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45화 (345/649)

345화. 집필

곁에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던 백새벽은 순간 성건우의 시선을 느꼈다. 멋쩍어진 백새벽은 얼른 나서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자료 볼까요?”

최근 그린올리브 구역 거리에서 발생한 무심병에 관한 자료였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테이블에 놓인 서류 봉투에서 자료를 꺼내 게네바에게 건넸다.

“겐, 이것 좀 투사해줘. 다 같이 볼 수 있게.”

이러는 편이 한 명씩 돌아가며 자료를 보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었다.

비좁은 방, 벽 위에 자료가 투사됐다. 구조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꼼꼼하게 살폈다. 뜻밖의 정보도 얻었다.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자의 이름은 마리, 아들은 필립이었다. 마리, 참 소박하고도 간단한 이름이었다.

자료를 반복해서 살피던 용여홍이 살짝 미간을 구겼다.

“사건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어. 그 구역에 밀집돼있다는 걸 제외하면.”

“맞아, 맞아.”

성건우는 과도하게 용여홍을 흉내 내며 호응했다.

장목화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건씩 따로 보면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긴 한데 사실 어디에서나 두 사람을 뽑아놓으면 그 정도 공통점은 있어. 여태까지 발생한 모든 사건을 한 데 놓고 보면 정말 겹치는 부분은 없어. 발병 구역 말고는.”

“내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다.”

게네바가 동조했다.

그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새벽이 말했다.

“근데, 구세계 콘텐츠에 ‘불가능한 것들을 제외한 뒤 남는 게 아무리 어처구니없어도 그게 진실이다.’란 말이 있었어요. 유일한 공통점이 이 구역에 사는 거라면, 문제는 이 구역에 있는 거 아닐까요? 이 구역 어딘가에 이번 무심병의 감염원이 잠재돼 있다면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그래서는 무심병이 집중적인 발병 이후 잠잠해지는 것과 나중에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발발하는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감염원에 발이 달렸나 보지.”

성건우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내 장목화가 웃으며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만약 감염원이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예를 들어 사람이라고 해보자. 그럼 여기 한동안 머물다가 다른 데로 가면, 우리가 아는 거랑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잖아.”

순간 겁에 질린 용여홍은 필사적으로 반박할 거리를 찾았다.

“그건⋯⋯. 근데 무심병은 애쉬랜드 수많은 곳에서 수시로 나타나잖아요. 감염원이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그렇게 바쁘게 다닐 수 있을까요?”

장목화는 여전히 용여홍을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감염원이 한 사람이 아니라, 한 집단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용여홍도 결국 할 말을 잃었다. 방 안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해졌다.

한숨으로 정적을 깬 장목화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신룡교의 그 꿈 보호자는 강소월의 심령 방에 들어갔다가 무심병에 걸렸어. 그걸 보니까 강소월처럼 당시 실험 대상이 됐던 사람이 적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중에 아직 살아 있는 일부가 애쉬랜드를 돌아다니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위 사람들을 무심병에 감염시킨 건 아닐까?

근데 이 추측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게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회사 직원들은 모두 엄격한 심사를 거친 사람들인데도 매해 적어도 한 차례씩은 무심병이 발발한다는 거.

둘째는 구세계가 파괴됐을 당시 각 대형 도시에선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무심자가 됐다는데, 이건 한 집단이 일으킬 수 있는 변화가 아니란 거야.”

“그러네요.”

용여홍은 이유 모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장목화는 다시 성건우를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혹시 모든 사람의 의식 세계와 연결된 심령의 복도 관련 문제는 아닐까? 그곳에 강소월의 방이 있다면, 당시 강소월처럼 실험 대상이 됐던 사람들한테도 각자 방이 있을 거야. 그들의 특정 행동이 주변의 방 주인을 무심병에 감염시키나?”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면 조사해볼게요.”

성건우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러자 장목화는 금속 와우를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마다 나도 각성자가 되고 싶다니까.”

구조팀에는 아직 심령의 복도 급 강자가 없었다. 즉, 계속 토론을 이어 나가봤자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라는 뜻이었다. 장목화도 결국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엔 외출하지 말자. 할 일이 쌓여있으니까. 아마 밤새야 할지도 몰라.”

“무슨 일인데요?”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거기 여자애들한테 약속했잖아. 레드리버어 입문용 교재를 마련해준다고. 아까 건우랑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그런 교재는 없더라고. 있더라도 레드리버인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 애쉬랜드어 표기가 없어. 그러니 별수 있나, 내가 직접 만들어야지. 그리고 나중엔 길드에 두 언어에 모두 능통한 임시 선생님 구인하는 의뢰를 하려고.”

“교재를 집필하겠다고요? 짧은 시간에 끝날 일이 아닐 텐데요?”

용여홍은 자신이 쓴 레드리버어 교재를 떠올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책을 한나절 만에 완성하긴 불가능한 얘기였다.

“그렇지, 근데 우리한텐 겐이 있잖아.”

장목화가 씩 웃으며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그래, 내가 뭘 하면 되지?”

게네바가 곧장 물었다.

장목화는 여전히 맑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한테 애쉬랜드어, 레드리버어 사전, 또 문법 사전도 다 있지?”

게네바가 금속 목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응, 그게 아니면 나도 레드리버어, 애쉬랜드어 모두 능통할 수 없지.”

장목화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그중에서도 비교적 간단한 것들만 선별해서 인쇄해줘. 하하, 내가 아까 말을 잘못했네. 한 번 나갔다 오긴 해야겠다.”

이제야 장목화의 뜻을 이해한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로봇 친구는 정말 여러모로 도움이 되네!’

그 사이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초고가 완성되면 회사 교재랑 번역기로 교정을 보자. 물론 작업량이야 많겠지만 내일 아침 전까지는 완성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갑자기 장목화가 씩, 미소를 그리는 걸 보고 용여홍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난 이거 혼자 하겠다고 한 적 없다? 우리 다 같이 해야지!”

장목화는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올려 묶으며 거의 전투태세를 갖췄다.

“네.”

가장 먼저 답한 건 백새벽이었다.

“좋아요.”

성건우도 바로 답했다.

“알겠어요.”

“문제없지.”

용여홍과 게네바도 속속들이 응답해왔다.

* * *

다음 날, 구조팀은 전혀 다른 곳에서 아침을 맞았다. 레드울프 구역 방 3개짜리 숙소였다. 어제 작업의 편의를 위해 옮겨온 숙소였다.

환한 햇살을 맞으며 장목화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앞엔 원고가 놓여있었다.

“됐다!”

드디어 간략한 레드리버어 입문용 교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장목화는 구조팀 식구들과 아침을 먹었다.

또 그녀는 식사 중에 무선 통신기를 켜서 조씨 가문에서 온 전보가 있는지도 확인해보았다.

8시가 막 됐을 무렵,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전보의 해석을 마친 뒤 장목화가 경쾌하게 내용을 읽어주었다.

“며칠 안에 장군 포카스를 찾아가 주길 바람. 이미 연락은 해뒀음. 신분을 증명할 암호는 ‘책’. 저택은 골든애플 구역 시티즌 스트리트 18호.”

* * *

구조팀은 다시금 효율을 위해 조를 나눠 움직였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 조는 서쪽 항구 근처의 늑대소굴에 도착했다.

“자, 레드리버어 입문용 교재야. 일단 며칠은 이걸로 익히고 있어. 나중에 너희를 지도해줄 사람을 붙여줄게.”

말을 마친 백새벽이 여자들에게 책을 내밀었다. 어제 구조팀이 밤새 작업한 결과물은 게네바가 다시 편집, 배열, 스캔까지 끝낸 뒤 인쇄소에서 따끈따끈한 책으로 탄생했다. 백새벽 조는 그 책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나영은 책을 받아 들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빨리? 미리 만들어져 있던 건 없을 텐데?”

“어떻게 알았어?”

용여홍이 반문했다.

소나영은 옅은 보조개가 보이도록 웃으며 번역기를 살짝 흔들었다.

“이걸로 저 종들에게 물어봤거든.”

“우리가 레드리버어를 배울 때 썼던 교재를 살짝 고쳐 만든 거야. 우리 로봇 친구가 있어서 별로 힘들 것도 없었어.”

백새벽이 말했다.

여자들은 사실 로봇이 어떻게 작업을 더 수월하게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신기하고 대단한 사람들의 말은 의심하지 않고 믿었다.

이내 그녀들은 교재를 열심히 뒤적이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읽지?”

“발음 표시 기호 없어?”

“나, 난 글을 몰라⋯⋯.”

“휴, 내가 가르쳐줄게.”

백새벽과 용여홍이 얼른 나섰다. 그들은 어제 교재를 만드는 데 열중하느라 제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버렸다.

이 여성들은 반고 바이오에서 레드리버어를 갓 배우기 시작하는 학생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애쉬랜드 문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고, 일부는 아예 문맹이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히 소나영과 어제 이야기했던 진진희, 또 도윤미라는 여성은 조금이라도 글을 알고 있어서 나머지 동료들을 가르쳐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애쉬랜드 문자 교재도 만들어야겠는데.”

용여홍이 작게 중얼거리며 무의식적으로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이러한 방면에 있어 지능인은 탄소기반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게네바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문제도 없다는 뜻을 밝혔다.

점차 여자들이 안정을 되찾았을 무렵, 백새벽이 차분히 물었다.

“음식은 충분해?”

이경서가 나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충분해. 사장 아니, 오거가 건물에 식량을 많이 저장해뒀어. 앞으로 보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게다가, 게다가, 그 대마인가 뭔가 하는 사업도 굉장히 잘 되고 있고⋯⋯.”

그때, 갑자기 소나영이 그녀의 말을 끊고 나왔다.

“근데 안정적인 기틀만 잡으면 그 사업은 더 이상 안 할 거야. 그 물건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나가 있거든. 특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 신상품이라나 뭐라나 하는 그걸 흡입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그걸 살 돈이 없어지면 내가 다 보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하더라고. 우리한테 총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 우리한테 총을 쐈을 거야!”

아무래도 그녀는 어젯밤 겪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약간 빠른 말투로 횡설수설 이야기했다.

“맞아.”

“진짜야.”

다른 여자들도 분분히 동조했다.

백새벽은 그들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그러는 편이 좋지.”

다시 잠깐 망설이던 소나영이 물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물건을 팔지 않으면, 물건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발광하지 않을까? 우리 가게를 털려고 하면? 그러다 죽으면 어떡해?”

백새벽이 침착하게 답했다.

“그럼 사격 기술을 잘 익혀서 대응해야지. 그리고 그걸 끊을 수 있는 녀석들은 자연스레 끊어버릴 거야. 끊지 못하는 녀석들은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게 그들 가족이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나은 일이지 않을까?

그래, 앞으론 어떤 사업을 하고 싶어?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일단 두려움을 달래준 백새벽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소나영도 기억을 더듬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음, 1층을 새로 단장하려고. 훠궈 식당 대신 패스트푸드점을 열기로 했어. 너희가 말해준 훠궈도 좋은데, 향신료랑 식재료도 다양하게 필요하고 가격도 저렴하지 않아서. 그런 걸 먹을 수 있는 건 선원과 상인들뿐일 거야.

여기 부근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값싼 패스트푸드가 많이 팔려. 대부분 항구랑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부부 모두 바쁘게 일하다가 늦은 저녁에나 돌아오거든.

안 그래도 피곤한데 직접 석탄이나 목재나 전기로 음식을 차려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 그러니까 가격도 괜찮고 식재료도 안정적으로 들여올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을 차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훠궈 식당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야. 일단 패스트푸드점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2층에 작게나마 내보려고.

또 1층을 목욕탕으로 만들 생각도 했었거든? 그냥 일반 대중목욕탕으로. 주변 거리에 사는 사람 중에 하류층 주민이 꽤 많거든. 그 사람들도 목욕은 하고 싶은데, 사는 곳에 독립된 화장실이 없어서 목욕하기가 힘들어.

부근에 목욕탕 몇 개가 있긴 한데, 종종 단수도 되고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아. 근데 이 건물은 단수가 된 적은 없어서.”

말을 잇는 소나영의 얼굴엔 내내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자들 역시도 다 함께 짠 계획이지만 기대감 어린 눈망울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들어도, 들어도 행복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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