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계획
용여홍은 좀 멍한 얼굴이었다. 레드리버어도 모르는 노예 출신 여자들이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계획을 세웠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분석도 엄청나게 상세하고 꼼꼼했다.
그 눈빛 변화를 눈치챘는지 소나영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다 지난 이틀 내내 이 번역기로 종들이랑 이야기도 나누고 질문도 많이 했어. 저 사람들, 아는 게 꽤 많아.”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잘했어.”
뒤이어 그녀는 쌀가게를 여는 방법이라든가, 어느 정도 자금이 축적되면 항구 상인들과 합작하는 방법 등 몇 가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체력 단련이랑 사격 훈련도 꼭 잊으면 안 돼.”
“응!”
여자들 모두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맑은 눈을 반짝였다.
* * *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이제 늑대소굴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용여홍은 거리에서 여자들이 있는 7, 8층을 한번 돌아보았다.
“활력이 넘치네. 장단점도, 뭘 할지 말지도 잘 연구하고, 잘 파악했고.”
감탄하는 용여홍을 두고, 백새벽은 멀지 않은 곳에 댄 지프를 바라봤다.
“뭐든 처음 시작할 땐 행복한 기대를 하게 되잖아. 앞으로 여러 차례 좌절을 경험하더라도 오늘 이 마음을 잊지 않길 바랄 뿐이야.”
사실 이 애쉬랜드에서 초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매우 적었다. 이를 알기에 용여홍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그때, 게네바가 정적을 깼다.
“그래도 타르난엔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데.”
“그야 로봇 경비대가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백새벽은 살짝 웃으며 용여홍을 훑어보았다. 실제로 당시 용여홍은 현지인들 때문에 덤터기를 쓸 뻔했던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지프 옆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거리 모퉁이에서 권총을 든 남회색 제복 치안요원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중 팀을 이끌던 키 작고 뚱뚱한 남자가 세 사람을 발견하고 멈췄다.
“저기, 혹시 얇은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람 본 적 있나? 머리는 갈색, 눈동자는 초록색이고 너처럼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그걸로 입까지 다 가렸지.”
그가 백새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백새벽은 목에 두른 얇은 스카프를 살짝 잡아당기며 솔직하게 답했다.
“못 봤어. 우리도 이제 막 건물에서 나왔어.”
남자는 그대로 부하들과 함께 앞으로 달려갔다.
멀어지는 치안요원들을 보며, 용여홍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아마도.”
백새벽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 * *
골든애플 구역 시티즌 스트리트 18호, 포카스 장군 저택.
회색 SUV를 탄 장목화, 성건우 조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 벌써 세 차례나 임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군용 외골격 장치와 중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냥 제 분수를 아는 유적 사냥꾼으로 본 것 같았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문 앞의 경비병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포카스는 퍼스트 시티에서 가장 경험 많고 인기도 많은 장군이었다.
오레이가 세상을 떠나며 퍼스트 시티에 분열이 일어났을 당시, 굳건하게 원로원 편에서 군대를 지휘해 반란을 진압한 장군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무심자와 변이 생물, 다른 세력을 소탕하고, 여러 거점도 개척했다.
그 유능한 장군도 현재는 전성기를 지나도 훨씬 지난 50대 장년이 됐다. 사실 애쉬랜드에선 황혼이라 보는 나이라, 그는 군 지휘관 자리에서도 물러나 지금은 도시 방위군 일부만 담당했다. 물론 원로원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곧이어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장군과 약속했습니다. 책들에 관한 합작을 논하기 위해서요.”
상황을 전달하고 들여보내라는 명을 받은 경비병은 바로 길을 비켜주었다.
* * *
성건우와 장목화는 집사의 안내에 따라 포카스의 서재로 향했다.
포카스 집 내부는 상당히 호화스러웠다. 대리석 바닥, 계단 난간 등엔 각기 다른 조각상, 벽에는 정교한 그림……. 그야말로 호화의 극치였다.
서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이곳은 가지런히 정리된 책들까지 마침 내리쬔 햇살 아래 금빛 찬란한 장식이 되어있었다.
이 서재로 들어서서 포카스를 처음 보자마자 장목화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자!’
저 앞의 장군은 생김새로 보나, 기세로 보나 먹잇감을 응시하는 한 마리 사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이가 좀 든 탓에 황토색 머리도 숱이 많이 줄어서, 그게 좀 그의 엄청난 분위기를 좀 깎아내렸다.
이내 빳빳한 군복 차림으로 창가에 서 있던 포카스가 노란 눈동자를 살짝 굴려 장목화와 성건우를 훑어봤다. 그 후, 아주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들이 반 지성교의 행적을 발견했다는 그 유적 사냥꾼 팀인가?”
성건우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서 50오레이 협찬도 받았죠.”
포카스가 그 말에 미간을 구겼다.
장목화가 황급히 설명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면 저희가 별도로 50오레이를 더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자라는 별명과 잘 어울리는 장군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 과정을 한번 상세히 말해보도록.”
포카스가 책상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성건우와 장목화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권유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꼭 두 사람을 자기 부하처럼 여기는 듯했다.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장목화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들과 조이덕의 우연한 만남, 그 후에 이어진 임무에 관한 이야기부터, 신규진을 덮쳐 그를 통해 이 사건이 반 지성교가 벌인 짓임을 확인했던 것까지 낱낱이 고했다.
다만 조씨 가문 집사 조수인에게 그 낯선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됐는지, 신규진에게 진술은 어떻게 받았는지, 또 그에게 누군가한테 붙잡혔었단 사실을 입단속 시킨 건 그냥 나름의 기술이 있다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그건 자신들의 비밀이니 말할 수 없다고 당당히 밝힌 것이었다.
이는 유적 사냥꾼 팀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도 아니었다. 다들 자신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수완이 있기 마련이었다.
포카스는 한동안 손을 들어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자네들은 왜 조씨 가문 장원 부근 구역을 감시하지 않고,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거리를 감시한 건가?”
‘역시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라 그런가?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네.’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반 지성교가 장원 주위를 삼엄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몇 초간 고민하던 포카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장원에 낯선 이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 사냥꾼 팀은 운이 상당히 좋았던 거군.”
“그렇죠.”
성건우가 깊이 공감했다.
뒤이어 장목화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내보인 문제를 가볍게 알아차린 포카스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 지성교는 전에도 그들의 존재를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장목화가 진짜 신부가 위드 시티에서 세웠던 계획과 당시 그의 행동을 대략 간추려 설명하자, 포카스가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나를 노리는 건가?”
성건우와 장목화가 무슨 대꾸도 하기 전, 별안간 포카스가 기세등등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보고 싶군. 자네들, 의심이 가는 낯선 자들을 다 알아볼 수 있겠나?”
“예.”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포카스가 웃었다.
“그렇다면 좋아. 이틀 뒤, 오전 9시에 여기로 와서 내 경비대에 합류해. 곧바로 녀석들을 잡아들이는 거야!”
그는 이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 듯했다.
“행운의 시간은 안 잡고요?”
성건우가 되물었다.
원래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길시’로, 이는 애쉬랜드어 단어였다. 하지만 성건우도, 장목화도 계속 레드리버어를 쓰고 있어서 정확한 대체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행운의 시간’은 성건우가 임의로 길시를 번역한 말이었다.
“행운의 시간?”
포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를 들면 새벽 2, 3시처럼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요.”
성건우의 설명을 듣고, 포카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필요 없어. 그들한테는 그렇게 대접해줄 자격도 없다고.”
‘보통 그렇게 입방정 떨던 사람 결말이 별로 좋지 않던데요, 장군.’
장목화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이번 작전에 참여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말하는 사이 그녀는 서재를 지키는 두 경비원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가 아니라 자네들 고용주가 결정할 일 아닌가? 근데 내가 생각하기엔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군. 이만 가봐. 시간 맞춰 오는 거 잊지 말고.”
자신 있게 답하던 포카스가 약간 피곤하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성건우가 상당히 놀랐다.
“저희한테 점심 대접도 안 하시겠다고요?”
포카스는 그를 위아래로 몇 번 훑어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자네가 지불한 대가인가? 작전 성공하면 축하연에 초청하지.”
“약속 지키십시오!”
성건우가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 * *
포카스의 집을 나온 성건우와 장목화는 즉각 회색 SUV로 돌아갔다.
장목화는 차를 몰며 룸미러를 힐끗 바라보았다.
“포카스 장군이랑 너랑 혈연관계라도 되는 줄 알았어. 저렇게 대뜸 밀고 들어가는 방법을 선택하다니.”
성건우가 손을 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혈연관계는 전혀 없겠지만……. 뭐, 필요하다면 만들 수는 있죠.”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왜? 재산 다 물려받으려고?”
“그럼 재산을 더 의미 있는 곳에 쓸 수 있겠죠.”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장목화는 다시 옅게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뭐, 네 배 채우는 데에? 잘 들어, 작전 실행 중 우리는 주요 목표가 아닐 거야.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해도 기껏해야 여파에 휩쓸리는 정도겠지. 위험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 음, 겐한테는 망토를 씌워줘야겠다. 로봇은 여러 각성자의 천적이니까.
포카스는 거침없긴 해도 실력 역시 아주 강할 거야. 조기정이 네가 각성자란 사실을 알렸을 텐데도 서재에 경비원은 단 둘뿐이었잖아. 어느 강자가 서재 전체를 주시하고 있었거나, 포카스가 강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하지만 그 정도 강자가 경비원으로 위장해 있을 리는 없었다. 차라리 포카스 옆에 대놓고 있으면 있었지, 아닌 척 위장하는 걸 훨씬 모욕으로 여길 것 같았다.
“아주 거만한 사람이에요. 근데 사람은 된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축하연에 초대해 준댔잖아요.”
성건우의 답변에 장목화가 픽 웃으며 차를 몰았다.
회색 SUV는 다시 또 전방의 검문소로 향했다.
* * *
그린올리브 구역 라베 스트리트, 휴고 여관.
성건우와 장목화가 사장에게 최신 상황을 물었다.
“어제도 무심자가 나타났나요?”
“아니. 앞으로 2, 3일이 더 지났는데도 발병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돌아와도 될 거다.”
휴고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성건우도 평소처럼 솔직하게 답했다.
* * *
여관을 나온 장목화, 성건우는 계획대로 아이언메달 스트리트에 빌려놓은 방으로 가서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와 합류했다.
서로의 결과를 공유한 뒤, 장목화가 자조하듯 웃었다.
“나도 바보네. 그 애들을 회사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레드리버어 초급자들처럼 생각했다니. 돌아가면 애쉬랜드어 입문용 교재도 한 권 만들어야겠어.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쓰는 교재를 참고로 하면 되겠다. 일단은 급하게 굴지 말고 오후 동안엔 잠부터 보충하자.”
다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성건우와 용여홍은 벙커 침대 2층에 누웠다. 이내 용여홍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 성건우보고 한마디 하려는데, 성건우는 눈을 감고서 오른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