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보고
신고자가 언급한 그 골목길에, 골든애플 질서관의 또 다른 조수 시어도어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절대 만나고 싶지 않던 사람을 맞닥뜨렸다.
벽처럼 느껴지는 치안관 월이었다.
질서의 손에 가입한 첫해, 두 사람은 갈등을 빚었지만 각자 배경과 능력이 있던 관계로 누구도 서로를 어쩌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승급해 질서관 조수가 된 시어도어는 월을 압박했지만, 그즈음 월이 새로 승급한 원로 가이우스의 딸과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일이야?”
시어도어가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벽 같은 월이 웃으며 답했다.
“이 골목길 밖이 내 관할 구역인데 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월은 나무 조각처럼 활동성 없는 시어도어의 눈을 보며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건 시어도어 나름의 특징이긴 했다. 시어도어는 검은 머리칼, 갈색 눈동자에 평범한 외형이라 딱히 도드라지는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 시어도어는 셔츠에 긴 바지,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질서관 조수인 만큼 남회색 제복을 입을 의무가 없어서, 좋아하는 옷을 입어도 괜찮았다.
월과 시어도어는 치안요원들과 한 아파트 건물을 관통해 어느 골목길에 진입했다. 양옆으로 높은 벽이 자리한 골목길이었다. 양쪽으로 이 아파트를 빙 둘러 올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시간을 버리는 일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앞으로 어느 정도 나아간 그때, 시어도어와 월의 걸음이 멈췄다. 저 앞에 매우 평범한 옷차림으로 피범벅이 된 누군가가 있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데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은 남자가 벽에 기대듯 누워 있었다. 그 앞 길바닥엔 넓고 긴 혈흔이 죽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그를 이곳으로 끌고 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크게 뜬 눈에 내키지 않는다는 빛이 어린 걸 보면,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죽은 듯 보였다.
그러다 또 그 가슴팍에 걸린 하얀 종이 하나를 발견했다.
레드리버어 문자가 인쇄된 종이였다.
「난 신부다. 난 죄인이다.」
신부?
월과 시어도어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시어도어도, 월도 신부라는 호칭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소르스 원로 암살 사건이 온 질서의 손 체면에 먹칠을 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상위층 관료들은 오랫동안 귀족들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그 사이비 종교 조직의 엘리트를 잡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진짜 신부를 잡을 수 없었다.
기억 곡해와 최면 능력의 조합은 가히 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각성자가 유유히 현장을 벗어나면, 실제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바다의 품으로 돌아간 물방울을 찾는 게 더 쉬울 터였다.
그래도 질서의 손이 여러 각성자와 각종 방법을 동원해 잡은 것이 가짜 신부라 하기에도 민망한, 평범한 수준의 꼭두각시였다.
그런 신부를, 가짜 신부도 아닌 진정한 신부를 마주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심지어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진짜 신부를.
뭔가 참회하는 듯한 자세의 시신은 가슴팍에 죄를 시인하는 종이까지 걸고 있었다. 식견이 넓은 월과 시어도어도 이 순간만큼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신부가 이렇게 찾기 쉽고, 이렇게 죽이기 쉬운 존재였던가?
몇 초 후 월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가짜 신부인 건⋯⋯.”
시어도어가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를 죽인 자가 그 사실 하나 확인 못 했을까? 이렇게 대놓고 당당하게 적었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소리야.”
월도 그의 말에 동의했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아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반 지성교 목자 부이용이면, 곧바로 또 다른 신부를 보내서 죽어있는 이 녀석은 가짜라고 말할 거야.”
그러자 시어도어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 쪽에 수집해둔 진짜 신부 지문이 있잖아. 대비해보면 알겠지.”
그건 진짜 신부가 소르스 원로를 죽였을 때 현장에 남은 단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 외의 다른 생물학적 물질도 남아있었다.
이내 시어도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떨군 채 벽에 기대 누운 시신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월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막 그 근처에 이르렀을 무렵, 골목길 모퉁이에 또 다른 인영이 보였다. 신부의 시신과 비슷한 모습에, 마찬가지로 가슴팍에 흰 종이가 있었다.
「우리는 공범입니다.」
“가짜 신부까지 잡았어⋯⋯.”
월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신부가 이렇게 싹쓸이된 건가?’
두 꼭두각시를 살피던 시어도어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 반 지성교의 최근 활약상을, 현재 퍼스트 시티의 긴장된 정세를 차례로 떠올려보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신부가 건드려선 안 될 사람, 혹은 세력을 건드린 모양이야.”
월은 시신을 한참 응시하다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얼른 델리온 질서관께 보고드리자고. 전문가에게 확인해달라고 해야지.”
델리온은 퍼스트 시티 골든애플 구역 질서관이자 시어도어의 직속 상사였다. 그러나 이 구역의 특수성 때문에 현지 법무관과 급이 같아서, 오직 질서의 손의 명령만 들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두 조수 시어도어, 콘스탄츠도 다른 구역으로 전출을 간다면, 그러니까 곧장 질서관을 맡을 수 있고 변경의 중대형 거점으로 파견을 자원한다면 한 도시의 질서를 지키는 최고 관리자가 될 수 있었다.
“진짜 신부였으면 좋겠군.”
시어도어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짙은 빨간색 SUV 안.
각자 위장한 채 따로 떨어져 철수한 구조팀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렌트한 이 차에 올랐다.
“정말로 신부를 죽인 건가요?”
용여홍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신부도 죽기만 바랐어. 그럼 뭐 불쌍하게 여겨줄 줄 알았나? 우리도 신부가 죽길 바랐는데.”
장목화가 코웃음을 쳤다.
“반 지성교에 가담한 순간부터 지능과는 작별한 거니까요.”
성건우도 그 말에 동조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용여홍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했었지만, 부끄러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었다.
“팀장님, 근데 왜 굳이 가짜 화재를 일으켜 진짜 신부를 밖으로 나오게 한 건가요? 수도관을 터뜨리거나 알파 빌딩 하수도를 막아도 됐잖아요. 그럼 설사병을 앓던 진짜 신부는 어쩔 수 없이 공용 화장실로 갔어야 했을 텐데요. 그건 본인만의 문제니까, 꼭두각시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에 대한 답은 백새벽이 대신 말해줬다.
“그럼 진짜 신부한테 위장할 시간이 생기잖아. 대낮에 선글라스를 끼는 건 아무래도 좀 의심스럽지만, 그 외에도 위장할 방법은 많지. 그럼 걸음이 좀 불안정해도 몸이 살짝 앞으로 치우쳐져도 그자를 알아보긴 힘들었을 거야. 그런 위장을 한 사람이 많지 않대도 한두 명은 아닐 거잖아? 신부가 위장할 시간도 없이 다급히 나오게 하려면 거짓 화재를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어.”
사정이 없는 물과 불 앞에선 1초만 지체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진짜 신부가 스스로 월등한 존재라 자부한다 한들, 최면도, 기억 곡해도 통하지 않는 불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갑자기 기계 승려가 되지 않는 한, 끄떡하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짝짝짝!
다시 또 백새벽을 위한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백새벽도 이젠 성건우의 행동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냥 조용히 박수가 그치길 기다렸다.
“다른 방법이 아예 없었던 건 아냐. 근데 난 수도관을 터뜨리는 건 반대야. 수자원은 워낙 귀하잖아.”
백새벽의 말에, 이제 장목화와 성건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느 안전 가옥으로 가죠?”
용여홍이 물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이번에 얻은 수확이 담긴 작은 자루를 흔들었다.
“형제 허양원한테 전보를 보내야지. 이제 진짜 신부는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 조 의원한테도 보내고. 앞으로의 상황을 알려서 포카스 장군과 교류할 때 실수하지 않게.”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장목화는 늘 훌륭한 유적 사냥꾼의 면모를 보였다.
* * *
위드 시티, 성주 저택.
막 낮잠에서 깨어난 허양원은 문밖에 기다리던 심복을 보았다.
“성주, 전보가 왔습니다.”
심복은 두 손으로 종이 한 장을 공손히 바쳤다.
“누가 보낸 거지?”
심복이 종이를 받아드는 허양원의 안색을 몰래 한번 살폈다.
“그게, 그, 장우병으로부터⋯⋯.”
허양원은 눈썹을 추켜 올리며 황급히 종이를 확인했다.
전보의 내용은 매우 짧았다. 단 한 줄뿐이었다.
「우리가 이미 진짜 신부를 제거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마.」
허양원은 전보를 확인하곤 흠칫 놀랐다. 진짜 신부에 대한 복수는 상당히 장기적인 작업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구조팀은 퍼스트 시티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임무를 완수했다.
한참 뒤에야 허양원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인가 봐. 모든 전투팀 가운데 손에 꼽히는 이들인 거야.’
* * *
위드 시티, 조씨 가문 저택.
조기정이 둘째 아들 일에 골머리를 썩이던 도중, 큰아들 조이한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그들이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이미 끝난 일 아니었어? 또 무슨 전보를 보내와?”
조기정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더 악화될까 우려가 앞섰다.
이내 조이한은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그, 그들이 진짜 신부를 죽였답니다!”
“뭐?”
조기정은 목소리 크기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채, 아들 손에서 전보를 낚아챘다. 그리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소르스 장로 암살 사건과 위드시티 폭파 기도 사건으로 그도 진짜 신부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기정은 반 지성교와 완전히 반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구조팀은 단 며칠 만에 찾기도 어려운 진짜 신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조기정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능력도, 배경도,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구나.”
조기정이 보기에 구조팀은 반 지성교라는 거대한 세력도 겁내지 않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 * *
한편, 포카스 장군 역시 부하에게 보고를 받았다.
“진짜 신부가 죽었다고? 하수도를 파고들며 그늘에 숨어있길 좋아하던 쥐새끼 같은 녀석들이 드디어 천적을 만난 모양이군.”
사자 같은 장군은 드물게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면, 이 저택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매섭게 내리쳤다. 내던져진 잔은 산산조각이 난 채 온 바닥으로 흩어졌다.
* * *
“휴, 다 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회사에 보고하는 일이 남았어요.”
백새벽이 일렀다.
“그렇지.”
장목화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어떻게 전보를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몇 초 후 입꼬리를 쓱, 말아 올렸다.
“그렇게 상세할 필요는 없지. 간단히 전하는 편이 낫겠어.”
“네, 이 일로 회사가 우리한테 별도로 포상을 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요.”
성건우가 동조했다.
용여홍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다가, 옆에서 게네바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목화는 빠르게 반고 바이오에게 보낼 전보를 작성했다.
내용은 단 여섯 글자였다.
「신부를 죽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