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73화 (373/649)

373화. 아이샤

1분여 뒤, 휴고는 두 사람의 도움 아래 천천히 눈을 떴다.

장목화는 눈동자를 두어 번 굴리는 휴고를 보며 몹시 놀랐다.

휴고의 눈동자는 더 이상 혼탁하지 않았다. 약간 충혈돼 있을 뿐, 옅은 파란빛 그대로였다.

빠르게 초점을 찾은 휴고는 위장한 성건우와 장목화를 발견했다. 그는 몸에 묻은 오물 같은 건 살필 겨를도 없이 급히 일어나 앉았다.

“누가 들어오랬어!”

장목화는 대답 대신 추궁부터 했다.

“휴고 씨, 당신 무심병에 걸렸죠? 완전히 이성을 잃고 우리를 공격하려 했잖아요.”

이는 휴고 스스로 문을 열었다는 뜻을 내포했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를 속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어차피 휴고는 이따 문 상태만 봐도 누가 문을 연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휴고의 표정은 점차 무거워졌다. 그리고 무슨 답을 하기보단 천천히 몸만 일으켰다. 뒤이어 비로소 고개 숙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휴고가 몇 초 정도 공백을 둔 뒤 입을 열었다.

“이건 무심병이 아냐. 조금 비슷해 보이기는 하겠지만.”

“조금이 아니던데요?”

장목화는 무정하게 휴고의 변명을 파고들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휴고의 증상은 무심병과 매우 흡사했다.

무엇보다 장목화는 구조팀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팀의 목표를 위해서든, 개인적 흥미를 위해서든 뭐든 확실히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 성건우가 돌연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게 당신의 대가인가요? 무심병을 대가로 능력을 얻은 건가요?”

“난 그런 바보가 아냐.”

휴고는 그 추측을 부정했다. 그렇게 재차 침묵하며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그가 장목화와 성건우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두 사람에겐 누가 봐도 물러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이미 봤다면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겠네. 난 각성자야. 내가 지불한 대가는 이성이고. 그래서 난 간헐적으로 생물적인 본능만 남은 상태가 된다. 그 상태가 되면 무심자랑 아주 비슷해 보이지.

이전까진 어느 정도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고 발작을 하더라도 빠르게 상태를 완화할 수 있었어. 근데 너무 오랫동안, 너무 자주 억눌러서 그런지 이번 발작은 특히 심각했던 것 같네.”

성건우가 호기심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성을 대가로 지불한 건가요?”

휴고는 그를 힐긋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이 세상 곳곳이 고통으로 가득해. 삶도 그렇지. 그러니 이성을 가지고 있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대단하네요.”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정말 무자비한 사람이네.’

속으로만 짧게 표현한 장목화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심병의 본질 아닌가요? 뇌에서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 생물적 본능만 남은 상태.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의 이성은 억제된 것뿐이라 회복될 수 있지만, 무심자들은 그 부분을 완전히 잃는다는 점이네요.”

“그들은 생물적인 본능만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 체질과 신체, 천부적인 재능은 더 강화되고.”

휴고는 대답 대신 장목화의 얘기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만 지적했다.

장목화는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 휴고는 자신의 몸과 방의 토사물을 바라보다 덤덤하게 말했다.

“별일이 없다면 난 먼저 좀 씻어야겠어.”

퍼스트 시티에서 자란 주민에게 더러운 걸 씻어내는 건 거의 유전자에 각인된 습관이었다.

장목화는 미안하다는 웃음을 흘리며 성건우의 팔을 잡고 물러났다.

쾅!

문은 두 사람의 눈앞에서 사정없이 닫혔다.

* * *

“아쉽네요. 점심에 먹은 게 다 허사가 됐어.”

성건우가 아까워죽겠다는 듯 나무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늘 그랬듯 그의 헛소리는 무시하고 핵심에만 집중했다.

“휴고는 언제나 도처에 고통이 가득하다고, 세상과 삶이 다 고통이랬어. 뭔가 종교적인 느낌이 나는 말인데. 혹시 어느 비밀 교파의 구성원일까?”

성건우가 곧바로 한 가지 가능성을 제기했다.

“여명 샛별?”

이는 휴고의 능력적 특징에 기반해 추측한 결과였다.

하지만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리로 봤을 때 안 맞는 것 같은데. 여명 샛별은 꿈에 대한 두려움과 활용에 중점을 두잖아.”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가장 좋은 방법을 제안했다.

“이따 직접 물어봐요.”

장목화는 몇 초 고민하다가 말했다.

“⋯⋯됐어. 다른 사람한테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 교파면 어떡해?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줘야지.”

일찍이 생각이 다른 곳으로 새어버린 성건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채찍으로 본인을 때리고, 자기 몸에 촛농을 떨어뜨리고, 바늘로 찌르고, 칼로 자기 몸을 긋는 게 그 교파의 의식인가?”

“뭔가 좀 이상하긴 한데⋯⋯.”

장목화 역시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했다. 설마 전설 속의 자학 교파일까? 한동안 고민하던 그녀는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휴고는 이런 고통스런 행위를 하면서 생물적 본능만 남은 상태를 억누르려 한 건가?”

‘어디서 이런 방식들을 배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끼익-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휴고의 방문이 다시 열렸다.

린넨 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옅은 금발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나왔다. 얼굴도 약간 창백해 보였다.

또한 방 안의 시멘트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토사물과 각종 쓰레기도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막 입을 떼던 성건우는 장목화의 매서운 눈빛에 억지로 화제를 바꿨다.

“사장님, 혹시 유령처럼 생긴 고양이를 본 적 있나요?”

휴고는 눈을 살짝 치뜨며 냉담하게 답했다.

“난 유령을 본 적이 없는데.”

장목화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에 잠입한 일종의 변이 생물이에요. 이번에 받은 의뢰가 그 고양이랑 그 동료를 찾는 일이거든요⋯⋯.”

뒤이어 그녀는 수면 고양이와 가위 말의 외형을 간단히 설명했다.

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나 눈에 띄는 변이 생물을 만난다면 사냥을 시도해봐야지.”

성건우가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혹시 어린아이를 본 적은요? 게임을 좋아하고, 토마토 달걀 볶음 같은 옷을 입고 있어요. 아, 토마토 달걀 볶음이 뭔지 모르실 수도 있겠구나. 빨간색과 노란색이 조합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휴고가 그를 보며 반문했다.

“그것도 변이 생물이냐?”

“아뇨, 걔는 제 친구예요. 퍼스트 시티에 왔을 것 같아서요.”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설명했다.

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본 적 없어.”

그는 이어진 성건우와 장목화의 질문에 답하면서도 방에서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을 아는 장목화는 성건우를 끌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장목화는 잠시 서서 여관 입구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겐한테 최근 녹화된 감시 카메라 영상을 한번 살펴봐달라고 하자. 수면 고양이나 가위 말, 아니면 수종이가 찍혔을 수도 있잖아.”

“네, 그럼 우리 이제 뭘 하죠?”

성건우가 물었다.

장목화가 한쪽을 가리켰다.

“이번 무심병 폭발 사건에서 첫 번째로 무심병에 걸린 환자 집으로 가보자. 첫 번째 환자는 항상 제일 특별하고, 종종 뭔가를 드러내기도 하니까.”

이번 무심병 폭발 사건에서 맨 처음 병에 걸린 환자 아이샤는 스트라이프 스트리트 19호 아파트 4층에 살았다.

아이샤에겐 남편과 두 아이가 있었다. 남편은 부두의 하역부였고, 아이샤 본인은 고정 직업이 없어 옷이나 장신구, 특정 부품들을 제작해 생활비에 보탰다.

그린올리브엔 아이샤처럼 고정된 직업이 없는 여자가 매우 많았다. 이들은 주로 의류업에 종사했는데, 그에는 또렷한 이유가 있었다.

공장의 생산라인은 노후화됐지만 따로 수리나 개조를 하진 않아서, 꽃장식이나 특수한 형태의 단추 등 옷에 들어가는 각종 소형 부품은 수작업이 필수였다. 이는 복잡하진 않아도 수요가 넘치는 작업이었다.

그래도 공장은 이 부품 제작을 위해 직원을 고용하진 않았다. 직원에겐 매달 임금을 줘야 하는데, 사실 그 외의 옷들은 그러한 가공이 필요하지 않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보통 그런 옷들은 기계 한 대에 네다섯 명만 붙어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중소형 옷 공장주는 도급업자를 찾았고, 도급업자는 필요한 꽃장식, 단추 등을 분배해 사람들을 모았다. 그럼 주로 아이샤처럼 고정 직장이 없는 여성들이 집에서 작업하곤 했다. 그런 여성들이 받는 수입은 건당으로 계산되었다.

이 과정에 도급업자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일거리 분배 전 숙련공을 찾아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 또 하나는 상응하는 암흑가 조직에 일부 비용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그리해야만 남들에게 자신의 일을 방해받지도 않고, 일거리를 받은 사람들이 재료를 몰래 팔아먹지 않도록 위협할 수도 있었다.

* * *

스트라이프 스트리트는 휴고 여관에서 멀지 않았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단 5분 만에 19호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곳은 매우 습해서 겨울엔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으며, 여름에는 대형 찜통으로 변했다. 그나마 지금은 제일 더울 때가 아니라 약간 좀 답답하기만 하다는 게 다행이었다.

두 사람은 곧 난간이 얼룩덜룩한 계단을 따라 4층 아이샤 집으로 갔다.

똑똑똑-

“누구세요?”

긁히고 벗겨진 흔적이 가득한 암적색 나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앳된 남자아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너랑 친구가 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다면, 믿을래?”

“아니요.”

남자아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장목화는 웃으며 한결 부드럽게 나섰다. 일찍이 생각해둔 변명이 있었다.

“우리는 유적 사냥꾼이야.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험가라고 생각하면 돼. 기이한 고양이 한 마리를 조사 중인데, 혹시 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서 왔어.”

“어떤 고양이⋯⋯.”

조금 더 앳된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렸지만, 남자아이가 얼른 제지했다.

“낯선 사람이랑 얘기하면 안 돼! 아빠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랬어. 우리를 팔아넘길 거야. 아빠한테만 문 열어줘야 해!”

여자아이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장목화가 다시 물었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집에 안 계시니?”

순간 그녀는 갑자기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혹시 어린아이의 상처를 헤집은 건 아닌지 후회가 됐다.

문 뒤에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남자아이가 침묵을 깨고 나왔다.

“아빠가 엄마는 병에 걸려서 아주 먼 곳으로 갔다고 그랬어요. 병이 다 나으면 그때 돌아오실 거라고요.”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가 질문을 이어 나가려는데,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엄마가 어떻게 병에 걸리게 됐는지 봤어?”

“봤어요⋯⋯.”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매우 무거워졌다.

“집에 있다가 병에 걸린 거야?”

다시 이어진 성건우의 질문에, 남자아이가 약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날 엄마는 일하려고 안나 이모네 집에 꽃 가지러 갔는데 점심이 돼도 안 돌아왔어요. 저랑 시아는 계속 엄마를 기다렸어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도 났어요⋯⋯. 그러다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창문을 봤더니 엄, 엄마가…… 누, 눈이 빨개져서 계속 소리만 지르고 있었어요. 엄마가 참 많이 아파 보였어요⋯⋯.”

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장목화와 성건우도 잘 알고 있었다. 아이샤는 여러 사람을 해친 뒤 치안요원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라베 스트리트 근처에서 사살되었다.

“엄마 주위에 꽃이 있었어?”

성건우가 물었다.

“아니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남자아이는 일단 질문에는 꼬박꼬박 다 답한 뒤, 거부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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