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우연한 만남
따르릉!
역시 장목화의 예상대로 14번 기기 옆에 설치된 전화기가 울렸다.
장목화는 바로 수화기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리만?”
그녀는 애쉬랜드어를 사용했다.
전화 건너편에서도 어색한 애쉬랜드어가 돌아왔다.
- 응, 거래에 필요한 물자는 다 모았어?
“아직. 이제 막 퍼스트 시티에 도착해서. 2주만 더 줘.”
장목화가 솔직하게 답했다.
- 좋아.
리만도 거절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다시 성건우를 힐긋 보며 물었다.
“다시 레드스톤 마켓에 갈 생각이야?”
리만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 아니, 나한텐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서. 앞으론 조수만 보내려고.
“우리, 거기 한 번 더 갔었어. 그리고 라르스도 만났어.”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또렷해진 숨소리만 들려왔다.
그러자 장목화가 먼저 말을 이었다.
“라르스는 널 배신한 게 아니었어. 강력한 각성자인 디마르코가 자기 능력을 이용해 라르스를 통제한 거야.”
- 정말? 지금은 어떤데?
리만이 다급히 물었다. 어느새 그가 쓰는 언어는 레드리버어로 바뀌어 있었다.
장목화는 한숨으로 포석을 깔았다.
“안타깝지만……. 지하 방주 주민들이 디마르코의 폭정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희생됐어.”
다시 리만의 침묵이 시작됐다.
“대신에 우리가 경계 교회당 뒤쪽 공원묘지에 잘 묻어주고, 비석도 하나 세워뒀어.”
장목화가 혼잣말을 하듯 말을 맺었다.
리만의 목소리는 그로부터 수십 초가 더 지난 후에야 들려왔다.
- 고맙다. 나한텐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소식이야.
전보다 훨씬 더 먹먹해진 목소리였다.
장목화도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그 사이 리만이 황급히 덧붙였다.
- 하지만 앞으로 거래에서 너희들한테 해줄 수 있는 할인은 최대 30퍼센트까지야. 나한테 딸린 입이 아직도 많아서.
“⋯⋯.”
장목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내려놓은 장목화는 한숨과 함께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정오가 다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곤 재차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게임 한 판도 못 했는데 왜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지? 겐이 로비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가자.”
구조팀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전의 그 종업원이 웃으며 달려왔다.
“가시려고요?”
장목화는 헤드폰을 벗다가, 컴퓨터에서 소형 스피커 메모리를 뽑는 성건우를 한번 쳐다보곤 종업원에게 물었다.
“네. 총 얼마죠?”
사실 금액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예의상 하는 질문이었다.
종업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따로 지불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인리히 선생이 치르실 예정이거든요.”
장목화는 흠칫했다.
‘그 짠돌이가? 리만이 이렇게 관대했어? 재주만 좋은 줄 알았더니, 인간관계도 잘 맺네. 어느 정도 정이 쌓이면 돈이든 뭐든 아끼지 않나 봐.’
그렇다면 굳이 구조팀 돈으로 비용을 치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인 뒤 팀원들을 데리고 PC방 밖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대문 밖으로 나서던 그때, 장목화가 갑자기 굳어선 천천히 PC방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백새벽이 가장 먼저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장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이야기했다.
“퍼스트 시티에 있는 리만의 연줄이 누구일지 생각해봤어.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는 격투 관람을 굉장히 좋아한댔잖아? 근데 그 사람은 언제나 귀족석에 앉아있을 텐데, 우린 그 표를 구할 수가 없어. 추리 광대 능력을 쓴다고 해도 암암리에 마커스를 지켜보고 있을 보호자한테 발각당할 거야. 하지만 리만을 통한다면? 그 좌석표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백새벽은 그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거래할 때 한 번 물어보죠.”
용여홍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망설이며 물었다.
“근데 이 일 때문에 리만이 저희 일에 연루되거나 하지는 않을까요?”
짝! 짝! 짝!
성건우의 과장된 칭찬에 용여홍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고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두 가지만 지키면 문제는 없을 거야. 첫째는 리만이 퍼스트 시티를 완전히 떠나 연합 공업에 돌아간 후에야 귀족석 표를 사용하는 거, 둘째론 그 자리에서 마커스를 만나더라도 급하게 친분을 쌓지 말고 자연스러운 기회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또 한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리만이 저희한테 귀족석 표를 구해주고도 한동안 퍼스트 시티에 남아있으면요? 격투장 표엔 기한이 있을 거잖아요.”
장목화가 다시 또 웃었다.
“리만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떠나야 해.”
“제가 겁을 줄게요!”
성건우가 매우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때, 백새벽이 빌딩 로비 라운지를 보며 이야기했다.
“이건 리만이 정말로 귀족석 표를 구해줄 수 있을지부터 확인한 후에 다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장목화는 짧은 탄성을 뱉었다.
“아, 그러네.”
* * *
로비에 들어선 네 사람은 긴 소파에 앉아 몇몇 사람들과 이야기 중인 검푸른 군복 차림의 게네바를 보았다.
“가자.”
성건우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게네바는 나이가 그다지 많지는 않아 보이는 그 사람들과 작별한 뒤 구조팀 곁으로 돌아왔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장목화가 물었다.
게네바의 중저음 합성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혼자 있는 걸 보고 다가와서는 주인을 잃어버렸냐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가 옆 PC방에 있다고 했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거야. 남쪽에서 왔다고 했더니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기에⋯⋯.”
“겐, 너 하마터면 납치당할 뻔했어!”
순간 성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게네바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친절해 보이던데? 뭔가로 유혹하려는 듯한 기색도 없었어.”
“알아차릴 수 있는 거라면 유혹이라고 할 수 없지.”
성건우는 그런 그를 매우 안타까워했다.
“됐어, 됐어. 이만 돌아가자.”
다시 또 장목화가 나서서 탄소기반인과 지능인의 논쟁을 무마시켰다.
* * *
지프가 천천히 나아가던 그때, 장목화가 룸미러를 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아이언메달 스트리트에 있는 숙소로 가자. 조씨 가문 장원 체포 작전을 준비해야 하니까.”
“어떤 준비를 하려고요?”
용여홍이 바짝 정신을 차리고 집중했다.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중점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건 두 가지야. 첫째, 본인 중요 기억을 백업해 두 개로 복사해두기. 하나는 종이에 써서 지원 담당할 멤버한테 맡기고, 또 하나는 컴퓨터에 기록해 겐한테 저장해두는 거야.
그리고 작전을 마친 뒤에 다시 그 기억들을 되찾아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지워졌거나 곡해된 기억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지. 둘째는 각종 뜻밖의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토론해봐야겠지?”
골똘히 듣던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네요.”
성건우는 돌연 게네바를 쳐다보았다.
“몰래 훔쳐볼 거야?”
“내 인격을 모욕하지 마라.”
게네바가 믿음직스럽게 대꾸했다.
뒤이어 성건우는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너는?”
“안 봐, 안 봐! 보여준다고 해도 안 봐! 네 정신에 오염될까 무서워서!”
용여홍이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이렇게 오후의 일정을 정한 장목화는 조수석 문에 오른손을 얹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일은 애쉬랜드어 입문용 교재를 만들자.”
“아이고…….”
대뜸 탄식하는 성건우를 보고, 용여홍이 한껏 경계했다.
“왜. 왜 그래, 또?”
성건우는 너무도 안타까운 얼굴로 답했다.
“PC방에 1시간만 더 있었으면 서비스 특제 덮밥을 받을 수 있었는데.”
“맞아!”
그제야 그 사실이 떠오른 용여홍도 돈 벌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워졌다.
장목화 역시도 퍽 안타까워했다.
“특제 덮밥 맛이 어떠려나⋯⋯.”
그건 반고 바이오에선 조리법이 없어 접할 수도 없는 음식이었다.
짝!
장목화는 바로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결정했어. 점심은 레드울프 구역 덮밥집에서 먹자. PC방에서는 뭐, 리만의 대접을 사양한 셈 치지, 뭐.”
* * *
배불리 점심을 먹고, 구조팀은 곧장 아이언메달 스트리트로 돌아갔다.
지프는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안 보이는 곳에 경보기까지 설치한 뒤, 다섯 모두 산책하듯 좁은 길을 걸어 숙소로 향했다.
느직느직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얼룩덜룩한 가죽옷을 입은 남자는 키는 용여홍과 거의 비슷했고, 머리는 갈색, 눈동자는 녹색, 목에는 입술까지 가린 낡은 회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상대와 어깨를 스치듯 지나친 후, 백새벽이 앞을 보며 이야기했다.
“저 사람, 치안관들이 찾던 그 사람 같은데⋯⋯.”
차림새는 달라도 그 외의 특징은 모두 부합했다.
장목화 역시 백새벽이 전에 말했던 설명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가서 인사라도 해볼까요?”
성건우가 나섰다.
하지만 장목화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됐어, 우리가 퍼스트 시티 치안관도 아니잖아. 저 사람이 집회에서 있었던 폭발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주제넘게 나설 이유는 없어.”
용여홍이 깜짝 놀랐다.
“네? 저 남자가 집회에서 있었던 폭발 사건과 연관돼 있다고요?”
‘팀장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단순한 예를 든 건가?’
장목화는 빙그레 웃으며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너희가 구세계 콘텐츠에 푹 빠져있을 때, 난 퍼스트 시티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누군가 이번 폭발 사건 용의자가 스카프를 두른 남자라고 이야기한 걸 봤어.”
성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팀장님은 PC방에서 다른⋯⋯.”
“그만! 아무튼 그 일은 우리랑 아무 관계도 없어. 무엇보다 퍼스트 시티가 혼란스러워질수록 우리 후속 조사도 더 유리해질 거야.”
장목화의 말이 끝나고, 고개를 끄덕이던 용여홍이 다시 또 질문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스카프를 두르고 있을까요? 그것도 입까지. 옷도 갈아입었는데 그건 그대로예요.”
“입에 알아보기 쉬운 특징이 있나 보지.”
백새벽이 추측했다.
이어, 장목화도 덧붙였다.
“음, 단순한 특징이 아닐 거야. 근처를 지나던 행인이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뭔가가 있는 거지. 예를 들면 죄지은 사람한테 새겨진 문신이라든가, 노예 표식이라든가, 일종의 변이 같은 거.”
그 순간, 용여홍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한 단어가 있었다.
아류인!
* * *
어느새 조씨 가문 장원의 반 지성교 구성원 체포 예정일이 되었다.
구조팀은 재차 조를 나눠 움직이기로 했다.
이번엔 장목화, 성건우, 게네바 그리고 용여홍과 백새벽으로 나눴다.
성건우와 검은 망토를 두른 게네바가 먼저 지프에 오르고, 장목화는 지프 운전석 문을 열며 용여홍,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거기로 가서 기다리고 있어.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다가 신호가 보이면 곧장 지원하는 거야.”
“네.”
용여홍, 백새벽은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를 실은 회색 SUV로 향했다.
곧이어 운전석에 올라탄 장목화가 룸미러를 조정한 뒤에 말했다.
“우리는 포카스 장군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쪽 호위대와 합류할 거야.”
성건우는 살짝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호응했다.
“그쪽에서 잘 준비해둔 상태였으면 좋겠네요.”
‘잘 준비해둔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누가 누굴 지적하는 거냐.’
장목화는 그대로 시동을 걸고 앞으로 차를 몰았다.
막 아침 8시 30분이 된 이때, 거리의 행인은 매우 드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