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선택
목자 부이용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후 각성자는 각자 영역에 따라 큰 진영 두 개로 나뉘며, 그 진영에서 기초적인 능력 하나를 얻게 된다고 했다.
두 진영에서 얻는 기초 능력은 ‘전자 신호 방해’와 ‘현실 물질 간섭’으로 나뉘었다. 이중 말인 영역의 각성자가 얻는 건 전자였다.
동시에 목자 부이용은 심령의 복도 깊은 곳까지 탐색한 강력한 각성자들은 그 두 가지 능력 모두를 겸비하게 된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지금 알렉스는 목자 부이용이 준 반지를 완전히 불사르며, 그 안에 든 말인 영역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남긴 기운을 완벽히 활성화했다.
덕분에 일정 시간, 이 골목길의 각종 전자 신호를 왜곡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반지는 완전히 평범한 물건으로 변해 버렸지만.
사실 알렉스는 그 사실에 아쉬워할 여유도 없었다. 이 틈에 얼른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휙-
그런데 알렉스가 다시 아파트 옆문으로 달리던 그때, 웬 바람이 스쳤다.
정신을 차린 순간, 알렉스는 그게 사람으로 인한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달리기 시합을 하듯 알렉스를 빠르게 지나쳐 문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성건우였다.
알렉스는 그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뒤돌아선 성건우를 보니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았다.
성건우는 그대로 숙명주를 쥔 손을 휘두르며 비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바보냐? 총소리가 계속 여기서 울리는데 네가 어디로 도망쳤는지도 모를 것 같아? 거기다 네 상태론 골목길 양쪽에 높은 담을 넘기도 어렵지. 누가 봐도 답은 하나뿐이지 않냐?”
저격수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알렉스가 전심전력으로 꿈 여행 능력 유지에 집중했다면, 성건우가 꿈 밖의 총소리를 들었을 리는 없었다.
일단 알렉스는 성건우의 주먹부터 피하려 했다. 하지만 두 손이 갑자기 멎고, 오른쪽으로 몸을 날리면 치명적인 위험을 마주하게 되리란 사실도 감지했다. 오른편은 멀찍이 자리한 저격수의 충분한 범위에 속했다.
‘저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계속 날 조준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거지?’
알렉스는 속으로 분노를 토하며 자세를 낮춰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움직임은 너무 느렸고, 오히려 성건우가 휘두른 주먹에 더 가까이 달려든 꼴밖에 되지 않았다.
퍽-
알렉스는 눈앞에 별이 핑핑 도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피범벅이 된 치아 몇 개를 뱉어냈다.
탕!
총성과 함께 비틀거리다 결국 오른쪽으로 쓰러진 알렉스는 얼굴이 부어오른 것 따윈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몸을 연달아 굴렸다.
어서 성건우를 피해 아파트로 들어가야만 했다.
알렉스는 앞서 늑대소굴 사건을 통해 자신을 저지하려는 적들이 지나치게 착한 사람들임을 정확히 인지했다. 이젠 그 점을 이용할 차례였다. 아파트로 들어가서도 정 방법이 없으면 인질이라도 잡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성건우는 진짜 신부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아주 민첩하게 돌아서며 또 한 번 알렉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성건우와 알렉스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진짜 신부는 본능적으로 최면 능력을 발휘하려는 듯 눈동자에 허상의 소용돌이를 드러냈다. 성건우는 순간 멍해졌지만, 양손은 마치 다른 인격에 조종되고 있는 듯 거침없이 위로 들려졌다.
지금 성건우 손에는 숙명주가 없었다. 그건 이미 얌전히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고, 현재 그의 손엔 아이스모스와 연합202가 쥐어져 있었다.
시커먼 총구 두 개가 신부의 몸과 왼편을 겨냥했다.
나머지 오른편은 장목화가 맡고 있었다.
이는 구조팀이 훈련하는 내내 각자 특별히 집중한 방향이었다.
‘난 머저리야!’
알렉스는 분통이 터졌다. 성건우가 최면에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다는 걸, 그에게 능력을 발휘하려면 평소보다 5배, 10배는 더 공들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최면 능력을 발휘한 자신에게 깊이 실망하고 분노했다.
‘바보냐?’
이 말이 어쩌면 성건우 능력의 시작점일 수도 있었다.
이 순간, 알렉스는 오른쪽이 가장 위험하다는 걸 감지했다. 제자리에 남아있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왼편으로 향한다면 다치긴 해도 치명적이지는 않을 터였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이 세 가지뿐이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알렉스가 경멸 섞인 웃음을 드러냈다. 그가 선택한 건 오른쪽이었다. 동시에 그는 가슴팍에 맨 보리주를 완전히 활성화했다.
알렉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 현장에서 죽든, 억지로 삶을 구하려 발버둥 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상대에게 붙잡힌다는 건 선택지에도 없었다. 오만하고 자존심 센 그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속세 말인의 손에 자신의 최후를 넘긴다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탕!
목표의 전파 신호에 생긴 변화를 감지한 장목화가 방아쇠를 당겼다.
오렌지 소총의 총알이 진짜 신부에게 명중했다.
처음에 알렉스는 몸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있는 듯 총알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겨우 1초뿐, 방어막은 소리 없이 깨지며 알렉스의 몸을 관통했다. 뒤이어 울린 총성 두 발로 끝내 신부의 몸에도 붉은 흔적이 피어났다.
‘역시 난 심령의 복도 급이 아니구나.’
알렉스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내 풀썩 쓰러진 그의 시야에 다급한 성건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버텨!”
알렉스가 어리둥절하던 순간, 성건우가 숙명주를 꺼냈다.
“아직 네 기억 못 뒤졌어!”
신부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성건우의 눈을 보며 모든 생각이 멈춰버렸다.
성건우의 눈동자엔, 죽음을 코앞에 둔 한 평범한 인간이 고여 있었다.
아홉으로 나뉜 성건우는 숙명주로 알렉스의 기억들을 빠르게 훑었다. 최근 일에 중점을 두긴 했지만, 알렉스의 일생도 대략이나마 파악했다.
이내 신부의 심령 세계를 나왔을 때, 성건우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잠깐 정신이 맑아진 알렉스를 발견했다.
알렉스는 조용히 성건우를 올려다보며 경멸을 표하려 사력을 다했다. 그러다 성건우의 눈에 비친 묘한 감정을 읽었다.
그는 알렉스를 약간 가련하게 보고 있었다.
“네 출신, 아직 기억하고 있어?”
불쑥 던진 성건우의 물음에, 알렉스는 속으로 코웃음만 쳤다.
‘그럼 기억 못 하겠냐?’
지금 알렉스는 무엇도 생각지 않고, 죽음이란 거대한 악장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 삶의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이란 또 흔히 던진 말에 흔들리는 것 아니겠는가. 새록새록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알렉스의 어머니는 퍼스트 시티 귀족의 후예였고, 아버지는 이름난 애쉬랜드인 전사였다. 그 걸출한 부모 아래, 알렉스는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똑똑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으며, 목자 부이용의 눈에 들어 납치당했다.
그렇게 그는 반 지성교 미래 골간으로 자라났다.
알렉스도 목자 부이용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각성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차기 신부 이름을 건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하며 경쟁 상대였던 각성자들을 꼭두각시로 삼았다.
신부가 된 그는 여러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고, 대부분을 다 성공시키며 유명세를 얻었다.
침묵이 흐르던 그때, 성건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어릴 적 기억은 목자 부이용이 왜곡시킨 걸 거야. 넌 귀족의 후예도 아니고, 레드리버인 혈통도 아니야. 두 애쉬랜드인 노예의 아이였어.
내 생각에 목자 부이용이 이 기억을 왜곡한 건, 너를 거만하고 자부심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 같아. 넌 사실 그자의 꼭두각시였을 뿐이야. 매우 강한 주체성을 지닌 꼭두각시.”
알렉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기억 영역에서의 경험이 있어, 그간 소홀히 여기던 과거의 문제들을 즉각 발견해냈다. 다시 성건우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알렉스는 자발적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내가 꼭두각시일 뿐이었다니⋯⋯. 귀족 혈통도 아니고, 부모님 모두가 노예였다니⋯⋯.’
알렉스의 정신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신념도 빠르게 붕괴했다. 속세 말인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 그건 그의 평생 자부심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숙명주를 거두며 물었다.
“넌 한 번도 자아를 포용하지 않고 심령의 복도에 들어갔어. 그런데도 이상함을 느낀 적이 없었어? 신부란 칭호를 쟁탈했을 때 넌 사실 거의 실패할 뻔했어. 목자 부이용이 비교적 잘 파악한 널 몰래 도와준 걸 거야.”
‘내, 내가 다른 가짜 신부들보다 더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고?’
결국 알렉스의 온 세상이 무너졌다. 마음은 고통으로 범람했고,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최후의 순간이 임박한 것이었다.
늘 솔직하고 정직한 성건우는 이 순간에도 진심을 다했다. 그는 진짜 신부에게 허리를 굽히며 정말 진심으로 예를 갖췄다.
“사실 네 지능은 꽤 좋은 편이야. 하지만 과하게 교만했고 믿을 만한 도우미가 곁에 없었지. 다음 생에선 더 열심히 공부하길 바라. 휴, 원래는 너를 매달아 놓고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는데, 지금 네 모습을 보니 됐다 싶다.”
그 순간 알렉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차라리 매달아 놓고 때리라고, 제발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그게 더 치욕적이라고 눈빛이 간절히 말하고 있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거뒀다. 눈도 채 감지 못한 최후였다.
* * *
우람한 체격의 듀카스는 동료 카시엘과 병사 무리를 이끌고 허스트 아파트 부근의 한 거리에 이르렀다.
주위를 둘러보던 카시엘이 조용히 불만을 표했다.
“그냥 납치 사건 아냐? 왜 우리한테 오라고 하는 거지? 질서의 손 녀석들은 전부 다 죽었대?”
질서의 손이란 퍼스트 시티 경찰서와 최고 관료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 아래 각 시의 법무관, 각 구역 질서관, 각 거리 치안관, 치안요원들이 있었다.
듀카스는 그녀를 힐긋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 정세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원로들은 골든애플 구역에서 조금 이상한 기척만 일어나도 불안해해. 그리고 질서의 손에 비하면 우리 도시 방위군이 규모로 보나 장비로 보나 훨씬 더 강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도 드론들이 주위 구역에서 단서를 찾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병사가 몇몇 목격자를 데리고 왔다.
“그래, 어떻게 된 거지?”
듀카스가 물었다.
20대로 보이는 한 목격자가 답했다.
“어느 로봇이 거리에서 한 남자를 저 골목길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로봇?”
카시엘이 놀란 듯 되물었다. 로봇이 속한 팀이라면 돈을 벌 일이 널리고 널렸을 텐데 왜 굳이 납치, 강도 짓을 한 걸까?
“예, 키가 이 정도쯤 되는 로봇이었죠!”
또 다른 몇몇 목격자가 말을 보탰다.
듀카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확실히 만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군.”
* * *
근처 구역, 또 다른 거리.
카페 근처 우체통 옆에 갈색 머리, 파란 눈동자, 조각 같은 얼굴선을 가진 남자가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바쁘게 움직이는 부하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골든애플 질서관 조수 콘스탄츠였다. 키가 187센티미터에 달하는 남자는 거의 쉰 살이 다 되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긴 하나 몸이 상당히 좋았으며, 세월에 따른 분위기까지 더해져 더욱더 느낌 있는 미남자가 되었다.
이 때문에 콘스탄츠는 상류 사회 귀부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누군가 거리에서 납치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굉장히 거만했답니다.”
한 치안요원의 보고에,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콘스탄츠가 답했다.
“그래, 용의자의 초상화는 완성됐나?”
“예.”
치안요원이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
종이엔 선글라스를 끼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거칠고 성급해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으로는 레드리버인인지, 애쉬랜드인인지, 혼혈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감히 골든애플 구역에서 납치를⋯⋯.’
콘스탄츠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감시 카메라가 가장 많은 구역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은 머신헤븐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많은 편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츠는 매우 충격적인 보고를 받았다.
“뭐? 이 구역 감시 카메라가 동시에 고장 났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