀 수도 없지, 그러니 방 안에 틀어박혀서 TV 보거나 리처드슨 따라 라디오를 듣는 것밖에 없었지. TV 채널은 기껏해야 두세 개뿐이고 프로그램도 별로 없으니까.”

성건우도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퍼스트 시티에 왔으면서 왜 목욕탕은 안 갔어? 한증막도 즐길 수 있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도 되고, 뷔페도 먹을 수 있잖아. 그것 말고도 책이랑 신문도 있고, 공연도 볼 수 있고, 안마도 받을 수 있는데?”

옆에서 얘기를 듣던 리만은 그제야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장목화를 보며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리처드슨이랑 애들한테 문제가 생긴 게 그 방송을 들어서라고?”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방송국 주인 오하명이 라디오 방송 하나로 리만의 곁에 있는 경호원들을 이상하게 조종해, 한마음 한뜻으로 리만을 방구석에 가뒀단 말인가!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운 상황이었다. 리만 역시 평범한 민간인이 아닌, 전투에도 익숙한 무기 상인이지만 그래도 충격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오하명의 능력은 거의 신이나 다름없었다.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아까 우리도 하마터면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에 영향을 받을 뻔했어. 근데 넌 괜찮아 보이네?”

기이한 방송국, 신비로운 진행자, 그리고 어떠한 징조도 없이 나타난 생각의 변화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장목화가 일찍이 상상해본 가설이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언젠가 성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이 한계치까지 강화된다면, 통화 등의 방식으로 목표를 오도해 의도를 실현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기이한 방송이 장목화가 생각한 이 부분에서 딱 한발 더 나아가 있을 뿐이라, 그녀도 그렇게까지 당황하거나 큰 충격을 받진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오하명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는 건 확실했다.

이내 리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송을 들었을 때 이상한 건 하나도 없었는데⋯⋯. 아, 맞아. 뭔가를 느끼긴 했다. 누군가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 하지만 너, 너희도 알다시피 라르스는 이미 죽었잖아.”

리만은 이야기 도중 성건우가 돌아온 것을 보고 ‘너’를 ‘너희’로 바꿨다.

“그럼 그것의 핵심은 보호와 안전이었던 건가? 아, 일단 지금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일단 리처드슨을 심문해야겠어.”

자신감 없이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자연스레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약 2분 뒤, 게네바가 강제로 깨워 방 밖에 던져버린 리처드슨은 이제 성건우와 정답게 어깨동무하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현재 성건우는 숙명주의 힘을 아끼고자 추리 광대를 사용한 상태였다.

“나도 라디오 프로그램 듣는 거 좋아해. 특히 귀신 이야기. 혹시 추천해줄 만한 방송 있어?”

성건우의 진지한 질문에, 리처드슨은 곰곰이 고민하다 말했다.

“제일 추천하는 건 우리 연합 공업의 방송. 내가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랑 방송국을 만들었거든? 주로 회사 중하층 직원들 일상생활을 얘기해서 청취자도 꽤 많아. 또 매일 늦은 밤 퍼스트 시티 관영 방송국에선 ‘당신의 귀를 깨워요’란 방송도 나와. 주로 구세계랑 현대의 각종 야시시한 얘기를 해. 여자 진행자 목소리도 부드러우면서도 여리여리해.”

리처드슨은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끊고, 장목화의 눈치를 봤다. 여자인 장목화만 없었어도 금세 선을 넘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기세였다. 그러나 리처드슨도 더 깊이 들어가진 않고 금세 화제를 전환했다.

“음악을 틀어주거나, 특정 종교를 홍보하거나, 도박하도록 꾀어내는 개인 방송도 있는데, 별로 재미는 없어. 근데 도와 전자 제품 수리란 방송은 달라. 진행자 말발도 좋고, 전문적인 지식도 풍부해서 꽤 괜찮더라고?”

그때, 장목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방송은 어쩌다 듣게 됐어?”

“그냥 주파수를 돌리다 우연히? 원래 난 대도시로 갈 때마다 그래서.”

리처드슨의 대답에, 장목화의 미간이 더 심하게 구겨졌다.

‘뭐? 리만을 노리고 한 짓이 아니란 말이야? 아니면 리처드슨에게 그런 습관이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런 방식을 택한 건가? 근데 이건 너무 복잡한 방식이잖아.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리처드슨과 리만의 경호원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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