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K
실버캔들 카페.
의도적으로 용병처럼 보이게끔 위장한 장목화와 성건우는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한 뒤, 창가 근처 구석진 예전 그 자리에 앉았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혹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뜻밖의 상황에 대비해 각기 다른 곳을 감시 중이었다.
저질의 부샤르 커피를 마시던 도중, 성건우가 갑자기 이야기했다.
“우리 키랑 모습이 퍼스트 시티에서는 너무 눈에 띄어요. 아무리 위장해도 인상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그냥 차라리 무근자들을 찾아가 염색할까요? 휴, 지금 애쉬랜드에 색깔 콘택트렌즈가 드문 게 참 안타까워요.”
사실 무색의 일반 렌즈 생산량도 극히 적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눈이 나빠져도 안경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생활 수준이 평균 정도 된다면 안경만 써도 충분했기에 굳이 렌즈를 찾지 않았다. 콘택트렌즈라는 건, 피라미드 꼭대기 최상위층에나 쓸 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차라리 머리를 박박 밀지 그래.”
장목화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그런데 성건우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해서, 장목화가 얼른 뱉은 말을 수습했다.
“근데 그러면 더 눈에 띄겠지?”
대머리 성건우라니, 쉽게 상상도 가지 않았다. 물론 그가 머리를 박박 민다면 훨씬 더 강해 보이긴 할 것 같았다.
그때, 검은색 얇은 코트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키가 175센티미터에 못 미치는 한 남자가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빠르게 카페 안을 훑어보더니 장목화 뒤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가 막 성건우, 장목화를 지나치던 그때였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훔치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쪽지 하나를 성건우 앞쪽에 떨어뜨렸다.
성건우도 즉각 손으로 쪽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퍼스트 시티 내 반고 바이오 정보원 가리발디,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유유히 장목화 뒤쪽 자리에 앉았다.
가리발디는 이번엔 자기소개도, 질문도 없이 장목화의 말만 기다렸다.
반듯이 겹쳐 접은 여러 장의 쪽지가 바로 그의 피드백이었다.
쪽지엔 퍼스트 시티 원로 소르스가 진짜 신부에게 암살된 사건의 상세한 내막, 그 담배의 분석 결과, 퍼스트 시티의 현재 정세, 중요한 원로 몇몇과 그들이 맡은 역할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퍼스트 시티의 정세와 중요 원로들의 정보는 반 지성교의 다음 목표를 파악 내는 데 필요한 정보였다.
장목화는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더 이상의 요구는 없어.”
그녀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음량 조절이 완벽하진 못해서, 성건우가 다시 그녀를 도와 가리발디에게 말을 전했다.
가리발디는 곧장 일어나는 대신 평범한 손님처럼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장목화도 조급히 굴지 않고 한참 후에야 성건우가 건네준 쪽지를 펼쳤다. 첫 번째는 담배의 분석 결과가 적힌 쪽지였다.
「사람의 타액 검출. 타액에 박하사탕 성분이 있었음. 해당 성분 비교 결과 랄프 사탕이라는 사실 확인. 랄프라는 식물 뿌리에는 정신을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으나 과도한 복용 시 설사를 유발함. 퍼스트 시티에서 꽤 인기 있음. (*주: 퍼스트 시티의 음식을 먹으면 변비, 소화 불량이 잦음). DNA는 실험실 데이터베이스 내 표본과 일치하는 것 없음. 신분 특정 불가.」
이 내용을 확인할 무렵 장목화는 가리발디가 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떠나는 걸 인지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쪽지를 살폈다.
탕!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장목화, 성건우는 급히 고개를 들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거리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검은색 얇은 코트에 야구모자를 쓴 가리발디였다.
퍼스트 시티 내 반고 바이오 정보원 가리발디가 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그것도 구조팀과 막 접선을 마친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탕!
별안간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위치는 가리발디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 낡은 셔츠에 회색 긴바지를 입은 남자가 고통에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그 옆엔 검은 권총 한 자루가 떨어져 있고, 남자의 오른 허벅지엔 살점과 피가 터져 나와 형편이 없었다.
장목화는 이를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저 남자가 바로 가리발디를 암살한 범인이었다. 그리고 범인을 저격한 건 이곳을 감시하던 백새벽이었다. 그녀가 오렌지 소총으로 범인의 오른 다리를 저격한 것이었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장목화, 성건우는 즉각 실버캔들 카페에서 튀어 나가 가리발디에게 향했다. 거리는 겁에 질려 달아나거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행인들로 약간 번잡스러웠다.
장목화, 성건우는 제일 먼저 가리발디의 상태부터 살폈다.
피로 붉게 물든 가슴팍……. 척 봐도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애절한 눈으로 장목화,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장목화는 그제야 가리발디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가리발디는 애쉬랜드인이 아니었다. 눈동자는 새카맸지만, 혼혈이라고도 추측될 정도로 얼굴형이 갸름했으며,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상당히 수려하고 앳돼 보였다. 이제 갓 스물을 넘은 것 같달까.
장목화는 그의 가슴팍에 난 상처를 살피며 어디에 총을 맞았는지 확인하고, 전술 배낭을 풀어 페이카 생물학적제제를 꺼냈다.
응급 처치 기술은 경험 있는 유적 사냥꾼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능력이었다. 무엇보다 이 구조팀은 필수적으로 그런 훈련을 받게 돼 있었다.
“참아.”
장목화가 짧게 말한 뒤, 현장에서 바로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가 성건우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범인의 상태를 확인하고, 누가 사주했는지 알아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성건우는 피에 흠뻑 젖은 범인에게로 다가갔다.
장목화는 일단 페이카 생물학적제제부터 빠르게 주사한 뒤, 전술 배낭을 엄폐물 삼아 무전기를 꺼냈다.
“작은 흰둥이, 넌 게네바랑 그 자리에서 사방을 감시하면서 만반에 대비해 줘. 작은 빨강이는 얼른 요 앞쪽 사거리로 차를 가져와. 바로 여기까지 오지는 말고, 일단 거기서 내 통지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선 성건우가 쓰러진 남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낡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이미 온 땅을 피로 물들였다.
“남길 말이라도?”
성건우는 평범하게 생긴 레드리버인을 보고, 레드리버어로 물었다.
남자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다 꺼져가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면, 온통 붉게 물든 회색 바지가 보였다. 그는 여태 사수로서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해왔다. 그랬기에 자신이 맞이한 결말이 딱히 놀랍진 않았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조용히 숨이 끊기기만 기다리고 싶었지만,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냥 죽어버려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남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난 그저, 돈을 받고 일했을 뿐이야.”
“그 일을 시킨 게 누구지?”
성건우는 쪼그려 앉아, 남자를 구조할 시도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점차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 사수는 단 한 명이라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가고 싶다는 듯 극도로 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K⋯⋯.”
결국 남자의 눈이 천천히 감기며, 숨소리가 더욱 위태로워졌다.
심문을 끝낸 성건우는 다시 장목화의 곁으로 돌아왔다.
1차로 가리발디의 상처를 처치한 장목화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애쉬랜드어로 말했다.
“다행히 심장이 관통당하진 않았어. 의료 수준이 괜찮은 곳으로 가기만 하면 죽지는 않을 거야.”
사실 이 시대에 실력이 괜찮은 의사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혼란한 환경 덕에 총상을 능숙하게 처치할 줄 아는 의사는 꽤 있었다.
말을 마친 장목화가 쪼그려 앉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무슨 수확이라도 있었어?”
“K라는 사람이 시켰대요.”
그 이름에 가리발디의 안색이 변했다.
장목화도 그 표정을 봤지만, 그냥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만 물었다.
“병원에 데려다줄까? 아니면 여기 두고 치안관이 처리하도록 할까?”
2초간 망설이던 가리발디가 답했다.
“두고 가. 회사엔 내가 총 맞았다는 거 잊지 말고 알려줘.”
‘음, 퍼스트 시티에 회사 정보원이 더 있을 테고 가리발디에게도 동료가 있을 테니, 우리가 괜히 조바심 낼 필요는 없겠지.’
장목화는 상처 처치에 썼던 각종 도구를 전술 배낭에 집어 넣었다.
1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으니, 치안관 일고여덟과 부하가 도착했다.
“너희, 친구냐?”
뒤늦게 나타난 치안관은 거리에 쓰러진 가리발디를 보고 아주 독특한 억양의 레드리버어로 물었다.
치안관의 체형은 억양만큼이나 매우 인상적이었다. 위아래로만 늘어난 게 아니라 전후좌우로 쭉쭉 늘어난 체형이었다. 뚱뚱하다는 건 아닌데, 어깨가 넓고 폭이 두꺼워 꼭 벽 같았다.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기 카페에서 커피 마시다가 이 사람이 다쳤길래 급히 응급 처치를 한 것뿐이에요. 치안관님도 아시겠지만, 저희 유적 사냥꾼들은 필수로 응급 처치를 익혀둬야 하잖아요.”
“맞습니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내 벽 같은 치안관이 고개 숙여 가리발디를 바라보았다.
“응급 처치 솜씨가 뛰어나네. 그래도 우리랑 치안소로 가서 진술을 해줘야겠어. 커피값 안 내고 온 거라면 지금 가서 얼른 내고 와.”
“값은 주문할 때 치렀어요.”
장목화는 자신들은 음식값이나 떼어먹는 도둑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다시 뒤이어 성건우가 말했다.
“어쩌면 카페 사장님이 저희가 너무 멋지다고 공짜로 주실지도 모르죠.”
그는 원래 ‘정의를 위한 의거’라는 표현을 쓰고 싶었지만, 그 말을 레드리버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멋지다고만 표현해버렸다.
성건우가 뜬금없는 소리를 해도, 치안관은 그냥 신경도 쓰지 않고 부하 둘에게 사수의 시신을 살피게 하고, 다른 부하들에겐 주변 가게 안의 목격자들과 거리의 구경꾼들을 조사해 더 많은 단서를 수집하도록 했다. 또 치안요원 하나를 불러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리발디를 옮기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척척 잘도 처리하시네⋯⋯.”
장목화가 작은 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인재가 상당한 걸 보니, 퍼스트 시티도 그렇게 심하게 추락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맞아요, 제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게 제일 현명하네요.”
성건우가 깊이 동감했다.
이윽고 모든 목격자가 장목화, 성건우가 카페에서 튀어나와 부상자를 치료해줬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치안관에서 진술을 마치자마자 저녁 대접도 못 받고 그대로 쫓겨나 버렸다.
그러나 수확이 있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를 담당했던 치안관의 이름은 월인데, 어느 귀족 가문의 후손인 것 같았다.
* * *
구조팀 다섯은 다시 레드울프 구역 그 숙소에 모였다.
“누가 한 짓이죠?”
용여홍이 다급하게 물었다.
장목화가 다정히 웃으며 답했다.
“K라는 사람이 시켰대.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회사에 보고는 해야지. 가리발디는 보아하니 누군가한테 원한을 산 것 같던데.”
성건우가 호응했다.
“무지 잘생겼었잖아요. 누군가의 부인을 빼앗았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용여홍이 단호히 대꾸했다.
“모두가 웰러 같은 건 아냐.”
레드스톤 마켓 법의관 웰러는 상사의 아내와 붙어먹다가 들켜서 어쩔 수 없이 도망쳐 나온 바람둥이였다.
“근데 그런 사람도 꽤 많아.”
게네바까지 동참하자, 장목화가 가리발디가 준 쪽지들을 꺼냈다.
“그래, 그건 어쨌든 우리 일이 아니니까. 겐, 이것 좀 투사해줄래? 다 같이 한꺼번에 확인하자.”
담배꽁초 분석 결과는 벌써 살폈으니, 이제 장목화는 진짜 신부가 원로원 장로 소르스를 암살한 사건과 현재 퍼스트 시티의 정세를 주목했다.
소르스가 반 지성교 눈에 든 건 시민 교육을 집중적으로 주장해서였다.
그러나 진짜 신부는 원로 소르스에게 상당한 경호원이 붙어 있었음에도 그 특유의 성동격서 방식으로 모든 걸 무력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