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작디작은 대가
이내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디마르코는 굉장히 잔인하고 감정 상태가 매우 불안정했어요. 그게 어쩌면 대가였을지도 몰라요. 그 때문에 심각한 정신 문제를 갖게 된 거죠.”
장목화가 백새벽의 말을 받았다.
“맞아, 숙명주는 디마르코의 잔여 기운이 고체화된 거야. 그 능력이 원래 디마르코만 못하듯 대가도 같이 약해졌겠지.
그리고 건우는 의사가 증명한 공식 환자야. 그 정도 대가는 건우한테 큰 반향도 없었을 거야. 75킬로그램인 사람이 한 2킬로그램 정도 늘어난 거랑 비슷하려나? 체중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만한 변화는 알아차리기도 힘들잖아.”
용여홍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럼 겁쟁이는요?”
“그런 기운에 따르는 대가도 정신 문제랑 관련돼 있을 거야.”
즉, 장목화가 말하는 요지는 성건우는 원래 정신에 이상이 있으니 그런 대가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겁쟁이를 쓸 때 내 정신 상태는 꽤 괜찮았어요. 그리고 우리 중 몇은 활발하게 머리를 굴리고, 각자 특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디마르코를 속였죠.”
1초간 멍한 표정을 드러내던 장목화가 실소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겠네.”
겁쟁이가 부가하는 대가는 인격 분열일지도 몰랐다. 그 대가 앞에, 아홉 성건우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아무런 문제도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곧이어 성건우는 옆에 놓인 맹목의 고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도 무섭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제 입맛을 뺏어갔어요.”
이 물건은 일정 시간 상대의 시력을 앗았다. 영향 범위는 무려 130미터에 달했다. 원판에 비교하면, 아마 약해진 부분은 동시에 여러 명에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일 터였다.
장목화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응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식욕을 달아나게 한 거겠지. 이걸 만다라 영역 각성자한테 쓰면 굉장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몰라.”
먹느냐 마느냐, 이는 영원한 난제였다.
이렇게 초월적 아이템의 대가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성건우가 숙명주를 꺼내 들었다. 숙명주는 꽤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앞으로 쓸 기회가 몇 번 없을 거예요. 열 번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데.”
“주요 목표에게 쓸 수 있게 최대 두세 번은 남겨둬.”
숙명주는 전투에서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기에, 장목화도 매우 아쉬울 따름이었다.
현재 구조팀의 주요 목표는 오레이 손녀 아비아, 외손자 마커스였다.
사실 구조팀은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을 조사하는 게 주 임무지, 신부를 처리하는 건 복수와 잠재된 위험 제거에 불과했다.
주요 목표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팀장 장목화가 다시금 정리에 나섰다.
“자, 이제 신부 일은 해결됐으니 최대한 조용하고 단순하게 생활해야 해. 반 지성교의 광기 어린 보복은 피해야 하니까.
건우가 신부의 기억을 뒤져보니까, 우리랑 맞서는 일은 신부에게만 맡겨져 있더라고. 반 지성교의 습관 때문이지. 아마 그에 대한 반 지성교 고위층의 시험 같은 거였을 거야.
만약 신부가 잠재된 위험인 우리를 제거했더라면, 부이용은 그에게 걸린 암시를 풀고 기억을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걸 고려해봤을지도 몰라. 그럼 정말로 신부한테도 심령의 복도에 들어갈 희망이 생겼겠지.
이 말을 하는 건, 신부가 죽었으니 우리가 전에 들킨 거처나 관련인 같은 정보는 반 지성교 손에까지 들어가진 않았을 거라고 얘기해주려고.
그러니까 늑대소굴, 휴고 여관 사람들을 이용해 우리한테 보복할 거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신부가 어딘가에 기록을 남겨두거나 하지는 않았을까요?”
용여홍이 신중하게 물었다.
“남겨뒀어. 근데 휴대하고 있어서 우리가 회수했어.”
장목화가 맹목의 고리 옆에 놓인 자루를 가리켰다. 이는 신부의 소지품이 든 자루였다.
그 자루 안에는 75오레이, 지폐 12드라세, 동전 7카스,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이미 너무 낡아버린 지갑, 손바닥만 한 수첩, 랄프 사탕 다섯 개, 플래그십 담배 한 갑, 이목구비가 없는 하얀색 가면, 레드리버 권총, 총알 아홉 개 등등이 들어 있었다.
“건우가 신부의 기억을 다 봤잖아. 다른 데 예비로 남긴 기록은 없어.”
장목화의 확답을 듣고서야 용여홍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럼 됐네요, 그럼 됐어요.”
장목화는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부이용은 여러 거리에 사는 주민들의 기억을 살펴서, 신부를 죽인 게 우리란 걸 알아낼 거야. 그자는 아무 기척도 없이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대대적으로 뒤져볼 수 있거든.”
이는 가짜 신부 곽정수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가짜 신부 샌델과 진짜 신부 알렉스의 일부 기억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났다.
용여홍의 표정이 굳어지자, 장목화가 다시 위로를 건넸다.
“다행히 미리 이 점을 고려해서 철수할 때 아무도 없는, 갈림길이 많은 골목길로 이동하라고 했었잖아. 그것도 다 부이용의 추적을 막기 위해서였어.”
또한 그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도 게네바가 다 해킹한 상태였다.
상황 설명을 마친 장목화가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반 지성교는 현재 퍼스트 시티에 내분을 일으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 근데 그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종교 조직이 아니고, 지금은 수많은 이들한테 추적당하고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외출 빈도를 낮추고 활동 범위를 축소하면서, 그들 눈앞에 대놓고 나타나지만 않으면 별문제 없을 거야.
또 우리가 잠복하는 건 퍼스트 시티 정세에 혼란이 나타나길 기다리기 위해서야. 여기가 혼란스러워지면 아비아, 마커스와 접촉할 틈도 생길 테니까.
자, 정오에 작전을 마치고 다들 고생했지? 일단 뭐 좀 먹고, 신부 기억에서 찾아낸 것들 차근차근 얘기해보자. 하하, 우리끼리의 축하연으로 치자고!”
“예, 팀장님!”
성건우가 제일 먼저 우렁차게 외쳤다.
나머지 팀원들도 호응하자, 장목화가 힐끔 눈을 흘겼다.
“와, 내가 밥 먹자고 안 했으면 어쩔 생각이었냐?”
“노래를 틀었겠죠.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난 정말 배가 고파⋯⋯.”
냅다 노래부터 부르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얼른 목소리를 높였다.
“새벽아! 여기 그린올리브만의 특색있는 음식이 뭐야?”
사실 지금까진 이런 한가로운 질문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생선이요. 생선튀김, 생선구이, 생선찜 등등. 생선 조리법이 다양해요.”
백새벽이 덤덤하게 답했다.
“그린올리브 구역 주민들이 생선을 그렇게 자주 먹어?”
용여홍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하류층 주민들의 생활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그럼. 레드리버에서 낚은 거니까.”
백새벽의 대답에, 용여홍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레드리버는 오염이 굉장히 심각했다. 구세계 파괴 당시 방사능에 오염된 데다 상류 공장 지대에서 폐수까지 방류해서, 그곳에 사는 생물들에겐 당연히 문제가 많았다. 안 좋은 방향으로 변이하는 일도 보편적으로 일어났다. 그런 생선을 장기적으로 섭취한다면, 각종 병을 달고 살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은 그런 걱정조차 사치로 만들었다. 며칠 동안 굶어서 죽거나, 몇 년 후에 병들어 죽거나. 어차피 그 끝은 똑같았다.
이내 백새벽이 먼저 짧은 침묵을 깨고 나왔다.
“디미셸이란 빵집에서 파는 검은 빵이 꽤 맛있다고 들었어요. 호밀로 만든 빵인데 그렇게 딱딱하고 거칠진 않고, 오히려 씹는 맛도 있고, 향도 풍부하대요.”
장목화가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검은 빵에 커피랑 먹자!”
성건우도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신부가 죽은 지 1시간 하고도 28분이 지난 것을 축하하며!”
“신부가 죽은 지 1시간 하고도 29분이 지난 것을 축하하며!”
게네바도 경건하게 의식을 치르듯 외쳤다.
“……하.”
장목화는 언제나처럼 짧은 한숨과 함께 천장으로 눈을 굴렸다.
* * *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목욕탕에서, 용여홍이 옆에 둔 수건을 들고 이마에 솟는 땀을 훔쳐냈다.
“퍼스트 시티 주민들은 진짜로 삶을 즐길 줄 아네.”
이곳에선 하류층 주민이라도 아직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나흘에 한 번 이런 저렴한 목욕탕에 방문하곤 했다. 집에서 직접 물을 끓여 몸을 담그는 것보다 이러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다.
이내 용여홍 곁으로 누군가가 긴 팔을 뻗었다. 함께 몸을 담그고 있는 친구 성건우였다. 진짜 신부를 처리한 후에 장목화는 팀원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레드울프 구역의 비교적 큰 목욕탕을 방문했다.
성건우는 그렇게 탕 가장자리에 팔을 턱, 얹으며 웃었다.
“너도 어릴 때 목욕해봤을 거 아냐.”
보통 반고 바이오 직원들 집엔 몸 씻을 장소가 없어서 공용 샤워실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공용 샤워실에도 욕탕이 있는 건 아니고, 샤워기만 나란히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두세 살 아래 아기들이라면 집에서도 충분히 목욕할 수 있었다. 대야 하나만 있다면 어디든 아기들의 맞춤 목욕탕이 되지 않던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만약에 대야에서 목욕하는 아기들을 못 봤다면 내가 그런 경험을 했는지도 의심했을 것 같아.”
용여홍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 겐도 같이 목욕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성건우는 자연스레 용여홍의 말을 무시하고 한숨을 쉬었다.
로봇은 방수 처리가 잘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뜨거운 물에 계속 잠겨 있는 것까지는 무리였다.
이번엔 용여홍이 웃었다.
“겐한텐 물보다 엔진오일로 채운 탕이 더 적합하려나? 좀 많이 사치스러운 목욕이 되긴 하겠네.”
따뜻한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몸뿐 아니라 정신적 긴장감도 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용여홍은 그렇게 한결 여유로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초월 영성 교단에서 신시아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네. 사실 중개자를 통해 알렉산더 감찰관한테 이 정보를 흘리고 경계심을 자극해도 될 거야. 그럼 이를 계기로 그 거두랑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잖아.”
성건우는 머리를 살짝 뒤로 젖힌 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초월 영성 교단에서 너를 당장 고문으로 삼아야겠는데.”
순간 불안해진 용여홍이 의기소침하게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성건우가 친구를 힐긋 바라보았다.
“만약 알렉산더랑 신시아가 한패면?”
“하긴⋯⋯.”
자세히 고민해보던 용여홍은 그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초월 영성 교단은 그대로 폭로돼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라면 기회를 봐서 퍼스트 시티 라디오 방송국과 TV 방송국에 침입할 거야. 아나운서한테 계속 이 말을 시켜야지.
주의하세요, 주의하세요, 신시아는 욕망 성인 교파 구성원이며 반 지성교와 합작하고 있습니다. 신시아는 현재 알렉산더 감찰관과 연계를 형성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성건우는 매우 의욕이 넘쳐 보였다.
용여홍도 성건우의 말대로 상상하다가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럼 알렉산더도 신시아와 무슨 관계든 거리를 둘 수밖에 없겠네.”
“사실 알렉산더랑 신시아 스캔들을 조작해 알렉산더와 욕망 성인 교파를 연결할 수도 있어. 그럼 그 뉴스를 본 주민들이 그를 멸시하고 혐오하겠지.
아, 새로 승급한 원로 가이우스가 우리 둘을 고문으로 초빙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네. 그럼 지금쯤 변혁파의 정변도 성공시켰을 텐데.”
용여홍이 제 허벅지를 내리치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난 왜?”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난 괴상한 생각을 하는 놈, 넌 오답을 가리는 역할이잖아.”
스스로까지 비하하는 성건우를 보니, 용여홍도 반박할 기회를 놓쳤다.
잠시 후, 충분히 피로를 푼 용여홍이 탕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약간 좀 민망했는지 등을 돌리고 옆에 있던 수건으로 허리춤까지 둘렀다.
“자신감을 가져.”
성건우의 진심 어린 충고를 뒤로한 채, 용여홍은 적당한 속도로 걸으며 샤워기 쪽으로 향했다. 그는 샤워기를 들 때까지도 수건을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