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큰 소리
백새벽이 먼저 크리스티나를 한번 슥, 훑고 시선을 거뒀다.
“너무 빤히 보지 마, 우리가 자길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어.”
위드 시티에 있을 때 백새벽은 크리스티나와 직접 접촉한 적이 없었다. 그저 두어 번 정도 마주치며 생김새만 익혔을 뿐이고, 그녀가 욕망 성인 교파의 각성자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게 다였다.
아무래도 크리스티나를 안다는 걸 들키면 좋을 게 없었다. 앞으로 퍼스트 시티에서 이뤄질 구조팀 임무에 골칫거리만 안길 게 뻔했다.
그런데 또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생각을 바꾸며 말했다.
“아니야, 넌 좀 더 봐도 돼.”
오히려 남자가 크리스티나를 못 본 척하는 게 그녀의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백새벽은 황야유랑자 시절, 자기 성애자들을 제법 만났던 경험이 있었다.
이내 용여홍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거뒀다.
“방금 보니까 여자 동료를 대동한 유적 사냥꾼들은 크리스티나한테 별로 눈길을 주지 않더라고.”
그는 일취월장한 자신의 관찰력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이것도 여러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 짧은 순간, 용여홍의 머릿속은 매우 분주했었다.
‘야, 빨리 눈 돌려. 안 그럼 들킬 거야. 아니야, 건우가 그랬잖아? 보통 남자는 미인을 보면 한동안 뚫어지게 쳐다본다며? 급히 눈 돌리는 건 두 가지 경우밖에 없댔어. 그 미인이랑 눈이 마주쳤을 때, 혹은 뭔가 켕기는 게 있을 때.
자, 그럼 이제 우연히 저길 봤던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딴 데를 쳐다보자. 어? 근데 왜 저 여자는 남자 팔을 꼬집고 있지? 어라? 남자는 얼른 고개를 돌리면서 변명까지 늘어놓네?’
이러한 사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몇 초간 생각에 잠겨 있던 백새벽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말 되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지만, 크리스티나는 오해할 수 있잖아.”
“그래, 그래.”
용여홍은 백새벽이 자신의 말을 인정해줬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그때, 이쪽으로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구조팀을 지나쳐 계단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 그녀는 세 사람을 힐긋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로 은흑색 로봇 게네바였다.
곧이어 크리스티나가 완전히 위층으로 올라가자, 용여홍은 그녀가 떠난 자리를 힐끔 돌아보면서 자조하듯 웃었다.
“건우는 자기 사무실로 데려가더니, 나는 본 척도 안 하네.”
원래 용여홍은 우리라고 말하려다 급하게 주어를 바꿨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크리스티나가 ‘얼빠’인 모양이라고 비웃으려 했는데, 그렇게 말했다간 백새벽의 외모를 비하하는 걸로 비칠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표현을 바꿨다.
여기서 얼빠란 강소월에 관한 자료를 보며 익힌 구세계 단어인데, 오직 다른이의 외모만 보는 사람들을 뜻했다. 욕망 성인 교파 소속의 각성자로 의심되는 크리스티나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용여홍은 자기 객관화가 참 잘 된 사람이었다.
그때, 용여홍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게네바가 동조하고 나섰다.
“난 그 이유를 알지. 넌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키가 175센티미터밖에 안 되고, 생긴 것도 그저 그렇⋯⋯.”
“그만! 그만! 건우가 가르쳐줬냐?”
용여홍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듣고 있다가 겨우 게네바를 저지했다. 그리고 백새벽은 몇 초간 눈만 굴리다 급히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게네바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건우가 그랬어. 넌 너 스스로를 부정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하면서 강해지려는 의지를 자극한다고.”
“하, 참 황송하네!”
용여홍은 짧은 한숨을 내뱉은 뒤, 1층에 있는 대형 패널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패널에는 현재 받을 수 있는 임무가 떠 있었다.
「⋯⋯정수 장치 한 무더기 급구⋯⋯」
「⋯⋯북쪽 기슭 불모지에 변이 생물 급증, 소탕 필요⋯⋯」
「⋯⋯북쪽 산기슭에 흰 늑대 한 마리 출몰⋯⋯」
「⋯⋯핏빛 황원 9호 폐허로 갈 동료 구함⋯⋯」
「⋯⋯경호원 모집⋯⋯」
용여홍이 임무들을 살피는 척하던 그때였다. 대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유적사냥꾼 팀 하나가 구조팀 곁으로 다가왔다.
팀을 이끄는 건 수염을 기른 장년의 레드리버인이었다. 구세계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는 린넨 셔츠에 낡은 검은색 조끼를 걸친 채, 양쪽 허리춤에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난 카를로라고 한다.”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레드리버어로 인사했다.
“전하얀.”
백새벽은 능숙하게 가명을 댔다.
“고지용이야.”
용여홍도 얼른 그 뒤를 따라 가명을 밝혔다.
카를로는 은흑색 게네바를 힐긋 살핀 뒤 계속 웃으며 물었다.
“함께 팀을 이뤄, 북쪽 산기슭에 있다는 그 흰 늑대를 잡을 생각 없나?”
용여홍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카를로가 잔뜩 낮춘 소리로 덧붙였다.
“우리한테 길드와의 연줄로 얻은 비밀 정보가 있어. 그 정보에 흰 늑대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포함돼 있거든.”
‘아마 그거 우리가 길드에 판 정보 같은데.’
용여홍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백새벽만 힐끔 쳐다봤다.
카를로는 용여홍과 백새벽이 머뭇대는 걸 보고, 다시 게네바를 흘깃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 믿어도 돼! 분명 우린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게 될 거야. 부담해야 하는 위험도 그렇게 크지 않아!”
‘근데 왜 계속 게네바를 보는 거지? 아, 이들이 원하는 게 매혹 능력에 면역이 있는 로봇이구나. 나랑 새벽이는 뒷전인 거야.’
용여홍은 깨달음을 얻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백새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한텐 다른 임무가 있어서.”
“같이 진행하면 되지! 우리 팀을 못 믿겠다면 길드한테 합작 증인이 돼 달라고 해도 되잖아. 우린 이미 퍼스트 시티에서 기반을 잡았어. 겨우 그만한 이익을 위해 기껏 다져놓은 이 기반을 버릴 생각도 없다고.”
카를로는 끈질기게 굴었다.
하지만 백새벽도 꾸준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한동안 도시 밖으로 나갈 계획이 없어.”
“알겠어.”
카를로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백새벽은 그를 보고 잠시 고민하다 끝내 입을 열었다.
“그 흰 늑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거야.”
말을 마친 그녀는 용여홍, 게네바와 함께 길드 밖으로 나갔다.
* * *
용여홍이 막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데, 백새벽이 물었다.
“패널에 뜬 임무 중에 그 여자애들이 하기에 적당한 건 없었지?”
사냥꾼 길드에서 내건 임무는 종종 사업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응, 없었어.”
용여홍은 임무 목록을 그다지 진지하게 살피지 않았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시 길드로 들어가 임무를 제대로 살펴보자고 제안하려던 때였다.
콰쾅!
갑자기 도시 모처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주위 건물의 유리창도 분분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굉음이 잦아든 후, 용여홍이 멍하게 근원지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지?”
백새벽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폭발 같았는데.”
“대비해본 결과로 보니 폭발이 맞아.”
게네바가 분석 결과를 알려주었다.
곧이어 상공에 새카만 무장 헬리콥터가 하나둘 떠올랐다. 레드울프 구역 동쪽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마침내 누군가가 길드에 전화로 정보를 팔았다. 오늘 진행된 집회에서 악의적인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차를 타고 다른 거리로 향하는 동안 퍼스트 시티 분위기가 상당히 긴장된 걸 알아챘다. 순찰 중인 무장 요원도 늘어났다.
그 때문에 일행은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 집 부근을 돌아다니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골든애플 구역의 경계는 더 삼엄해져 있을 게 훤했다.
대신 퍼스트 시티에서 전도유망한 사업에 대한 정보 수집만은 조금 더 기초적으로 끝낸 뒤, 그린올리브 구역의 아이언메달 스트리트로 돌아갔다.
* * *
“집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니, 가볍게 볼만한 사건이 아닌데? 퍼스트 시티 정세에 어느 정도 혼란이 생긴 모양이야.”
장목화가 그린올리브 구역으로 차를 몰며 중얼거렸다. 그녀와 성건우는 현재 블랙셔츠파 루트로 굉음의 정체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런데 성건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 장목화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야. 적당한 혼란이 생기면 아비아, 마커스와 접촉할 기회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맞아요.”
성건우가 매우 협조적으로 호응하자, 장목화는 그를 힐긋 보다가 휴고 여관이 자리한 거리로 핸들을 꺾었다.
무심병 발병 사례에 관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구조팀은 이를 위해 무려 10오레이나 지불했었다.
* * *
여관 사장 휴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갈황색 서류 봉투에 담긴 자료 한 다발을 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장목화와 막 돌아서 이곳을 떠나려는데, 갑자기 한 인영이 여관으로 냅다 뛰어 들어왔다.
검은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레드리버 여자였다.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지만, 흰머리가 아주 많은 데다 피부도 햇볕에 타서 가무잡잡하고 거칠었다.
이내 나무로 만든 조악한 장난감 인형 하나를 쥔 그녀가 여관 안의 사람들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무서워할 것 없어. 필립은 아주 순종적이야! 무심병에 걸렸는데도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지도 않고 내 말을 아주 잘 듣는다고!”
그녀는 아첨하듯 웃으며 말하는 내내 들고 있는 인형을 가리켰다.
장목화가 당황한 사이, 뒤에서 여관 사장 휴고가 조용히 말했다.
“저 여자 자식이 두 번째 무심자였거든. 막 성인이 된 청년이었어.”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휴고는 절박과 기쁨이 뒤섞인 여자의 눈을 보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여자는 이미 미쳐버렸어.”
* * *
그린올리브 구역, 아이언메달 스트리트.
장목화가 전한 테렌스와 초월 영성 교단에 관한 이야기에, 용여홍이 흠칫 놀랐다. 팀장과 건우도 초월 영성 교단과 깊이 관련된 자를 만났다니.
“저희는 오늘 마침 크리스티나를 마주쳤어요.”
“역시 너답네.”
성건우가 먼저 선수를 치자, 용여홍이 억울한 듯 발끈했다.
“근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건우는 결코 1절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예 두 손으로 합장을 하고 아주 장엄하게 대꾸했다.
“우연한 만남도 연이 닿아야 이루어지지요.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결국 장목화가 또 나서서 말린 뒤, 용여홍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냥 퍼스트 시티에 여러 교파랑 여러 각성자가 존재하고, 그들의 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벌어진 일이야.”
짝짝짝!
손뼉을 치던 성건우는 장목화의 눈총을 받고서야 바른 자세로 앉았다.
뒤이어 장목화가 집회에서 일어났다는 폭발 사건에 대해 언급했다. 이에 대한 간단한 토론부터 시작해 아들을 무심병으로 잃고 정신을 놓은 어머니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긴 대화가 끝났다.
구조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탄식만 했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까, 성건우가 갑자기 게네바를 보고 호기심이 동한 듯 물었다.
“너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한숨이 나와?”
은흑색 손으로 군용 베레모를 만지작거리던 게네바가 데이터를 분석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이런 상황과 그에 대한 정확한 반응을 연관 짓지는 못해. 그렇지만 나한테는…… 수산나와 루이더스가 있었잖아. 둘이 변해가던 모습이 생각났어. 그때랑 비슷한 것 같아서 연관 지어 보니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어.”
“다른 사람에게 있었던 일을 자기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인간화 정도가 더 높아졌다는 뜻인 거야.”
장목화가 말했다. 평소 용여홍을 칭찬할 때와 비슷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