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망중한
샤워를 마친 후, 성건우와 용여홍은 목욕 가운을 입고 1층 뷔페식 식당으로 왔다. 이곳 음식 종류는 그리 많지는 않지만 빵, 베이컨, 구운 생선, 채소, 소시지, 마카로니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마찬가지로 목욕을 마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장목화, 백새벽도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접시에 음식들을 골라 담았다.
“이렇게 해서 1인당 1오레이라니, 진짜 저렴하네.”
장목화가 막 식당으로 들어온 성건우와 용여홍을 보고 말했다.
그때, 용여홍의 고개가 급히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씻고 목욕 가운만 걸친 여자들을 태어나 처음 봤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 밀려와 도무지 고개를 바로 들 수 없었다.
“매일 올 수 없다는 게 안타깝네요. 안 그랬으면 벌써 이 목욕탕 사장을 파산시키고도 남았는…….”
접시를 들고 한창 답하던 성건우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제야 부끄러워하는 친구를 발견한 것이었다.
“야, 그래서 음식이 담기긴 하냐?”
장목화는 이런 방면으로 용여홍을 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야, 우리 밥은 따로 앉아서 먹자.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간 사장이 나까지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 같아.”
“네, 네.”
드디어 틈을 찾은 용여홍이 얼른 대답했다.
그때, 옆에 있던 백새벽이 불쑥 물었다.
“만약 나중에 적이 여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버리면 어떡할 거야? 그때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리고 공격도 안 할 거야?”
“어⋯⋯.”
용여홍은 심히 당황했지만, 세상의 어떤 여자도 그런 괴상망측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이번에도 장목화가 용여홍의 지원군을 자청했다.
“옷 벗는 동안 공격하면 되지.”
계속 그렇게 한담을 나누며 네 사람 모두 열심히 음식을 골라 담았다.
* * *
구조팀 네 사람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휴게실로 들어왔다.
현재는 각자 리클라이너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얇은 타월 담요를 덮은 채 한가롭게 졸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망중한이지.”
장목화가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차 몰려드는 졸음에 네 사람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휴게실 다른 곳에서 누군가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위층의 안마사, 솜씨가 진짜 대단해. 너도 다음에 한 번 받아봐.”
“일반적인 마사지 말하는 거 맞지?”
“당연하지! 최근에 잠도 통 못 자고, 어쩌다 잠들어도 악몽을 꿨는데 아까 마사지 받을 땐 숙면했어.”
“하하, 무슨 고민이 있길래 잠을 못 자?”
“고민 때문이 아니고, 최근 그린올리브 구역을 지나다가 무시무시한 변이 생물을 맞닥뜨려서 식겁한 적이 있거든? 휴, 신력이 시작된 지 몇 해가 지났는데 왜 도시에 돌아다니는 동물들에는 아직도 변이가 일어나는 걸까?”
“도시 밖에서 흘러든 것일 수도 있지. 너도 알지? 도시 방위군은 사람만 막지, 동물은 못 막아. 아! 근데 어떻게 생겼어? 차라리 치안소에 신고해. 그래야 나중에 다시 맞닥뜨리거나 공격당하는 일도 없을 거 아냐.”
“꼭 고양이 같았어. 아니, 그보다는 작은 표범에 가깝다고 해야지. 온몸이 피처럼 붉은 게, 가죽이 없는 것 같달까? 꼬리는 전갈 같았고, 어깨엔 하얀 가시가 돋아나 있기도 하고. 그래, 귀는 네 개였어⋯⋯.”
순간 두 눈을 번쩍 뜬 성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머지 세 팀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팀원들과 눈빛을 주고받던 성건우가 흥분한 듯 입 모양으로 말했다.
‘수종이!’
방금 그 사람이 묘사한 변이 생물은 수종의 애완동물 수면 고양이, 혹은 그 유령 고양이와 매우 비슷했다.
* * *
퍼스트 시티 사냥꾼 길드 홀.
위장한 용여홍이 한담하듯 물었다.
“팀장님과 건우가 수종이를 찾을 수 있을까?”
구조팀은 다시 조를 나눠 활동 중이었다. 용여홍과 백새벽은 사냥꾼 길드에서 정보를 구하고, 장목화와 성건우는 그린올리브 구역에서 수종이와 가위 말, 수면 고양이를 찾기로 했다.
게네바는 지나치게 눈에 띄어 당분간 야외 활동은 자제하기로 했다. 골든애플 구역에서 로봇이 한 남자를 납치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었다.
“어렵겠지.”
백새벽이 짧게 답했다.
그린올리브 구역은 골든애플 구역보다 훨씬 더 넓었다. 그곳에 상주하는, 등록된 인구수만 해도 100만 명이 넘었다. 그 안에 숨어버린 수종이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수종이는 누가 봐도 그 행보를 예상할 수 있었다. 신부와 달리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꾸미려 하거나 일정한 흔적을 남기려 한다기보다, 그저 집 안에 틀어박혀 게임이나 할 터였다.
“만약 가위 말도 도시에 들어왔다면 누군가에게 발각되거나 깊은 인상을 남겼을 텐데.”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지금 그의 손엔 서류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신부의 기억 속에서 찾아낸 반 지성교 관련 자료였다.
사실 이 방면에서 신부가 아는 건 많지 않았다. 반 지성교가 워낙 각자 일을 맡고, 협조가 필요할 때만 고위층에 도움을 청하는 게 관습이라 그러했다.
그래서 신부가 아는 건 그가 원래 파악하고 있던 부분과 목자 부이용에 관련된 일부 정보뿐이었다.
알렉스의 기억 속에서 목자 부이용의 직속 부하들은 전부 신부, 의사, 청소부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끼리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으며,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또 알렉스는 목자 부이용의 생김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와 만났을 때에서야 불현듯 깨달음을 얻으며 상대와 관련한 기억을 되찾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가짜 신부처럼 부상을 아직 회복하지 못한 듯한 부이용의 거친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조차 부이용이 의도적으로 조작해낸 거짓 특징일 수 있다고 의심했다. 다른 모든 특징은 죄다 숨겨놓고 그것만 남겨놓은 게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사실은 진짜 신부 알렉스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알렉스 기억 속 비교적 가치 있는 부분은 그가 담당한 사건과 직속 부하 정도에 불과했다.
구조팀은 그걸 다 정리해 퍼스트 시티 질서의 손에 부치기로 했다.
물론, 발신처는 익명으로 두었다.
동시에 알렉스의 기억에서 알아낸 건, 반 지성교의 다음 목표가 포카스 장군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에서 알렉스는 부이용을 돕는 보조에 불과해서 전체적인 계획을 다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 * *
2층으로 올라간 백새벽과 용여홍은 전에 그들을 접대했던 프리드리히를 만났다. 검은 가운을 걸친 프리드리히가 위장한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퍼스트 시티에 원수 몇 명이 있다는 걸 알아서요.”
백새벽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프리드리히도 그저 웃으며 다른 주제로 넘겼다.
“전에 여러분이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그 사람에 대한 단서가 나왔습니다. 어느 유적 사냥꾼이 그자를 봤다네요.”
‘한명호를 찾았다고?’
용여홍의 마음에 순간 기쁨과 놀라움이 동시에 차올랐다.
“어디서요?”
백새벽이 물었다. 그녀는 이쪽 방면에선 사냥꾼 길드가 퍽 믿을만하다는 걸 잘 알기에, 정보의 신뢰성 같은 건 따지지도 않았다.
“안타나 스트리트입니다.”
프리드리히가 답했다.
안타나 스트리트, 퍼스트 시티 암시장의 대명사와 같은 곳.
백새벽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과 주위 거리엔 수많은 현상 수배범과 불법 진료소, 밀수 상인, 노예 상인, 도망자, 암흑가 조직 구성원들이 숨어있었다.
그리하여 퍼스트 시티에서는 돈만 충분하다면 그곳에서 어떤 불법 물품이든 다 구할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물론 약간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그만큼 안타나 스트리트의 특징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
블랙셔츠파 같은 암흑가 조직에도 안타나 일만 전문적으로 맡아 처리하는 세컨드 보스가 있었다. 조직 내 그의 지위는 테렌스보다 높았다.
백새벽과 용여홍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프리드리히가 덧붙였다.
“한 유적 사냥꾼이 개인용 바주카포를 구하려고 안타나 스트리트에 갔다가 그 사람을 만났답니다. 여러분이 제공한 초상화가 확실하다면 분명 맞을 겁니다. 그 사람 눈이 뱀과 비슷해서 워낙 기억에도 잘 남잖아요.”
“왜 안타나 스트리트에 있었을까요?”
백새벽의 말에, 프리드리히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안타나 스트리트로 가는 모두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죠.”
이는 퍼스트 시티의 한 수석 사냥꾼이 남긴 명언이었다.
“전 길드를 믿습니다. 그 유적 사냥꾼에게 보수를 지급하겠습니다.”
워낙 깔끔한 성격인 백새벽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끝맺었다.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 갑자기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로봇은 어디 있습니까? 이번에는 같이 오지 않았네요?”
뭔가를 알아차린 듯 그의 웃음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말문이 막힌 용여홍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겐하고 같이 안 왔다고 전에 우리를 본 사람의 의심을 사게 된 건가? 그래도 다행이야. 진짜 신부의 죽음은 퍼스트 시티 입장에서도 잘된 일이고, 그러니 시에서도 이 사건을 엄격하게 파고들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사이 백새벽은 덤덤하게 말했다.
“저희는 꽤 큰 팀이에요. 그건 다른 할 일이 있죠.”
백새벽은 의도적으로 동료 게네바를 ‘그것’이란 레드리버어로 칭했다.
“여러분이 등록한 자료를 보면⋯⋯.”
바로 반박하던 프리드리히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백새벽은 그를 똑바로 보며 대꾸했다.
“그 자료에 진실한 정보가 얼마나 될까요. 저희 배후에 100명, 심지어 1,000명이 넘는 일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솔직한 말이었다. 반고 바이오가 구조팀의 강력한 뒷배였으니까.
프리드리히는 여유롭게 웃었다.
“최근 이틀간 로봇을 가진 팀은 전부 조사를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서식을 좀 채워주시죠. 질서의 손에 제출할 겁니다. 하하, 남의 밑에 있으면 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애쉬랜드 속담이 생각나네요.”
본래 레드리버 속담에 사자 옆의 늑대는 상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백새벽, 용여홍이 애쉬랜드인이기에 프리드리히는 이들에 맞춘 애쉬랜드의 속담으로 대체했다.
뒤이어 그는 서식이 들어간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이름, 나이, 팀 구성원, 퍼스트 시티에 온 목적, 숙소, 지난 며칠간 행적, 했던 일 등을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구조팀은 정보 조작에 관해서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바 있어, 딱히 당황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용여홍은 백새벽과 말을 맞추고자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서식을 채워나갔다. 그러다 성별마저 여자라고 적을 뻔하기도 했다.
백새벽은 팀 구성원에 서시월, 장우병 다음으로 배윤수, 양범석, 임보경 등의 이름도 적었다. 덕분에 이들은 정말로 거대한 유적 사냥꾼 팀처럼 보였다. 용여홍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백새벽의 것을 그대로 베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이름을 적는 대신 게네바의 이름은 뺐다.
이어, 백새벽은 지난 며칠간 행적도 일필휘지로 적어 내렸다. 이미 팀에서 다 같이 조작한 일들이 있어, 그 이야기를 간추려 기록했다. 시청에 가서 장원을 인수하고 전에 구한 부상자를 방문했던 일 등이 포함된 행적이었다.
사실 이 모든 건 그들이 실제로 한 일이라 거짓말이 아니었다. 단, 구체적인 시간만 의도적으로 뭉뚱그려 알리바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일들로 바빴으니, 진짜 신부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는 게 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