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겨루기
다크서클이 짙은 알렉스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온몸에 잔뜩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성건우에게 직접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이 골목길로 빠져나올 거란 거?”
흘러나오는 음악 속, 성건우가 왼손을 꽉 쥔 채 웃었다.
“신부 선생, 혹시 우리 팀에 지능로봇 동료가 있단 건 다 잊었어? 그 친구 자체가 소형 기지국이 될 수도 있어. 모듈을 장착해 스스로를 개조하는 거지. 물론 임시적이고, 범위도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우리는 네가 알파 빌딩에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주위 여러 주요 지점의 감시 카메라를 장악했어. 그리고 우리 지능로봇 팀원한테 실시간으로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달라고 했지. 네 도주로를 찾아서.
잘 알겠지만, 지능로봇의 계산 능력은 우리 탄소기반인을 월등히 뛰어넘잖아. 프레임 단위로 화면을 분석하는 데 몇 초도 안 걸려.
네가 이 아파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린 이미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어. 한동안 네가 나오지 않길래 각자 출구 하나씩 맡았고. 그러니까 정말로 네가 불운한 건 우리한테 발각된 게 아니야. 나한테 걸린 거지.”
그 말에 신부 알렉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자신의 인지, 습관, 경험을 뛰어넘는 전투 방식을 마주한 것 같았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대가 변했어요, 신부 선생님. 기술은 생활까지 바꾼다고요. 유일한 흠이 바로 비싸다는 거겠지만. 지나치게 신중한 것도 꼭 좋은 건 아니야. 넌 정말 지나치게 신중했다고. 도망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정도로. 그러니까 앞으론 절대 이 교훈 잊지 마. 만약, 너한테 또 나중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더 이상 피로해 보이지 않는 신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성건우는 조금 더 친절을 베풀었다.
“넌 옷 입고 위장한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단번에 이 골목길에서 레드울프로 가서 다른 거리로 방향을 틀었다면 우리도 널 놓쳤을 거야. 그때 우리랑 이 아파트 사이의 거리는 꽤 됐었거든.
게다가 이 골목길은 우리가 장악한 감시 카메라 범위의 가장자리야. 임시 기지국 역할을 맡은 우리 동료의 한계치였어. 네가 이 구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그대로 널 놓치는 거였다고.
참 안타깝게도 넌 지나치게 신중했고. 제일 귀중한 기회를 옷 갈아입는 걸로 끝내버렸어.”
그때, 알렉스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들고 선글라스 너머 성건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혈 애쉬랜드인이 아닌 남자는 레드리버인 이름을 가졌어도 짙은 검은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깊은 밤처럼 어두운 알렉스의 눈동자에서 미세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소용돌이는 마주한 상대의 영혼을 다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는 성건우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듯 걸음을 떼기도 했다.
그러나 성건우는 마치 진흙으로 빚어 만든 꼭두각시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넌 내 종이다.”
알렉스의 음성은 기묘한 침투력이 있었다. 묵직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상대의 영혼을 꿰뚫을 것처럼 강렬했다.
그렇게 앞길을 가로막은 성건우를 막 지나칠 무렵, 알렉스가 벌린 양팔이 갑자기 뻣뻣해지며 빨리 떠나려는 마음에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알렉스는 걸음마저 어색해지며 살짝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성건우가 어느새 몸을 틀고 알렉스의 어깨를 움켜쥔 뒤, 날렵하게 무릎을 쳐들고 알렉스를 가격했다.
퍽!
알렉스는 입을 쩍 벌린 채 새우처럼 등을 굽혔다. 성건우는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고 렌즈 안쪽에 붙인 사진을 보여주며 씩, 웃었다.
“놀랐지?”
알렉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실제 시선 접촉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최면의 전제 조건이 갖춰지기도 전에 섣불리 행동했다니!
“아, 맞아. 알려주는 걸 깜빡했네. 난 처음부터 네가 신중하게 구는 게 좋은 건 아니라고 믿게 만들었었어.”
성건우가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나치게 신중한 것도 꼭 좋은 건 아니라는 것, 이는 사실 추리 광대 능력을 유도하는 문장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성건우 눈앞의 모든 게 헛것으로 변했다. 수면에 비친 사물이 어디선가 날아온 돌 하나로 흩어지듯, 모든 것이 깨져버렸다.
이로 인해 성건우는 진짜 신부와 오랜만에 재회한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방금 발생한 일은 알렉스가 업그레이드된 꿈 여행으로 진행한 리허설일 뿐이었다. 모든 게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알렉스는 성건우의 계획과 대응을 모두 다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하나 달라진 점이 있긴 했는데, 성건우는 매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 골목길에 온 이유가 뭔지, 알렉스가 누구인지도 잊은 모양이었다.
알렉스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러곤 줄곧 늘어뜨리고 있던 오른손으론 왼손 새끼손가락에 낀 유리구슬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는 목자 부이용의 기억 곡해 능력을 고체화한 물건이었다. 적용 범위가 반경 10미터에 불과해도, 눈빛 접촉 없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사실 이는 알렉스가 가진 자체적인 능력과 중복되는 것이었지만, 당시 포상으로 이 반지를 선택한 건 순전히 그의 결정이었다.
이 반지가 있으면 꿈 여행 능력 사용과 동시에 상대의 기억을 곡해할 수 있어서였다. 그 기억 곡해 능력의 적용 범위는 알렉스가 가진 기억 곡해 능력 적용 범위보다 무려 5미터나 더 넓었다.
각성자 전투에선 단 1미터라 해도 승부를 가리는 분수령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반지가 패용자의 자아인지에 이상한 상태를 부가해도, 알렉스는 꾸준히 이 반지를 끼고 다녔다.
분초를 다투는 중요한 순간, 알렉스가 꿈 여행을 사용한 건 리허설 후 제대로 한판 붙으려는 게 아닌, 진정한 목적을 가리고 싶어서였다.
성건우와 거리를 좁히고 일부 기억을 교묘히 곡해해 자신을 놓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알렉스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렇게 의혹에 빠진 성건우를 두고, 알렉스는 재빨리 골목길 출구로 돌진했다. 틀림없이 이곳을 떠나야만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갑자기 뭔가를 감지한 알렉스가 옆으로 몸을 날렸다.
탕!
조금 전 알렉스가 있던 곳에서 살짝 앞쪽에 땅바닥 돌가루가 튀며 총알구멍이 났다. 멀리서 누군가 총을 쏜 것이었다.
바로 장목화였다.
동시에 의혹에 빠져 있던 성건우가 다시 또 싱그럽게 웃었다.
“내가 경계하고 있지 않을 거란 생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했던 거야? 난 그냥 네가 내 기억을 곡해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던 건데.”
그 사이 성건우가 꽉 쥔 왼손을 풀어 청록색 야명주를 드러냈다.
성건우는 아까부터 이 숙명주의 힘으로 자기 기억을 감시하고 중요한 일부 내용은 숨겨두고 있었다.
몸을 굴려 총알은 피했지만, 신부의 눈빛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성건우는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랑 잠시 놀아준 건 우리 동료를 위해 시간 좀 끈 거야. 그러니까 신부 선생님, 일대일로 맞짱을 뜰래요, 아니면 다구리를 원하세요?
흠흠, 맞짱은 너 혼자 우리 한 명씩 상대하는 거고, 다구리는 우리 다 한꺼번에 모여서 널 패는 거야, 사이좋게.”
이 얼마나 오래도록 고대한 대사였었나. 성건우는 이제야 날개를 편 새처럼 여러 단어를 내뱉었다. 적을 위한 섬세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안전 구역에 놓인 스피커에서도 여전히 그를 위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알렉스는 일단 성건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총쏘기 힘든 구석으로 굴러가 곧장 대응에 나섰다.
알렉스의 오른 손목에 채워진, 검은 머리카락으로 짠 기이한 장신구에서 불에 타는 듯한 빛이 발산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몇 차례 사격으로 그는 장목화의 위치를 대략 파악했다. 알렉스는 상대가 이 맹목의 고리 능력 범위 안에 있음을 확신했다.
맹목의 고리는 알렉스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이 장신구 덕에 그는 적용 범위 내에 존재하는 인간 의식을 감지하고 상대의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가로수 위에 올라가 있던 장목화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뒤이어 알렉스는 깊어진 눈동자로 다시 성건우를 보며 꿈 여행이라는 각성자 능력을 발휘했다. 이번엔 리허설을 위해서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도, 거리를 좁혀 상대의 기억을 곡해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이 능력을 이용해 가짜 신부로 위장하고, 자체적인 인간 의식을 숨길 작정이었다. 그러면 꿈 여행의 효과를 유지해 성건우의 집중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몰래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알렉스의 꿈 여행 능력 범위는 반경 30미터에 달했다. 그 정도면 안전거리를 충분히 확보하고 도망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성건우를 맞닥뜨린 순간 그의 능력에 영향을 받아 억지쟁이가 된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허둥지둥 도망치지 않고 멋지게 자리를 뜨고 싶어서 꿈 여행으로 리허설을 하고, 몰래 상대와 거리를 좁히고, 기억을 곡해해버린 것 같았다. 그때 바로 이 오래된 수법을 발휘했다면 벌써 이 곤경에서 벗어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다음 순간, 성건우는 자신을 지나쳐 골목길 출구로 돌진하는 인간 의식을 감지했다. 골목길 출구는 레드울프 구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건우는 곧장 선글라스를 벗고 빠르게 달아나는 신부의 뒷모습을 보았다. 신부의 신체 능력을 감안한다면, 10미터 정도는 봐줘도 될 것 같았다.
* * *
그사이 알렉스는 조금 전 길을 따라 몰래 이전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꿈 여행 효과 유지를 위해선 조깅하듯 가볍게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때, 알렉스는 뭔가를 감지한 듯 가슴팍이 뜨거워져서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탕!
동시에 총알이 또 한 발 날아와 전방의 바닥을 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맹목의 효과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저격수는 어떻게 아직도 날 조준할 수 있는 거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의식 옆에 그 로봇이 숨어있기라도 한 건가?’
충격에 빠진 알렉스는 더는 머리를 굴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굴리고 달리며 목적지를 향해 수시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꿈 여행과 맹목의 효과를 유지했고, 가슴팍에 맨 보리주(菩提株)에 의지해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때맞춰 공격을 피했다.
원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그에겐 형언하기도 힘든 여정이었다.
그 기나긴 고난 끝에, 마침내 몇 미터 앞에 아파트 옆문이 보였다. 하지만 알렉스의 안색은 다시 또 굳어버렸다.
그 문에서 검푸른 군복을 입은 은흑색 로봇이 튀어나왔다. 붉은 눈빛을 번득이는 그 로봇의 주먹은 어쩐지 힘이 넘쳐 보였다.
여기서 가장 먼 출구를 맡았던 게네바가 드디어 이곳에 이르렀다.
알렉스도 더는 요행심을 품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왼손을 들었다.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유리구슬 반지에선 순수하고 밝은 빛이 나왔다. 그리고 반지는 그 빛을 따라 하나에서 둘로 분화됐다.
그중 매우 실제적인 하나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허상으로 변한 다른 하나는 공기 중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런데 게네바가 갑자기 알렉스를 지나쳐 골목길 출구로 향했다. 수집한 환경 정보에서 진짜 신부가 그곳으로 도피 중이라고 알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위의 각종 전자 신호도 방해를 받은 상황이었다.
이는 알렉스가 로봇에게 발휘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였다.
그는 목자 부이용을 통해 전자 신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한두 영역에만 존재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사실 그건 보편적인 기초 능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