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52화 (352/649)

352화. 반성

백새벽도 성건우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서서히 원래의 표정을 회복한 뒤, 여전히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 기억 속에 특정한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서 곡해된 것 같아.”

“너도, 여홍이도 그 사실을 감지하지는 못한 거지?”

장목화가 진지하게 물었다.

백새벽은 다시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여기서 팀장님 조를 기다리는 동안 차 여러 대가 수시로 이 앞을 지나갔어요. 그러다 숲 맞은편에서 사냥꾼 하나가 토끼를 쫓아 이 부근으로 오더라고요. 저희랑 무슨 얘기를 한 건 아니고, 가까이 접근하지도 않았어요.

저희랑 거리가 한 10미터? 그보다 더 멀었을지도 모르고요. 일단 저도, 여홍도 그를 경계했었어요. 눈이 마주쳤는지까진 기억이 안 나지만⋯⋯.”

장목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생김새는 기억나?”

이번엔 용여홍도 백새벽과 함께 10여 초 정도 깊이 고민해 보았다.

“기억이 안 나요.”

“생김새가 아주 흐릿했어요.”

답하는 두 사람 모두, 정도는 다를지라도 공황에 빠진 상태였다.

이내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보아하니 확실히 진짜 신부가 나선 모양이네. 만약 그가 위드 시티에 있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면, 그 정도 거리에서도 충분히 최면 능력이나 기억 곡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거야. 특히 기억 곡해 능력은 정확한 작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잘 모르고.”

위드 시티에서 허양원을 처리하려 할 때, 진짜 신부는 최면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사실을 드러냈었다. 기계 승려 정념이 분석하기로 대략 4~6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장목화는 다시금 깊은 고민에 잠긴 채 추측을 덧붙였다.

“내가 생각하기엔 최면일 가능성이 커. 기억 곡해는 더 강력하긴 한데 그것도 제한이 크니까 이렇게 간단하게 발휘할 수는 없었을 거야. 일단 너희가 기억하는 거리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용여홍이 매우 다행스러운 얼굴을 했다.

“미리 준비해둬서 다행이네요. 안 그랬으면 정말로 골치 아파졌을 텐데.”

그러자 성건우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쉿, 진짜 신부가 아직 이 근처에 있을지 몰라.”

기겁하는 용여홍을 보고, 장목화도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야! 작은 빨강이 좀 놀리지 말라니까! 진짜 그러다 언젠가 네 뒤에서 총 쏠지도 모른다? 봐봐! 네가 옛날에 저질렀던 일들도 그렇게 이용됐잖아!”

성건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진짜 신부는 저희를 정말로 증오하는 것 같네요.”

“그냥 겸사겸사한 짓일 수도 있지.”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아니야.”

게네바가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목화 역시도 그럴 가능성은 부인했다.

“그자는 분명히 우리를 노리고 있어. 내가 생각하기에 아이언메달 스트리트 부근에 나타나서 몰래 우리를 관찰했을 것 같아. 그래서 우리가 나눠서 장원으로 가고, 남아서 지원을 맡았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한 순서에 맞춰 행동했을 리가 없지.

일단 너희한테 최면을 걸 기회를 찾아 특정 기억을 곡해했지? 그리고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제일 뛰어난 능력으로 공격했고.

잘 먹혀 들었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거나 종이 됐을지도 몰라. 겐이 있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그도 우리에 대한 습격이 반드시 성공할 거라 확신하진 못했어. 그러니까 미리 너희한테 최면을 걸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둔 거지.

생각해봐. 만약 우리가 그 습격을 아무 일 없이 잘 넘겼다고 방심하면서 너희랑 합류했다면, 나랑 건우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나 행동에 너희는 뭔가 홀린 것처럼 살의가 일어나지 않았겠어? 원래 나 자신을 제외하면 가장 방어하기 어려운 상대가 바로 같은 식구, 동료야.”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진짜 신부 같은 적과 대적할 땐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고 달려들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언제 상대와 스치듯 지나칠지 모른다는 걸 경계해야겠네요.”

“만약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고 달려들려고 한다면 난 그 자식을 다섯 번 정도는 때려눕힐 거야!”

성건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감지 범위에는 잡히지 않지만, 아직 주위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진짜 신부를 자극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뒤이어 그는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 크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겐이라면 오십 번은 더 때려눕힐 수 있을 테고.”

로봇은 최면이나 기억 곡해에 완벽하게 면역이 되어있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신부는 우리가 위드 시티에서 그의 일을 망쳤다는 걸 대략은 알고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 우리가 조씨 가문 장원 사건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런 덫을 놓아둔 거지.”

“맞아요.”

용여홍은 아직도 두려움을 떨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솔직히 위드 시티, 레드스톤 마켓, 타르난까지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자신감이 생겼다. 거기다 외골격 장치도 얻고, 게네바라는 너무도 든든한 동료를 만난 뒤 자신의 팀을 향한 넘치는 자부심이 쌓여있었다.

동료들과 함께라면 애쉬랜드 그 어디로 간다고 한들 두렵지 않았다. 정규군이나 각 대형 교파의 핵심 역량만 건들지 않으면, 강도단이나 암흑가 조직 따위는 그다지 큰 위협도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구조팀은 방금 진짜 신부 한 사람 때문에 거의 전멸할 뻔했었다.

“이대로 넘어갈 순 없죠.”

성건우는 낙담하는 대신 결의를 밝혔다.

“그래.”

짧게 답한 장목화가 잠시 고민 끝에 용여홍과 백새벽에게 말했다.

“지금도 감정에 무슨 문제가 있어? 겁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우리한테 숙명주라는 든든한 구석도 있잖아. 건우한테 얼마든 너희 심령 세계를 대청소해달라고 하면 되니까.”

“그럼, 그럼.”

성건우가 눈을 번득이며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용여홍은 약간 당황한 채 황급히 자료를 살피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몇 분 뒤, 그가 시원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의 문제는 없어요.”

백새벽도 살펴본 결과를 밝혔다.

“진실 여부를 알게 된 이후엔 최면 효과는 완전히 제거됐어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퍼스트 시티를 떠나기 전에도 기억이랑 꼭 비교해보자. 우리도 모르는 새 진짜 신부 손에 쥐어진 칼이 되는 일은 막아야지. 하하, 우리는 진짜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하네.”

그리고 그녀가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겐, 넌 여기 작은 흰둥이, 빨강이랑 남아서 차를 보고 있어 줘. 나는 얘랑 숲 안쪽 한번 돌아보고 올게.”

“숲에서 뭘 하시게요?”

용여홍이 물었다.

장목화는 여전히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했다.

“단서를 찾아야지. 진짜 신부 같은 사람은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을걸. 다른 사람이 자기 얼굴을 기억 못 하도록 하는 능력이 있으니, 일반 영역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도 않겠지.

어디라도 지나친 곳에는 흔적이 남기 마련이잖아? 이 숲을 관통했다면 발자국 같은 단서라도 남아있겠지. 자기 자신이 일반인을 능가한다고 생각하는 각성자일수록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영역은 무시하기 쉬워져. 그들도 일부분에서만 강하지, 전반적으로 강한 건 아닌데도 말이야.”

장목화가 자못 엄숙하게 말을 마쳤다.

약간 표정이 멍해졌던 용여홍은 깊은 반성을 했다. 조금 전 한시라도 빨리 여길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후회가 되었다.

“팀장님, 진짜 멋져요!”

갑작스러운 성건우의 칭찬에 장목화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성건우가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작은 빨강이 대신 한 말이에요.”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려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건 또 분명한 사실이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피식 웃던 장목화가 살짝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야, 얼른 가자. 이제 우린 교대로 사방을 경계하면서 진짜 신부의 반격에 대비해야지. 잘못을 만회하려고 할 거 아냐.”

“그 사람은 만회 같은 말은 잘 모를 텐데요.”

성건우는 진지하게 대꾸하면서도 얌전히 장목화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교외 숲은 가지와 잎사귀가 마구 뒤얽혀 있었다. 햇볕도 그 틈으로 겨우 스밀 뿐이라 전체적으로 매우 어둑하고 고요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곧장 숲 안으로 돌진하진 않았다. 대신 백새벽과 용여홍이 차를 숨겨둔 곳으로 가, 그곳을 중심으로 주위를 조금씩 탐색했다.

둘은 내내 손전등을 켠 채 가지를 꺾고 덤불을 헤치며 흔적을 찾았다.

장목화는 비교적 여유로운 듯, 진지하게 수색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수시로 숲에서 사냥하는 이들은 지금 우리처럼 가느다랗고 긴 나무 막대기나 나뭇가지로 앞쪽 덤불과 관목숲을 때려. 혹시 숨어있을지 모를 독사나 벌레를 쫓아내려고. 자칫 잘못하다간 물릴 수도 있잖아.”

역시 진지하게 주변을 감시하던 성건우가 아깝다는 듯 말했다.

“왜 쫓아내지? 놀라 튀어나오면 붙잡아 식량으로 쓸 수도 있는데.”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 인간은 극도로 굶주리면 뭐든 하지. 도구도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능도 있고. 나도 줄곧 그렇게 말했었어. 괴물로 변이된 소수의 종족을 제외하면 애쉬랜드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고등 무심자도 인간에 속하잖아.”

그러다 돌연 쪼그려 앉은 그녀가 손전등 불빛으로 앞의 땅을 비췄다.

“역시 족적이 있네. 조심해, 다른 흔적을 파괴하면 안 되니까. 주위 경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침착한 팀장의 목소리를 따라, 성건우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왔다.

장목화는 잠시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작은 흰둥이랑은 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야. 역시 흰둥이랑 빨강이는 관련 기억이 곡해됐거나 흐려진 게 맞아.

그렇게 보면 진짜 신부의 능력은 위드 시티에 있었을 때보다 그렇게 강해진 건 아니야. 심령의 복도에 진입해도 질적인 변화를 거치진 못한 거야.

휴, 흰둥이랑 빨강이한테 누군가 반경 10미터 범위로 진입하면 곧장 총을 뽑으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나도 진짜 신부가 이렇게까지 우리를 노릴 줄은, 우리를 잡겠다고 직접 나서서 함정을 팔 줄은 몰랐어.”

천천히 장목화 곁에 쪼그려 앉은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엔 팀장님이 작은 흰둥이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요.”

장목화가 그를 한번 훑으며 대꾸했다.

“그럼, 작은 흰둥이는 진짜 신부가 최면이나 기억 곡해 능력을 발휘할 때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걸 아니까, 누군가 반경 10미터로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라는 거야? 그러면 작은 흰둥이가 총을 뽑아 들지 않은 건 이미 다른 영향을 받은 상태라는 말인가?”

순간 장목화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애들이 본, 토끼를 쫓던 진짜 신부는 우리가 경험했던 거랑 같은 환각이었어. 진짜 신부는 그사이 몰래 애들 옆에 접근해 있다가 환각이 끝나자마자 최면 능력을 발휘한 거였어. 그래, 허양원도 그렇게 최면에 걸렸었잖아.

새벽이랑 여홍이는 환각이랑 현실의 간극이 지나치게 좁았던 데다 최면 능력에 영향을 받아 상대의 생김새에 대한 기억을 잃었어. 그래서 토끼를 쫓던 사냥꾼이랑 최면을 엮게 된 거야.

어쩐지 새벽이가 사냥꾼과의 거리가 10마터 이상이었다고 말한 데엔 이유가 있었어. 새벽이는 사냥꾼이 거기서 조금만 더 가까이 왔으면 곧장 총을 뽑아서 경고했을 거야. 상대에 대한 인상이 흐릿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진짜 신부는 정말이지 너무 교활한 놈이야. 차라리 이젠 나한테도 그런 수작을 부려줬으면 좋겠어!”

장목화가 이를 악물었다. 진짜 신부는 그런 환각에서 인간 의식을 숨길 수 있거나 다른 방법으로 현장에 있는 각성자를 속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당시 정념 선사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장목화는 자신의 생물 전기 신호 감지 능력을 믿었다. 진짜 신부는 과학적인 연구를 한다거나 최신 기술을 좇을 리도 없으니, 본인의 생물 전기 신호까지 숨기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니 정말로 그런 때가 온다면 장목화는 예샷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알려주며 확실한 충격을 선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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