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홍차
작업을 마쳤을 때 시간은 이미 10시가 다 돼 있었다. 하늘이 컴컴했다.
성건우는 늑대소굴이 자리한 건물을 나오며 손에 든 명단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 남았네요. 이 블랙셔츠파의 세컨드 보스 테렌스.”
구조팀은 이미 오거를 통해 늑대소굴의 배경을 파악했다. 늑대소굴은 블랙셔츠파라는 조직의 사업장으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재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곳의 관리자는 세컨드 보스 테렌스이고, 오거는 그자의 심복이었다.
블랙셔츠파는 퍼스트 시티에서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는 거대 암흑가 조직 중 하나로, 상류층과 밀접하게 관계돼 있기도 했다.
곧이어 장목화가 말했다.
“그래, 일단 급하게 굴지 말자.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테렌스를 찾아가면 이상한 낌새만 들킬 거야. 차라리 내일 오전에 오거를 데려가자.”
성건우는 명단을 다시 접어 넣었다.
“오거 기억 속에 테렌스라는 인물은 좀 미스테리했어요. 꼭 몇몇 종교 분자랑 연루된 것처럼⋯⋯. 아, 신중해야지.”
성건우는 돌연 입가를 훔치며 말을 끊었다.
장목화도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늑대소굴이 자리한 건물을 돌아보았다. 조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건물 위층은 어둠에 잠겼고, 지금은 일부 유리창에만 노르스름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거둔 장목화는 팀원들을 돌아보다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안여향이 했던 그 말뜻을 깨달았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의 표정이 사뭇 복잡해졌다.
“저 여자애들 눈에 정말 빛이 있더라.”
* * *
다음 날 오전, 구조팀은 조기정에게 전보를 보내 장원들에 생긴 문제가 반 지성교로 인한 것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이게 반 지성교의 미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조기정과 조이덕 곁에도 반 지성교 신도가 몰래 숨어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같은 논리로 위드 시티의 다른 귀족들 곁에도 반 지성교 신도가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그 때문에 장목화는 일단 조기정이 퍼스트 시티와의 관계를 이용해 그곳 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기정을 도우러 나선 퍼스트 시티 내 세력 우두머리에게만 함정일 수도 있다고 일러줄 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기정이 바로 답을 보내왔다. 우선 행동을 중지하고 기회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통지를 기다리라는 내용이었다.
장목화의 예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 후 구조팀은 조를 나눠 움직였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블랙셔츠파의 세컨드 보스 테렌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오거가 새 정부를 찾아 사랑에 깊이 빠져있긴 해도 늑대소굴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설득하는 역할이었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사냥꾼 길드로 가 한명호의 행적을 발견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도시를 한 바퀴 돌면서 지형을 숙지하기로 했다.
그렇게 소나영을 비롯한 여자들이 앞으로 퍼스트 시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전도가 유망할지 살펴볼 계획이었다.
* * *
테렌스의 집은 레드울프 구역 스턴 스트리트 25호 독채였다.
문 앞엔 부하 두 명이 기관단총을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길가에 지프를 대고 오거를 따라 대문으로 향했다.
“저 사람들은?”
문을 지키는 블랙셔츠파 조직원이 기관단총을 쳐들고 물었다.
그러자 오거가 웃으며 답했다.
“보스한테 이미 전화로 말씀드렸어. 내가 아주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야. 대마랑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산 신상품을 대량 구매하고 싶대.”
퍼스트 시티에는 전화선이 깔려있긴 했지만 그렇게 널리 퍼져 있진 않았다. 대부분은 전화라는 게 필요치 않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조직원 하나가 대문 옆의 무전기를 들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다시 무전기를 내려둔 뒤엔 두 짝으로 이뤄진 적갈색 대문을 가리켰다.
“들어가. 보스는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능숙하게 대문을 연 오거는 장목화, 성건우를 2층 거실로 안내했다.
* * *
거실엔 검은 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가 막 좌식 탁자에 흰 자기 찻잔 두 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오거는 그 남자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이분들이 제가 말씀드린 고객입니다.”
장목화는 조용히 그 중년 남자를 훑어보았다.
‘저 사람이 테렌스구나. 사람이 없나? 직접 차를 내오다니. 이 집에 종종 일어나는 불법적인 일 때문에 사람을 고용하는 게 어려운 걸까?’
40대 정도로 보이는 테렌스는 몸집이 상당히 비대했다. 정말 금방이라도 셔츠 단추가 다 튕겨나갈 것만 같았다. 짧은 갈색 머리와 파란 눈동자는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생김새와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험상궂었다.
또 일하는 사람은 없어도 일단 방엔 완전 무장 한 경호원 네 명이 있었다.
오거의 소개를 받고, 테렌스가 웃으며 흰 자기 찻잔을 가리켰다.
“임해연맹에서 생산된 홍차야. 맛보지 않는 게 손해지.”
장목화는 흰 찻잔 속에 찰랑이는 액체를 보는 순간, 급속도로 갈증이 일었다. 당장 잔을 들고 꿀꺽꿀꺽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암흑가 조직 보스의 집이었다. 아무거나 덥석덥석 입에 넣을 순 없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러고 싶더라도 일단은 성건우가 그와 친구가 되기를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곧이어 성건우가 몇 발짝 앞으로 나가 오른손을 뻗었다.
“안녕하십니까.”
테렌스는 고개를 끄덕여 예를 표하면서도 손을 뻗지는 않았다.
“안녕하신가. 난 원래 다른 사람이랑 신체를 접촉하지 않아. 아름다운 미인은 예외지만, 하하.”
성건우는 상대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오거 소개로 온 사람들입니다. 친구끼리는 종종 안녕이라고 인사하죠. 그러니까⋯⋯.”
연신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던 테렌스가 돌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열정적으로 걸어 나왔다. 급기야 그가 성건우를 꼭 끌어안았다.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해? 난 자네들이 언제나 올지 내내 궁금했다고.”
“놀라셨습니까?”
성건우도 활짝 웃으며 상대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는 테렌스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다.
그때, 테렌스가 갑자기 힘을 풀고 급격히 변한 낯빛으로 외쳤다.
“저 홍차는 마시지 마! 안에 강력한 수면제가 들었어!”
동시에 장목화는 갈증이 싹 달아나는 걸 느꼈다.
‘강력한 수면제? 그럼 일찍이 우리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냐, 그걸 알았다면 겨우 이 정도 인력만 데리고 있지는 않겠지. 이 정도 함정만 설치해두진 않았을 거야. 테렌스가 방금 차를 직접 내온 건 시간이 부족해서였나? 누굴 부를 새도 없이 당장 약을 타야 해서?’
장목화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오거가 깜짝 놀라 물었다.
“보스, 왜 저희에게 수면제를 먹이려고 했던 겁니까?”
‘안 돼! 묻지 마!’
장목화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거의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곧이어 테렌스가 웃으며 답했다.
“난 일정 범위 내에서 위험한 존재를 감지할 수 있거든⋯⋯.”
잠시 말을 흐리던 그가 조금 전 말을 멍하니 반복했다.
“위험⋯⋯.”
상황이 악화되기 직전이었다. 장목화도 결국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품었던 희망을 버리고 내내 힘주고 있던 등을 확 뻗으며 테렌스에게 돌진했다. 동시에 허리춤에 숨겨둔 아이스모스 권총을 뽑아 들었다.
성건우도 못지않게 발 빠른 행동에 나섰다.
그 순간, 테렌스가 파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대로 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장목화와 성건우의 협공을 피한 것이었다.
거실에 있던 경호원들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장목화는 바닥에 착지한 뒤 몸을 돌려 권총으로 테렌스를 겨냥했다.
바로 그때였다. 장목화의 온 심신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졌다. 공격 의지도, 삶에 대한 욕망도,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욕심도 싹 가셨다.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을까?
‘현자 타임.’
지금 장목화는 언젠가 구세계 콘텐츠에서 본 바로 그 현자 타임에 빠진 것 같았다.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맑아진 머릿속에 인생의 의미와 세계의 본질, 존재의 철학, 조금 전 실수와 후속 대응책이 분주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곁눈에 걸린 성건우 역시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있었다.
그리고 테렌스는 날린 몸을 굴려 일어나 경호원들에게 성건우와 장목화를 총으로 겨누라고 지시했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승리에 도취했다.
“생각도 못 했겠지? 나한텐 이런 능력도 있어! 강력한 수면제는 피했을지 몰라도, 현자 타임은 피할 수 없지, 말해라! 누가 보낸 거지? 네가 말해!”
테렌스는 성건우의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내 현자 타임에 빠진 장목화가 이상하리만치 냉정한 눈빛을 빛냈다.
“네 강력한 수면제도 별 효과는 없었을걸. 우리는 체질이 워낙 강해서 약은 대부분 잘 들질 않아.”
이 말이 모욕이라도 된 듯 테렌스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증명해주지!”
그가 찻잔 하나를 들고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보스…….”
조금 전 변고로 추리 광대 효과에서 벗어난 오거가 멍한 얼굴을 했다.
차 반 잔을 단숨에 마신 테렌스의 얼굴에도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난 누구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나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몇 초간 혼란에 빠져있던 테렌스가 찻잔을 냅다 던지고 목을 틀어쥐었다. 이미 마셔버린 홍차를 토해내려는 가련한 몸부림이었다.
더 이상 보충이 되지 않으니 현자 타임의 효과도 빠르게 가셨다. 이내 성건우는 가볍게 양손 동작 불능 능력을 써 미처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경호원들을 제압했다. 동시에 오거의 저항 능력도 제거했다.
장목화는 빠르게 걸어와 손날로 목을 쳐 테렌스를 기절시켰다.
잠시 후, 거실에 남은 이들을 차례로 설득한 성건우가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을 한 거죠?”
장목화는 그를 살짝 흘겨보았다.
“너도 나처럼 오거의 질문을 막으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오거의 질문으로 테렌스가 추리 광대 능력에서 벗어날 거란 걸 알아차렸어.
나한테 공격할 시간이 있다면 너한테도 테렌스에게 억지쟁이 능력을 쓸 여유가 생길 걸 알았고. 유지 시간이야 짧겠지만.
일단 난 테렌스를 자극해 홍차를 마시게끔 시도는 할 텐데,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네가 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짝! 짝! 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 * *
2시간 후, 거실.
“하하, 네가 가진 세 가지 능력이 뭐라고?”
성건우가 테렌스 어깨에 팔을 두르고 즐겁게 웃었다.
“하하, 현자 타임, 타는 목마름, 위험 감지 이 세 가지. 하하, 그 대가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고.”
테렌스 역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그 능력들은 어느 영역에 속해 있는 거야?”
성건우는 계속 호탕하게 웃으며 질문을 이어갔다.
“하하, 만다라지.”
“하하, 그럼 넌 욕망 성인 교파의 교도인 건가?”
이 순간 장목화는 건장한 남자 둘이 어깨동무하고 미친 것처럼 웃고 있는 걸 보고는 당장 어디로라도 사라지고 싶었다.
그때, 테렌스가 갑자기 웃음기를 싹 거뒀다.
“아니, 그놈들은 빌어먹을 이단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