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환원
이내 성건우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신부가 토끼를 잡는 걸 보고 싶었는데⋯⋯.”
그 교활하고 모략에 능통한 악인이 숲에서 토끼를 잡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참 우스웠다.
장목화는 계속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접고서 정신을 차렸다.
“흔적이나 찾자!”
그녀는 다시 손전등 빛으로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비추며 간단한 측량을 진행했다. 머릿속에선 천천히 윤곽이 그려지고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흔적이네. 키는 175~180센티미터 사이, 남자고 체중은 적은 편이야. 나보다 덜 나갈 것 같아. 구체적인 무게는 진흙에 찍힌 정도를 토대로 계산해볼 수 있으니까 이따 겐한테 맡겨야지. 미세 증거물 채취랑 사진 촬영도 겐한테 맡기면 될 거야.
발자국을 보니 앞이 더 깊이 파였고 뒷부분은 얕아. 걸을 때 무게가 앞으로 쏠려 있나 봐. 신발 바닥 패턴이 퍼스트 시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인지는 모르겠네. 훼손도가 꽤 심해서⋯⋯.’
장목화는 손전등 빛을 더 멀리 돌리며 두 번째 발자국 탐색에 나섰다.
비가 잦은 봄이라 진흙이 무른 덕에 머지않아 일련의 발자국을 찾아냈다. 발자국들은 백새벽과 용여홍이 원래 자리해 있던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목화는 해당 궤적을 보조칩에 저장한 뒤 미간을 살짝 구겼다.
“진짜 신부 걸음걸이가 좀 이상하네.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보통 발자국은 일정하게 이어지다가 방향을 틀어야 할 때만 변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발자국은 때로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꺾이고, 때로는 깊고, 또 때로는 얇았다. 비틀거리며 걸은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이런 변화가 심했다면 백새벽과 용여홍의 관심을 피하려고 일부러 그랬다든가, 아니면 술에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 발자국의 괴리와 폭은 심히 작았다.
성건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춤이 좋은가 봐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게 좋을 수도 있고.”
순간 진짜 신부와 성건우가 함께 ‘작은 사과’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광경이 떠오른 장목화는 힘겹게 그 생각을 떨쳐냈다.
다시 성건우가 덧붙였다.
“아니면 몸이 허약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 말에, 장목화의 눈이 확 밝아졌다.
“그래, 그렇게 마른 걸 보면 정말로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일단 진짜 신부가 가진 세 가지 능력은 최면, 기억 곡해, 그리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환각과 관련된 뭔가야. 신체 건강과 관련된 능력은 없어.
그러니까 그가 지불한 대가가 이것과 관련돼 있거나 원래 몸이 비교적 약한 편인 거야. 음, 내가 기억하기론 말인 영역의 대가 중에 수면 장애가 있었는데. 진짜 신부의 대가도 이것일까? 이 발자국들, 꼭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남긴 것 같지 않아?”
짝! 짝! 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오랫동안 수면 장애를 앓으면 어떤 특징이 나타나지? 다크서클이 진해지고, 피로하고, 안색도 초췌하고, 또 정신을 자극하는 물건에 대한 의지⋯⋯.”
장목화는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점점 흥분했다.
성건우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네요.”
장목화는 진짜 신부가 남긴 발자국을 잘 고정해둔 뒤 성건우와 함께 숲속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 나타난 일부 발자국은 망가져 있거나 지워져 있었지만, 수색 범위를 넓힌 끝에 새로운 흔적을 찾아냈다.
한참 그 흔적을 추적하던 두 사람은 숲을 관통해 반대편 끝에 이르렀다.
이곳 역시 땅을 단단히 다져 만든 도로로, 차가 수시로 오가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이 근처를 뒤졌지만, 흔적이 심각하게 훼손된 까닭에 발자국 방향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성건우가 찾아낸 단서 하나가 있었다. 진흙이 잔뜩 묻은 담배꽁초였다.
“담배에도 정신을 차리게 하는 효과가 있어. 진짜 신부가 수면 장애를 앓는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니만큼 그가 남긴 흔적일 수도 있지. 나중에 돌아가서 전문가한테 분석을 부탁해보자.”
장목화가 장갑 낀 손으로 담배꽁초를 주워 원래 약품이 들어있던 작은 봉지에 넣었다. 또 담배꽁초가 발견된 곳엔 차 바퀴에 짓눌린 흔적도 있었다.
“개조한 SUV인 것 같아. 일반적인 SUV보다 흔적이 더 깊어.”
두 사람은 주위를 조금 더 살펴보았으나 더 이상의 수확은 얻지 못했다.
지프와 회색 SUV를 세워둔 곳으로 복귀한 두 사람은 게네바에게 미세 증거물 채취와 사진 촬영을 부탁한 뒤, 다 함께 퍼스트 시티로 돌아갔다.
* * *
구조팀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그린올리브 구역 아이언메달 스트리트의 숙소가 아닌 레드울프 구역에 자리한 안전 가옥을 택했다.
“휴, 내일은 조기정한테 연락해서 어떤 보수를 받을 수 있을지 보자.”
장목화가 안락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으며 중얼거렸다.
용여홍이 잠시 머뭇거리다 이야기했다.
“우리가 원하는 걸 다 주려고 할까요? 작전 후반부에 우리가 한 일이 없잖아요. 장원을 주겠다고 했던 말도 정확한 약속은 아니었고요. 게다가 그 사람은 지금 포카스 장군과 연계를 형성한 상태잖아요.”
“그럼 무장하고 가서 보수를 요구해야지.”
성건우가 의욕 넘치게 대꾸했다.
장목화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근데 우리가 부담한 위험도 절대 작은 게 아니야. 하마터면 진짜 신부의 손에 죽을 뻔했잖아. 난 그 사람이 우리 수고를 충분히 이해해줄 거라 믿어. 적어도 장원 하나는 내주겠지.
그리고 난 우리가 진짜 신부를 제대로 처리할 때까지 계속 이 일을 맡을 거라는 암시도 할 거야. 하하, 조기정도 진짜 신부가 살아 있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잖아? 조씨 가문에서 장원 하나를 내준다는 게 결코 가벼운 보수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출혈이 생기는 것도 아니야.”
용여홍은 의아함을 표했다.
“우리가 계속 반 지성교를 조사하고, 진짜 신부를 처리할 거라고요?”
장목화가 몸을 꼿꼿이 세워 앉았다.
“그건 우리가 진짜 신부를 처리할지 말지에 달린 게 아니야. 그가 계속 우리한테 보복하려 할지 말지에 달린 문제지. 그런 시한폭탄을 달고 다니는 상황에선 무슨 일을 하든 안심할 수가 없어. 직접 나타나지 않더라도 우리가 두 목표에 접근할 기회를 찾았을 때 갑자기 소리를 질러 그대로 끝장내버릴 수도 있다고. 게다가 난 늘 말해왔다시피 엄청나게 속이 좁은 편이라.”
그 말을 하는 장목화는 참 묘하게도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짝짝짝!
성건우가 때맞춰 손뼉을 쳤다.
곧이어 장목화가 백새벽과 게네바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포카스 장군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아. 조기정이나 허양원을 통해 심문 결과를 얻는 게 최선이야. 우리한테는 회사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이상 퍼스트 시티 내부 갈등에 참여할 능력이 없으니까.
작은 빨강이랑 흰둥이는 쉬면서 좀 마음도 편하게 풀어줘. 우리 셋은 얻은 단서를 연구하면서 애쉬랜드어 입문용 교재도 만들고 있을게.”
그녀도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때, 살짝 망설이던 성건우가 물었다.
“그래도 축하연에는 참석하는 거죠?”
“초대를 받는다면 참가를 고려해볼 수는 있겠지.”
장목화는 기대 가득한 성건우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고르고 골라서 참가를 고려해보겠다는 매우 신중한 표현을 내뱉었다. 그때 상황과 그 후를 감안해서 결정하겠다는 의미였다.
성건우도 만족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용여홍, 백새벽은 큰일을 겪은 터라 확실히 지친 모양이었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침실로 향했다.
그때, 장목화가 당부를 남겼다.
“문은 닫지 마.”
“네?”
용여홍이 돌아보자, 장목화가 웃으며 설명했다.
“너희들한테 아직 영향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 수시로 너희 상태를 살펴보려고 그래. 영 잠을 못 잘 것 같으면 숙명주의 대청소도 있고.”
성건우가 용여홍을 보며 음산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잠들어 있던 중에 갑자기 내 목을 조르려고 할지도⋯⋯.”
“구세계 콘텐츠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감히 그런 일이 없으리라 단언할 수는 없어서, 용여홍은 충실하게 침실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용여홍과 백새벽이 잠들자, 장목화가 성건우, 게네바에게 말했다.
“일단은 현장을 수색하다 찾아낸 물건들부터 연구해보자.”
그녀가 먼저 담배꽁초가 든 작은 봉지를 꺼내 식탁에 올려놓았다.
레드울프에서 빌린 이 방엔 침실 세 개, 거실 하나, 화장실 하나가 딸려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갔지만, 구조팀은 활동 경비 덕에 큰 고민 없이 이 방을 빌릴 수 있었다.
이내 게네바도 잘 싸 온 무언가 한 무더기를 꺼내놨다. 그런 뒤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으로 스캔까지 마쳤다.
“이게 뭐야?”
성건우가 성큼성큼 걸어와 앉아선 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봉지 안에는 검은색 낟알 두 개가 들어있었다.
게네바 역시 의자를 당겨 조심스럽게 앉았다.
“분석해보니 석탄재다.”
장목화도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찾았는데?”
게네바가 상세히 설명했다.
“관목과 돌 위에 남은 여러 발자국이 있었어. 그 표면에 남아있었던 거야. 이것도 마찬가지고.”
그가 또 다른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안엔 검게 탄 흙이 들어있었다.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흙이었다.
두 사람이 묻기 전, 게네바가 알아서 설명했다.
“이것들은 숲의 진흙보다 색이 짙어. 남쪽 교외의 흙과 확연하게 다르지. 거기다 이것들에선 미량의 방사능도 감지돼. 비교해보니 레드리버 북쪽 기슭 불모지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무려 95퍼센트 이상에 달해.”
장목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진짜 신부는 최근 신발을 갈아신은 후에 도시 밖으로 나가 북쪽 기슭에 방문했었다는 거지⋯⋯. 이 석탄재는 어디에서 밟은 걸까?”
그녀는 퍼스트 시티를 돌아다니다 관찰한 몇몇 현상들을 떠올렸다.
그린올리브 구역에서는 수시로 정전이 됐으며 전기요금도 싸지 않았다. 이에 하류층 주민들과 노예들은 석탄재를 뭉쳐 만든 구공탄, 질 낮은 목탄, 염가의 목재로 불을 피우고, 밥을 짓고, 난방하는 걸 더 선호했다.
그래서 그린올리브 구역 내 레드리버 근처 거리엔 연탄 작업장이 아주 많았고, 그런 거리를 지나친다면 석탄재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레드리버 북쪽 기슭에 자리한 석탄 공장, 퍼스트 시티 서쪽 교외의 공장 구역 환경도 이와 비슷했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
장목화가 말했다.
그러자 게네바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도 확률이 가장 높은 건 레드리버 쪽이야. 진짜 신부는 최근에 레드리버 북쪽 기슭의 어느 연탄 공장을 지나친 거지.
그린올리브 구역에서 석탄재를 밟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거긴 유적 사냥꾼을 겸하는 하류층 주민이 아주 많지. 수시로 북쪽 기슭 불모지로 나가니까 저도 모르는 새에 신발에 흙이 묻었을 수도 있고. 아이언메달 스트리트랑 항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연탄 작업장도 마찬가지였다.
“네 말은 진짜 신부가 우리를 감시할 때 밟은 거라는 거야?”
장목화는 어렵지 않게 게네바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게네바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성건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뭔데?”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의 소유자에게 또 다른 영감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성건우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신부가 북쪽 기슭 불모지 한 연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인 거죠.”
한동안 말을 잃은 장목화가 실소를 터뜨렸다.
“⋯⋯진짜 신부 같은 준 고위급 구성원도 노동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포기한 신도들을 부양해야 할 정도로 반 지성교가 발전했다는 소리야?”
“힘겨운 노동 때문에 진짜 신부의 몸이 안 좋아진 걸지도 모르죠.”
한 발 더 앞서 나가는 그 때문에, 장목화는 절로 또 그런 광경을 상상하다가 애써 웃음을 억눌렀다. 그 기묘하고 위험해 보이는 진짜 신부가 한순간 장목화의 상상 속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시민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