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세상의 모든 만남
허스트 아파트로 향하던 남자는 사거리에 이르러 갑자기 레드울프 구역으로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옆쪽 골목길에서 검푸른 군복을 입은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키가 190센티미터에 달하고 온몸이 은흑색 금속으로 이루어진, 게네바였다.
진짜 신부로 의심되는 목표를 마주한 게네바는 성건우의 신신당부에 따라 미리 녹음해둔 음성을 재생했다.
- 너한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나를 따라 저 골목길로 들어간다. 둘째, 나한테 한 대 얻어맞고 저 골목길로 끌려간다.
순간 진짜 신부로 의심되는 남자의 눈빛이 굳었다.
* * *
허스트 아파트 반대 방향, 또 다른 의심 대상은 황급히 한 카페로 향했다. 그곳을 그대로 가로지른 뒤 후문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탕!
그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그 앞쪽에 총알이 박혔다.
남자는 민첩하게 몸을 굴려 옆쪽 우체통 뒤로 피한 후였다.
이내 남자의 눈에 선글라스를 낀 채 환하게 웃는 성건우가 들어왔다.
- 헤이, 네가 정말 보고 싶어⋯⋯.
성건우의 전술 배낭 안에서도 때맞춰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양쪽으로 흩어진 목표가 모두 붙잡힌 걸 확인한 뒤, 용여홍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백새벽에게 상황을 알렸다.
이때 알파 빌딩 3층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도 옅어졌고, 화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백새벽은 현재 후문 구역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곳에 또 한 무리가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중 털모자를 쓴 한 사람이 시종일관 고개를 푹 숙인 채 앞으로 살짝 치우쳐진 자세로 걷고 있었다. 걸음도 약간 불안정해 보였다.
흠칫 놀란 백새벽은 모든 정신을 그에게 집중한 끝에, 옆얼굴만 보이는 상대에게 짙은 다크서클과 숨겨지지 않는 피곤한 기색이 있음을 포착했다.
“후문에 의심 대상 하나 더 출현.”
백새벽이 냉정하게 보고했다.
- 젠장!
용여홍은 순간 욕이 다 튀어나왔다.
* * *
허스트 아파트 근처 거리.
진짜 신부로 의심되는 남자는 게네바의 방송을 들으며, 그 붉은 눈빛과 2초 정도 눈을 맞췄다. 그러다 갑자기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남자는 그 길로 행인들이 가장 많은 곳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인간이 빨라 봐야 얼마나 빠르겠는가. 단번에 거리를 좁힌 게네바는 강철 손을 뻗어 상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부욱-
퍽!
남자의 옷이 찢기고, 게네바는 나름 힘을 조절해 남자를 기절시켰다. 그런 뒤 게네바는 놀란 행인들을 뒤로한 채 조용한 골목길로 남자를 끌고 갔다.
이때 멀찍이 들려오던 소방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게네바 역시 백새벽의 최신 보고를 들었다.
- 헤이, 네가 정말 보고 싶어⋯⋯.
길가 우체통 옆에선 음악이 흐르고, 또 하나의 진짜 신부 후보는 선글라스를 낀 채 환하게 웃는 성건우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막 성건우가 행동에 나서려는데, 무전기가 울렸다.
- 후문에 의심 대상 하나 더 출현.
백새벽의 목소리였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성건우가 돌연 맞은편 남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실례.”
성건우가 그대로 떠나려는 걸 보고 남자는 잠시 멍해졌다.
그때, 성건우가 다시금 진지한 얼굴로 돌아섰다.
“하지만 네 혐의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으니 나랑 같이 가줘야겠어.”
갑자기 남자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성건우와 눈이 마주친 틈을 타 최면을 시도한 것이다. 아무리 성건우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고 한들 눈이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고 최면을 걸 수 있었다.
그런데 성건우는 아예 영향을 받지도 않은 듯 맹렬히 돌진해 남자의 하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남자는 이 상황에 의아해하면서도 얼른 몸을 틀어 두 손으로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어느새 두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퍽!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는 거대한 새우처럼 등이 굽어 버렸다. 성건우는 침착하게 선글라스를 벗고 한 번 더 주먹을 날려 남자를 기절시켰다.
사실 성건우의 선글라스는 평범한 선글라스가 아니었다. 각 렌즈 뒤편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성건우의 좌우 눈을 찍은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남자가 선글라스 너머로 본 눈은 성건우의 사진이었던 셈이었다.
눈앞이 사진으로 막혀도 성건우는 인간의 의식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 능력으로만 남자를 정확히 공격한 것이었다.
기절한 남자를 등에 멘 후, 성건우가 레드리버어로 소리쳤다. 레드리버어를 쓴 건 레드리버인으로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보긴 뭘 봐! 사람 납치하는 거 처음 봐?”
‘휴, 이 말을 할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는지.’
성건우는 인질을 짊어진 채 또 다른 후보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 * *
백새벽은 오렌지 소총에 장착된 스코프에 눈을 바짝 붙이고, 털모자 쓴 후보를 집중해 쫓았다. 목표의 걷는 자세, 신체적 특징은 구조팀이 추리한 진짜 신부와 매우 비슷했다. 전에 찾은 두 후보보다 더 마른 편이기도 했다.
남자는 뒷골목 각종 장애물과 오가는 행인들을 이용해 혹시 존재할지 모르는 저격수와 감시자를 피하며 게드 빌딩 쪽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백새벽은 그 외에도 사방을 관찰하고 있었으나 성건우, 장목화, 게네바의 그림자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목표는 돌연 방향을 틀어 8, 9층 정도밖에 안 되는 평범한 건물로 돌진했다. 그 건물 홀을 관통해 다른 출구로 빠져나간 뒤 미행자나 감시자를 떨쳐버리려는 모양이었다.
백새벽은 망설임 없이 상대의 두 다리를 노렸다. 그가 무고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이내 백새벽이 냉정하게 방아쇠를 당긴 순간, 남자는 거의 동시에 뭔가를 느낀 듯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탕!
조금 전까지 남자가 서 있던 곳에 돌가루가 튀며 깊은 총알 자국이 새겨졌다. 진짜 신부로 추정되는 남자는 몸을 굴린 뒤 돌아서서 백새벽이 있는 고층 빌딩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손목에 찬, 검은 머리카락으로 짜서 만든 듯한 오래된 장신구에서 불에 타는 듯한 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백새벽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것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백새벽과 남자의 거리는 근 100미터 이상이었다. 기원의 바다 급 각성자라면 절대 이 정도 거리의 대상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백새벽은 각성자 능력으로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진짜 신부는 심령의 복도에서 찾아낸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 물건의 능력 범위가 훨씬 더 넓은 건가?’
더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백새벽은 얼른 오렌지 소총을 거두고 혹시나 이어질지 모르는 공격을 피했다.
10여 초 후, 백새벽의 캄캄한 시야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진짜 신부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백새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나 옥상 난간에 오렌지 소총을 걸쳤다. 스코프를 통해 목표가 있던 곳을 확인했으나 이미 텅 빈 자리였다.
눈앞에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이 있었지만, 진짜 신부로 의심되는 그가 정말 저기로 들어갔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 * *
짧은 머리, 진한 다크서클, 꽤 준수한 이목구비의 소유자 알렉스는 곁에서 여자가 건네는 린넨 셔츠를 받았다. 이 집의 남자 주인 역시 본인 외투와 긴 바지를 아주 정성스레 바쳤다.
알렉스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쓰고 있던 파란 털모자를 건넸다. 남자는 아주 기쁘게 모자를 받아 바로 착용해보았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위장한 알렉스는 왼손 새끼손가락에 낀 유리구슬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부부에게 인사한 뒤 문을 나섰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알렉스는 지금 처한 상황에 몹시 분노한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어려움은 거의 다 지난 상태였다. 이젠 이 원수를 배로 갚아줄 시간이었다.
이내 파란 털모자를 쓴 남자 주인이 웃으며 아내를 돌아보았다.
“오는 길에 모자 하나를 주웠어요.”
아내도 슬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집에 도둑이 들어 옷 몇 벌을 훔쳐 갔어요.”
* * *
알렉스는 복도를 따라 옆쪽 출구로 향했다. 이곳으로 나가면 레드울프로 통하는 작은 골목길이 나왔다. 인구 유동량이 많은 레드울프 구역에 진입한다면 곤경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지금도 딱히 큰 위험을 느끼진 않았다. 이미 모든 감시자와 미행자는 다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그런데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건, 당최 어떻게 들통난 건지, 포착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알렉스는 구세계 유명한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그야말로 악착같은 환경을 만들었다. 그전까진 꼭 나서야 할 때, 목표와 대면해야 하는 상황을 제하면 적들에게 위치를 들킨 적도, 포위당할 뻔한 위기도 없었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걸까. 거만한 진짜 신부, 알렉스는 자신감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았다. 여태껏 느끼던 안정감도 다 사라졌다.
만약 이 문제에 답을 찾지 못하면, 계속 이와 같은 사건이 생길지 몰랐다. 알렉스도 때마다 순조롭게 곤경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그도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었다.
알렉스는 다시금 전후 상황을 꼼꼼히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실수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어쩌다 발견했나? 아니야, 운일 리가. 난 최근에 외출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기억은 전부 곡해시켜뒀어. 설령 그들이 운이 좋았다고 한들, 아무 단서도 없는 상황에 내가 알파 빌딩에 있단 걸 알아낼 순 없는 거야.
내 위치는 나만 알고 있었지, 부이용 장로도 몰랐어. 이건 분명 어느 부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거야. 추적당할 단서를 놓친 거야. 최대한 빨리 그게 뭔지 알아내야 해. 그래야 잠재된 싹을 다 뿌리 뽑지.’
알렉스는 냉정하게 생각하며 옆문 문고리를 열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가 앞으로 약간 치우쳐진 자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일로 얻은 유일한 장점은 워낙 강렬한 자극과 긴장감으로 고도의 흥분감에 피로감이 싹 가셨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또렷해진 건 참 오랜만이었다.
골목길로 진입한 그때, 알렉스는 전방에 인간 의식을 감지했다. 뭘 하는 건지 거기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알렉스는 별안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목길 한가운데, 회색 제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성건우였다.
그 곁엔 알렉스와 특징이 매우 비슷한 남자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성건우는 알렉스를 보고, 구세계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착용하면서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신부 선생, 오랜만.”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총알도 닿을 수 없을 구석에서는 잔잔한 노랫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 헤이, 네가 정말 보고 싶어⋯⋯.
진짜 신부 알렉스와 성건우, 분명 ‘오랜만’인 사이였다.
이들은 딱 한 번 위드 시티 사냥꾼 길드 밖에서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당시 성건우는 알렉스에게 좀 쉬면서 잠을 잘 자라는 조언도 건넸다.
그 많은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적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지금 알렉스에겐 그런 것 따윈 아무것도 중요치 않았다. 오로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만 잔뜩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알렉스는 분명 미행자와 빌딩 옥상에 숨은 감시자를 따돌리고 방향도 몇 번이나 틀었다. 심지어 옷까지 갈아입었는데도 상대에게 따라 잡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말이 안 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혹시 상대의 몸에 모종의 표식을 남겨놓는 각성자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