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64화 (364/649)

364화. 바다에 빠진 바늘 찾기

다시 또 대꾸하려던 보젠은 문득 반쯤 썩은 사과를 하나 발견했다. 그는 눈을 환하게 빛내며 가져온 린넨 자루에 넣고서야 웃으며 입을 뗐다.

“그래, 분명 누군가의 불같은 사랑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걸 거야. 근데 참 안타깝게도 그 옷을 골든애플이나 레드울프에 팔 엄두가 안 나더라고. 결국 그린올리브로 가져가긴 했지만. 무려 5오레이나 받았어. 그달은 정말로 아름다운 시간이었지.”

잔뜩 집중해 이야기를 듣던 성건우가 넌지시 의견을 표했다.

“그 옷, 적어도 50오레이는 했을 텐데요?”

“50? 최소 200이지!”

보젠이 반박하는 걸 보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교육을 어느 정도 받으셨나 봐요.”

“난 시민이야. 원래는 군대에 있었고.”

“그럼 어쩌다 넝마주이가 된 건가요?”

보젠은 한동안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난 우리 대대에서 사격 실력이 제일 좋았어. 공훈도 많이 세웠는데, 후에 있던 전쟁 때 오른팔을 다치고 더는 전처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어. 그래서 군대를 떠났지.

당시 남쪽 교외에 논밭을 상당하게 받았었는데, 몇 년간은 나쁘지 않게 살았어. 그런데 날씨 변화가 급격했던 해에 식량 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졌고, 원로원에서도 우리에 대한 지원을 포기해버렸어.

그 이후로 늘어난 빚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난 그 논밭을 한 귀족 양반에게 팔아버리곤 도시로 들어왔지.”

장목화가 의도적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유적 사냥꾼이 되어 북쪽 기슭 불모지에서 생활할 생각은 왜 안 하셨어요? 당신 정도 나이면 아직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텐데요.”

보젠이 쓰게 웃었다.

“빚 이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는 걸 알게 된 그날부터 내 왼팔이 수시로 경련을 하더라고. 이런 팔로는 총을 쓸 수가 없지.”

쓰레기장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성건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당신들을 돕지 않았던 원로원이 원망스러운가요? 그 기회를 이용해 고리대를 제공하고 당신들 논밭을 빼앗아 간 귀족들이 원망스러우세요?”

몇 차례의 표정 변화를 보이던 보젠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원망스러워. 어떻게 안 원망스럽겠어? 훔, 귀스타브, 파리스를 비롯한 그들 목숨으로 받은 땅이었어. 하지만 그 땅은 끝끝내 그 전쟁에서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았던 귀족들 손에 들어갔지.

우리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만들어낸 게 지금의 퍼스트 시티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 땅을 빼앗아 갈 생각만, 우리를 공장으로 보낼 생각만 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예 중 3년을 넘기는 이는 몇 없어!”

고개를 번쩍 쳐든 보젠의 얼굴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빛이 어려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는 성건우와 눈을 맞췄다. 퍼스트 시티 내부 갈등을 이렇게 살에 와닿게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알파 빌딩, 건물 밖에 붙은 쓰레기장.

백새벽과 용여홍도 방독면을 쓴 채 게네바와 함께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여러 회사와 상가, 그리고 그 직원들에게 제공된 아파트가 딸린 이 빌딩은 원래 오늘 계획에는 없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이들은 팀장 장목화의 통지를 받고, 게드 빌딩, 허스트 아파트를 명단에서 제하고 이곳으로 왔다.

“진짜 인내심 한번 지독하게 시험하는 작업이네.”

용여홍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 말에 백새벽이 고개를 돌려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서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이면 진짜 신부도 별로 신경 쓰지 않겠지. 얼른 해. 쓰레기차가 오기 전까지 다 마쳐야 해.”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쓰레기를 뒤지는 이들은 반드시 사람이 많은 시간대를 피해야 했고, 동시에 쓰레기 차가 이곳의 쓰레기를 수거하기 전 시간을 노려야 했다. 안 그럼 쓰레기들이 한데 모여 출처가 어딘지 알 길이 없어졌다.

“알겠어.”

용여홍은 밀려드는 구역감을 애써 참으며 작업을 이어 나갔다. 이런 방면에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 게네바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던 와중, 얇은 비닐봉지 하나를 집어 든 용여홍이 그 안에 들어있던 쓰레기들을 바닥에 쏟았다.

뒤이어 흩어진 쓰레기들을 살피는데, 그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그 쓰레기들 사이에 필터가 굉장히 짧은 담배꽁초 여러 개가 섞여 있었다. 바로 플래그십 담배꽁초였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든 용여홍이 쓰레기장 밖, 27층에 달하는 알파 빌딩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이거 봐!”

용여홍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외쳤다.

백새벽과 게네바도 곧 필터가 짧은 담배꽁초를 확인했다.

게네바는 바로 붉은 눈빛을 번득였다.

“플래그십 담배다.”

용여홍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혹시 자신이 잘못 알아봤을까, 괜히 흥분한 걸까 걱정했지만 출중한 분석력을 자랑하는 게네바에게 확답을 받아낸 것이다.

백새벽은 아무 말 없이 그 쓰레기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더 많은 증거를 찾아냈다. 그중엔 랄프 사탕 포장지, 빈 휴지 포장, 핸드드립 커피 찌꺼기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일단은 진짜 신부로 판단해도 되겠어.”

고개를 든 백새벽이 용여홍과 게네바를 한 번씩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미처 감추지 못한 웃음이 고여 있었다.

거듭된 실패, 실망, 헛수고 끝에 마침내 진짜 신부의 꼬리를 잡았다.

용여홍 역시 희색을 감추지 못한 채 얼른 입을 열었다.

“빨리 팀장님이랑 건우부터 불러오자.”

그로부터 1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성건우와 장목화가 달려왔다.

증거를 확인한 뒤, 성건우는 웃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헤이, 네가 정말 보고 싶어⋯⋯.”

“그만! 아직 축하는 일러. 진짜 신부를 잡거나 처리한 뒤에는 그 앞에서, 아니면 그 시체 앞에서 5분간 마음껏 공연하게 해줄게!”

장목화도 성건우의 노래를 끊긴 했지만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스피커랑 겐도 함께 부르게 할 거예요, 서라운드로.”

그 틈에 또 조건을 붙이는 성건우를 보다, 장목화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단계적인 성과를 얻은 것뿐이야. 중요한 건 이 건물에서 어떻게 진짜 신부를 찾아내느냐지.”

“치안관으로 위장해서 집 하나씩 다 검사해볼까요?”

용여홍은 무려 27층이나 되는 고층 건물 알파 빌딩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이곳엔 회사나 상가 직원뿐만 아니라 아파트 거주민들도 있었다.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안 될 거야. 아마 저 빌딩에는 꼭두각시가 엄청 많을 거야. 평소에는 정상인과 다름없이 일하고 생활하다가도, 뭔가 이상한 낌새가 발각되면 곧장 진짜 신부의 귀와 눈이 될 태지.”

“맞아, 그걸 피할 길이 없어. 우리가 어느 집 문을 두드리고 사건을 조사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면, 그 맞은편, 혹은 맞은편 옆집에선 문구멍으로 모든 걸 지켜보던 가짜가 정해진 방식으로 진짜 신부에게 경고해줄 테니까.”

장목화의 설명에 이어, 게네바도 분석을 거친 답을 내놓았다.

“이와 비슷한 방법을 배제했을 때 남는 건 한 가지뿐이야. 진짜 신부가 스스로 나오게 하는 것.”

짝짝짝!

성건우는 지능인 겐을 위해 손뼉을 쳐주었다.

그러자 게네바의 눈에서도 붉은빛이 몇 차례 번득였다.

끝으로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우린 진짜 신부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야 해.”

* * *

다음 날, 오후 2시.

장목화, 성건우, 게네바는 알파 빌딩에 위장해 잠입한 뒤 3층 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성건우는 창가로 가 테이블과 의자를 치워두고, 대리석 바닥에 모종의 처리를 했다.

뒤이어 게네바가 메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은 뒤 그 안에 든 물건 절반을 빈 바닥에 쏟아냈다. 연기를 일으키기 쉬운 인화성 물질이었다.

장목화는 곧장 방독면을 착용한 뒤 성냥 몇 개를 그어 그 위에 던졌다.

그러자 불길이 몸집을 키우며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맹렬한 화염이 타올랐지만, 이미 주위 물건들을 다 치워둔 덕분에 밖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짙은 연기가 천장에 설치된 경보기에 닿자, 알파 빌딩 곳곳에서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게네바의 진정한 활약이 시작되었다.

일찍이 이곳 감시 시스템에 침투해 있던 게네바는 화염 분사기로 창밖을 향해 화염을 뿜고, 화면엔 구세계 콘텐츠를 편집한 장면을 띄웠다. 감시 인원들이 건물 내 소방 시설로는 해결이 불가하다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구조팀의 예상대로 건물 내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질서 정연하게 건물 밖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십시오! 고층 주민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십시오!

알파 빌딩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방송에 회사 직원들과 아파트 거주민들은 황급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가장 빨리 탈출한 사람들은 3층 어느 창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았다.

저 장면을 보고도 화재를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알파 빌딩 맞은편 건물 옥상.

오렌지 소총을 설치해둔 용여홍은 총에 장착된 스코프로 알파 빌딩 정문 밖으로 뛰어나오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이는 용여홍이 처음으로 맡은 단독 임무였다. 늘 그와 조를 이뤘던 백새벽은 현재 뒷문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래도 이젠 신입 티를 벗은 용여홍은 이런 감정을 다루는데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는 연달아 심호흡을 두 번 한 뒤 알파 빌딩 정문 구역에만 집중했다.

혼란한 그곳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용여홍이 눈을 번득였다.

무리 가운데 진짜 신부의 특징과 매우 부합한 자가 있었다.

키는 장목화와 비슷했고, 다크서클이 짙어 상당히 피곤해 보였으며, 걷는 자세는 앞쪽으로 살짝 치우쳐 있었다.

나이는 27, 8살 정도로, 상·하의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짧은 머리칼도 검은색이었다. 이목구비 윤곽이 진한 편이긴 해도 전체적으로 애쉬랜드인에 가까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주위 건물과 사람들을 이용해 의식적으로 높은 곳에서의 저격을 경계하고 있었다.

용여홍은 계속 눈으로 그를 쫓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목표 출현, 목표 출현, 허스트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보고를 마치니 상당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이제 용여홍은 진정으로 온 마음과 정신을 집중한 채 진짜 신부로 의심되는 상대를 겨냥했다.

그때였다. 팀장의 분부에 따라 알파 빌딩 정문 구역에 대한 감시도 함께 하고 있던 용여홍은 곁눈으로 또 한 사람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나이는 27, 8살, 검은 옷에 짧은 검은색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키도 175~180센티미터 사이, 짙은 다크서클에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남자는 몸을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빠르게 다른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외모는 확실히 먼저 발견했던 의심 대상과 다른데, 저 남자 역시도 진짜 신부의 특징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진짜 신부, 이 개자식⋯⋯.’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구세계 콘텐츠에서 배운 욕설을 뱉은 뒤, 황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또 다른 의심 대상 출현! 허스트 아파트 반대편으로 이동 중!”

장목화의 조가 각자 흩어져 저 두 명 모두를 막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저격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의식적으로 저격을 피하며 피신하고 있다 한들 적어도 한 명은 꼭두각시, 무고한 사람일 것이기에 방아쇠를 당기는 건 신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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