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얻기 위해선 먼저 내어줘야 한다
그린올리브 구역, 채광이 그리 좋지 않은 방 안에 구조팀이 오매불망 찾던 바로 그 한명호가 있었다.
원래부터 호리호리한 체형이던 한명호는 한층 더 마른 모습으로 알약 2알을 꺼내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런 뒤,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권총과 소총을 한번 점검하고 한명호는 약간 어두운 얼굴로 방을 떠났다.
곧이어 차에 오른 한명호는 안타나 스트리트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메스의 진료소가 아닌, 지하 암시장이었다.
“심장 있나?”
암시장에서 한명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풍부한 경험에 근거해 이런 판단을 내렸다. 지하 암시장에는 인체 기관을 얻을 루트가 있을 거라 추측했으며, 역시 그 추측은 틀림이 없었다.
입담이 좋은 상인은 보란 듯이 말을 좌르륵 쏟아냈다.
“있어. 원하는 어떤 기관이든 다. 근데 어떤 사람 것인진 보장 못 해. 나도 모르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으니까. 공연히 양심에 죄책감만 더하는 짓이잖아. 게다가 내가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대신 알아줄 사람은 넘쳐나거든.”
상인은 애쉬랜드인으로, 24~5살 정도 되어 보였다. 그리고 키는 대략 175센티미터 정도였으며, 어쩐지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한명호가 말했다.
“기증 지원자의 심장은?”
암시장 상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원자? 이미 장기를 바꿔야만 하는 상황이 됐으면서, 그 심장이 기증 지원자가 내놓은 것인지까지 신경 쓰는 거야? 그것도 이 애쉬랜드에서?”
한명호는 얼굴 근육을 몇 차례 꿈틀거리다 재차 물었다.
“있어?”
“있어. 근데 많지는 않아. 이식 성공률이 극도로 낮으니.”
암시장 상인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한명호는 느릿하게 숨을 한번 토해냈다.
“그럼 일단 적합성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암시장 상인이 미소를 지었다.
“급하게 굴지 말라고. 일단 채혈 검사부터 할게. 적합성 검사는 며칠 있다가 다시 와서 해. 적합한 장기도 없는데 지원자부터 만나는 건 좀 이상하잖아. 내 루트도 발각되기 쉽고.”
“좋아.”
한명호는 이 절차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또 아류인이란 정체가 드러날 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안타나 스트리트 암시장 상인, 불법 진료소 의사, 무기 상인은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일반 사람이든, 야만스러운 아류인이든 돈과 물자와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 환영받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는 곧 돈, 물자, 실력이 없으면 문전 박대해버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중 돈과 물자는 있어도 실력은 없는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게 정답이었지만.
* * *
장기매매 업자가 한명호를 데리고 뒤쪽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 이름은 엄준모야. 어릴 때부터 말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이상하게 여기지 마.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돼?”
한명호는 그를 신중히 살필 뿐,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엄준모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냥 친구나 되자고. 당신처럼 좋은 사람은 애쉬랜드에서 거의 멸종돼가고 있잖아. 나도 썩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이랑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아서. 애쉬랜드어 알아듣지?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친구를 위해 칼이라도 맞아줄 거 아냐.”
그가 마지막에 붙인 문장은 애쉬랜드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명호는 엄준모를 보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네.”
엄준모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과 친구가 된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볼 건 없잖아. 기껏해야 당신한테 몇 푼 깎아주는 게 다지. 근데 친구라면 중요한 순간 나 대신 총알을 대신 맞아, 아니, 내 목숨을 살려줄 거 아냐.”
그는 정말로 그냥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했다.
그 말에 한명호는 어쩐지 모르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엄준모와 전혀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말이 많던 누군가가.
* * *
“물고기 진짜 크다!”
성건우는 그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릴 위엔 한창 꼬치에 꿴 생선을 굽고 있었다.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용여홍 팔뚝만 한 크기의 생선이었다.
현재 구조팀은 이두형을 따라 레드울프 생선구이 전문점에 와 있었다.
이두형이 웃으며 설명했다.
“이건 타웨이 리버 중류 아르나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입니다. 퍼스트 시티가 세력을 확장하기 전까지 수십 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어서, 그곳에서 사는 생선은 대단히 큽니다. 농축된 오염물질도 아주 적고요.
원래는 그린올리브 주민들만 생선을 즐겨 먹었지만, 지금은 레드울프, 골든그레인에서도 생선을 먹는 데 익숙해져 있어요.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잡기도 쉬우니까요.”
‘선생님처럼 말하는 습관은 여전하네.’
이두형은 적절히 호흡과 박자를 조절하며 흡인력 있게 설명했다. 장목화는 그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뻤다. 저런 유형의 사람에게선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 시각, 성건우와 용여홍은 친구 아니랄까 봐 쌍둥이처럼 그릴에 집중한 채 가끔 생선을 뒤집고 조미료를 뿌리는 요리사를 구경 중이었다.
“보아하니 일을 적잖게 겪으신 모양입니다. 상당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군요.”
이두형이 구조팀 다섯을 슥, 훑으며 감개무량하다는 듯 말했다.
“네.”
장목화도 이제는 생선을 굽는 요리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는 외부인이 있어서 좀 그렇다는, 이 요리사만 없었어도 그간의 일들을 들려줄 수 있었으리란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이두형도 그녀의 반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애쉬랜드어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전 제가 원할 때만 저자가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레드리버어로 말했지만, 요리사는 그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요리사는 아예 생선과 둘만의 우주로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짝짝짝!
성건우는 신비로운 강자 이두형을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런데 이두형은 성건우의 반응을 딱히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꼭 제 오랜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네요. 하지만 그 친구가 대체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지불한 대가가 기억과 관련되어 있나?’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그녀는 위드 시티, 레드스톤 마켓, 타르난 등에서 겪은 일들을 간추려 설명했다. 이야기는 각기 다른 지역의 풍습과 특색에 집중돼 있었지만 염호의 상태, 새로운 세계, 강소월 문제, 503호, 디마르코의 이야기도 포함되었다. 그중 일부는 반고 바이오에도 보고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얻기 위해선 먼저 내어줘야 한다. 장목화는 이 불변의 진리에 충실했다.
이두형에게 중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선, 그러면서도 상대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선 솔직하게 행동하며 등가 교환을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래도 장목화가 끝까지 숨긴 이야기는 성건우의 실력이 더 성장했다는 것, 외골격 장치 두 대, 숙명주, 맹목의 고리 등 주로 팀이 획득한 장비였다.
장목화가 설명하는 동안, 성건우는 매우 협조적으로 종종 끼어들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부분들을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 역시 수시로 한두 마디 덧붙이며 화목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두형은 가끔 질문을 던지며 구조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제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제가 아직 정정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여러분과 지난번에 만난 게 벌써 몇 년은 됐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정말 대단한 시간들을 보내셨네요. 여러분들의 경험과 체험은 저한테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지금 걷는 이 길이 가장 정확한 길이라는 확신을 더해주셨어요. 말씀해보시죠. 혹시 저한테 묻고 싶은 건 없습니까?”
이두형은 진즉부터 장목화의 속셈을 꿰뚫어 본 것처럼 물었다.
장목화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 사이, 성건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선생님, 기원의 바다 끝에선 어떻게 해야 스스로를 이길 수 있을까요?”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용여홍도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백새벽과 게네바는 부수적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이두형의 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두형은 점차 노릇해지는 생선을 보다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제자를 두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더해 이두형 선생이라 부른다면 그건 괜찮을 것 같네요. 구세계에서는 으레 그런 존칭도 썼으니까요.”
‘그렇게 불리는 걸 상당히 즐기는 것 같은데.’
장목화는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만 빈정거렸다.
이내 이두형이 목을 가다듬으며 성건우 물음에 답했다.
“기원의 바다 맨 끝엔 종종 매우 극단적인 자신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건 어떤 사건이나 경험, 고통으로부터 기인할 수도 있고, 본인이 내내 억눌러왔던 다른 일면에서 비롯될 수도 있어요.
원래 자신을 이기는 건 매우 어려운 이죠. 대부분은 화해와 포용, 또 일정 정도의 통제를 선택합니다. 저는 당신이 아니니 당신을 대신해 선택할 수는 없지만 두 가지 방향으로 시도해보는 걸 제안합니다.”
성건우는 또 무슨 기이한 방법을 계획 중인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틈을 타 장목화가 물었다.
“이 선생님, 심령의 복도 안에 있는 방의 호수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뭘 대표하는 거죠?”
‘엇, 팀장님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네. 안 부끄럽나?’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이두형이 입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약간 뿌듯한 투로 답했다.
“아주 적합한 사람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심령의 복도 급 강자 중에도 수십 년 간 탐색하고도 문패 번호 규칙을 알아내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죠.”
‘정말 알고 있나 보네.’
얌전히 귀만 기울이던 백새벽이 이두형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이두형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성건우를 보며 웃었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방문에 붙은 번호의 첫 번째 숫자는 각기 다른 달지기를 대표합니다. 그들이 관장하는 달을 나타내는 거죠.”
“그렇군요⋯⋯.”
장목화도 그런 추측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그 외에도 워낙 많은 생각을 했고, 워낙 많은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유효한 단서가 없어 심층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진 못했다.
“그럼 503호는 5월의 달지기 감찰자 영역의 세 번째 방이란 뜻인가요?”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물었다.
그건 강소월의 방이자 신룡교의 꿈 보호자를 무심병에 감염시켰을 가능성이 큰 방이었다.
“예, 사실 방의 순서에는 규칙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니 501호에 들어가면 당연히 감찰자의 꿈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순 없어요.”
이두형이 설명했다.
“그럼 장생은요? 13인가요, 아니면 0인가요?”
이어진 성건우의 물음에, 이두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장생은 1일 수도, 2일 수도, 1에서 12 사이의 아무 숫자일 수도 있죠. 간단히 말하자면 503호가 반드시 5월의 달지기 감찰자 영역의 세 번째 방이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어쩌면 장생 영역 방일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장목화가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게 바로 한 해를 관장하는 달지기의 특수성인가요? 그러니까 염호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방도 꼭 보리 영역에 속한 방이 아니라 장생 영역에 속한 방일 수 있다는 거네요.”
염호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방은 102호였다.
이때 분석을 마친 게네바가 물었다.
“그럼 일반인을 대표하는 문 호수는 어떻게 됩니까? 각성한 후 대가를 지불해야만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정해지는 거 아닙니까?”
“일반인의 방문에는 호수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이 숨어 있지도 않고요.”
이두형이 간단하게 답했다.
“그럼 구세계에서 식물인간이었던 강소월은 끝내 각성자가 된 걸까요?”
장목화가 예리하게 중요한 지점을 파고들었다. 각성자가 됐지만, 결국 깨어나는 데는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이두형은 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느릿하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