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고급스러운 장소
기원의 바다, 황금빛 엘리베이터가 자리한 섬.
성건우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가부좌를 튼, 회색 제복 차림의 자기 자신 앞에 섰다. 잠시 그를 보며 가련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성건우는 천천히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우리는 원래 분리될 수가 없는 하나야. 모두한텐 갈등을 겪을 때가, 고민에 빠질 때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고 극단적으로 나가면 안 돼.”
성건우는 아주 진지했고, 엘리베이터 앞에 앉은 성건우 역시 얌전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성건우가 씩 웃으며 회심의 한마디를 날린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돌연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웃었다.
“뭐라고? 안 들려. 추리 광대 영향을 받을까 봐 귀를 막아둬서.”
살짝 미간을 구긴 진짜 성건우 역시 귀를 후비적거리다 한숨을 쉬었다.
“우린 정말 닮았구나. 선택도 똑같이 하고. 나는 너를 받아들이고 싶어. 내가 직접 세운 병원이 있거든? 거기서 가장 좋은 치료를 받게 해주고 싶어.”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는 문득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심령의 복도로 나아갈 유일한 방법이야. 동료를 잃는 게 두렵다면, 일단 동료를 잃을 기회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두려움을 이겨낼 계기를 찾아내야 해.”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물었다.
“우리 아홉은 이렇게나 잘 지내는데 넌 왜 어울리지 못하는 건데? 대체 뭐가 문제야? 같이 얘기해 보자. 그럼 뭔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빙그레 웃었다.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면 넌 질적인 변화를 통해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생길 거야. 스스로 동료를 잃을 기회를 만들어낸다면, 그 상황을 어느 정도 직접 통제하고 보완할 수 있어. 그렇지만 수동적으로 그런 기회가 오기만 기다린다면 결국 동료들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어.”
성건우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리 새해 인사나 할게.”
두 성건우는 각자 귀를 막고 동문서답에 가까운 대화만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암암리에 억지쟁이 능력으로 상대가 귀마개를 빼고 자신의 말을 듣도록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동시에 일어나 각자 귀마개를 빼서 상대에게 던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건우와 성건우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
* * *
기원의 바다에서 벗어난 성건우는 일단 잠을 좀 보충했다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어땠어? 기원의 바다에 들어간 것 같던데.”
가장 먼저 용여홍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대결 결과도 늘 똑같고.”
그때, 1층에서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면 모든 걸 나한테 맡기는 건 어때? 건우 넌 내가 세운 계획에만 따라서 행동하는 거야.”
성건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아는 건 그 성건우도 알아요.”
장목화가 쓴웃음을 흘렸다.
“정말 골치 아프네. 정말 대적하기 제일 어려운 게 자기 자신이구나.”
“일단은 조금 더 관찰해봐야겠어요.”
그래도 성건우는 낙담하지 않았다.
이때, 분석을 마친 게네바가 결과에 근거해 본인 생각을 밝혔다.
“이건 인격 분열 증상이야. 상응하는 약물이랑 보조 치료를 통해 직접적으로 너랑 너의 융합을 시도해보는 건 어때?”
다들 놀란 표정이었다. 게네바의 이론은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이는 의학적인 각도에서 비롯된 방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과학적인 방법이라, 비과학적인 심령 세계와 의식 공간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다는 사실이었다.
몇 초간 침묵이 이어질 무렵, 장목화가 웃으며 정적을 깼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네. 적어도 이론적으론 가능성 있어 보여.”
“근데 그랬다가 여덟 명의 성건우도 사라질까 봐 걱정이네요.”
성건우는 동료를 잃을 순 없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 급하게 굴 것 없어. 넌 지금 각성자들 평균보다 훨씬 빠르게 심령 세계 속의 너 자신을 만난 거잖아. 이제 나가자. 뭐라도 좀 먹어야지.”
장목화는 기지개를 켠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저녁 무렵, 구조팀은 관례대로 무선 통신기를 켰다. 회사에서 새로운 지령을 내렸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8시 6분쯤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연합 공업 무기 상인, 리만이 보낸 전보였다. 그는 이미 퍼스트 시티에 도착했다고 했다.
장목화는 간단한 답을 보냈다.
「장소를 정해서 만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리만이 답장을 보내왔다.
「내일 오전 10시, 레드울프 구역 스톤 스트리트 99호, 구세계 PC방. 하인리히 선생이 예약한 14번 기기.」
* * *
구세계가 남긴 레드울프 구역 스톤 스트리트 99호는 족히 4, 50층은 될 법한 대형 빌딩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빌딩은 새것처럼 빛이 났다. 햇살을 반사하는 깨끗한 유리 벽도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늪 1호 폐허로 돌아온 것 같네.”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그건 과거 인류가 살았던 한 시대의 재현이었다.
장목화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레드울프 구역의 몇몇 거리가 구세계랑 가장 닮은 곳이지.”
대화를 나누며 구조팀은 이 빌딩 1층에 자리한 구시대 PC방으로 향했다.
PC방 문 앞엔 권총과 짧은 몽둥이를 쥔 보안요원 네 명이 있었다. 그들은 구조팀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 멈춰 세웠다.
“고객의 안전을 위해 로봇은 진입이 불가합니다.”
한 보안요원이 말했다.
“저희 가게 손님 대부분은 신분이 높은 분들이라, 당신들 안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또 다른 보안요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알겠어요.”
장목화도 고집을 부리는 대신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로비 라운지에서 기다려줘.”
그녀가 순순히 따른 건 원래 로봇은 타인을 만날 때나 특정 장소에 진입할 때 저지당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었다. 전에 테렌스를 만나러 갈 때 게네바를 백새벽, 용여홍 조에 배치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이건 로봇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로봇이 가진 힘으로 보면 사실상 중무기로 봐도 무방했기에, 보통 사람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래서 게네바와 함께 있으면 조금 더 존중받는 경우가 많긴 했다.
어쨌든 구조팀도 게네바를 위해 괜한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 했다.
게네바 역시 몇 초간 침묵하다 대답했다.
“알겠다.”
이내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은 문으로 향했다.
대문은 손님의 접근을 감지한 듯 알아서 스르륵 열렸다.
* * *
문 안쪽엔 흰색 셔츠에 붉은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손을 가슴팍에 얹은 채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 뒤 친절하게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첫 방문이십니까?”
“예, 하인리히 선생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장목화는 대답과 동시에 PC방 입구 쪽을 둘러보았다. 과감하게 금색을 사용한 데다, 석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은 듯 곳곳에 조각상이 놓여있었다. 꼭 소문으로만 듣던 고급스러운 장소 같았다.
곧이어 남자가 손바닥만 한 전자제품 하나를 꺼내 몇 번 빠르게 두드리다가 여전히 그 친절한 미소로 안내했다.
“하인리히 선생으로 예약된 자리가 있네요. 14번 기기입니다. 하지만 한 대만 예약하셨네요.”
“네, 이 친구들은 주위에 배정해주세요.”
장목화가 간단히 대꾸했다.
“각 기기당 사용료는 1시간에 1오레이입니다.”
남자가 웃으며 답했다.
‘뭐라고? 그냥 대놓고 주머니를 털어가지? 너무 비싼 거 아냐?’
용여홍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힘겹게 삼켰다. 여관이 하룻밤에 1오레이를 달라하는데, 고작 기기 사용에 이 정도 돈을 내야 하다니.
장목화는 행여 성건우가 뭐라고 할까 얼른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근데 저희가 위드 시티에서 와서 그런데, 이 PC방은 거기 PC방과 다른 모양이네요?”
남자가 허리를 살짝 굽히며 따라오라는 눈짓을 한 뒤, 웃으며 설명했다.
“네,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곳의 기기는 전부 폐허에서 찾아내 수리한 거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고장이 나는데 저희 가게에 있는 건 전부 머신 헤븐산 컴퓨터입니다. 아주 안정적이고, 빠르고, 원활하게 작동하죠. 여러분도 최고의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 다른 곳은 랜만 깔린 데다 지원하는 게임이랑 구세계 콘텐츠도 상당히 제한돼있죠. 기껏해야 시뮬레이션으로 사격 훈련하는 정도가 다인데, 저희 기기는 퍼스트 시티의 자체적인 인터넷이랑 연결돼 있어요.
구세계 콘텐츠도 많고, 각종 유용한 프로그램도 깔려 있어서 그 어느 곳보다 즐거운 체험을 하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는 귀족들과 중상층 시민들이 즐기고, 누리고, 모임도 가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귀족 자제분들께서도 집에 있는 컴퓨터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종종 저희 가게를 찾아오신답니다.”
‘구시대 자료에 언급돼 있던 고급 장소들이랑 비슷한데? 근데 그런 장소가 PC방이라니 조금 웃기네⋯⋯.’
장목화는 그저 웃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그녀가 반고 바이오 관리층 출신이 아니라 수시로 컴퓨터를 접하고 각종 구세계 자료를 접하지 못했더라면, 또 타르난에서 다른 무엇보다 전자제품이 가장 가치 없는 취급을 받는 것과 원래 PC방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알지 못했더라면, 그녀도 진심으로 놀랐었을 것 같았다.
“기다릴 수가 없네요.”
성건우가 말했다. 구세계 콘텐츠가 많다는 것에 호기심이 동한 듯했다.
종업원은 구조팀원들을 PC방 깊은 곳으로 안내하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자리로 갈수록 그는 목소리를 점점 낮추고 있었다.
“음악을 듣고 싶으시다면 헤드폰을 꼭 착용해주세요. 저희 가게의 손님들은 다 신분이 높으신 분들이라 상당히 까다로우시거든요.
또 와인이나 콜라, 초콜릿, 커피, 차 등등 보기 드문 음료를 마실 수도 있어요. 식사 시간까지 머물 생각이시면, 거기다 3시간 이상 이용하신다면 모든 손님에게 특제 덮밥을 한 그릇씩 서비스로 드립니다.
덮밥 메뉴는 매일 달라지는데 그중엔 현지 취향의 토마토 덮밥, 버섯 닭고기덮밥, 임해 연맹에서 온 해산물 덮밥도 있어요. 위층에는 지친 손님들을 위한 무료 목욕탕과 휴게실도 있습니다.”
성건우는 감추려는 기색도 없이 대놓고 군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장목화는 PC방을 한번 다 훑어본 상태였다. 각 기기는 일정하게 떨어져 있었고 특히 식물이 많이 놓인 이곳은 주위가 굉장히 고요했다.
곧이어 구조팀은 14번 기기 부근에 이르렀다. 여기는 다른 자리와 다르게 기기 옆에 전화기가 한 대 놓여있었다.
“통화해야 하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겁니다. 카운터랑 다른 기기들 일부에도 전화기가 설치돼 있어요.”
종업원은 14번에서 17번까지의 기기를 차례대로 켜주었다.
장목화는 제일 먼저 14번 자리에 앉았다. 성건우는 바로 15번에, 백새벽과 용여홍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종업원이 떠난 뒤, 장목화는 빠르게 마우스를 움직여보다가 피식 웃었다.
“보니까 퍼스트 시티는 네트워크 범위가 좁네. 사람도 얼마 없고. 재미있고 가치 있는 내용은 하나도 없겠어.”
PC방 손님들은 구세계 드라마나 소설을 보거나 인터넷 게임 중이었다.
그에 반해 구조팀 네 사람은 그저 침착하게 10분 정도 가만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