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완벽한 연기
신규진은 못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성건우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더니, 구슬 밝기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갈까?”
게네바가 물었다.
이번엔 용여홍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조금 더 완벽한 연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래.”
장목화 역시 뭔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백새벽이 객관적으로 말했다.
“우린 지금 조 의원이 고용한 조사팀을 연기하고 있어요. 스스로를 드러내면 안 되는 상황이에요.”
“그럼 저 사람 깨워.”
장목화가 바닥에 누워있는 신규진을 가리켰다.
“내가 할게.”
게네바는 이참에 레드스톤 마트에서 새로 장착한 모듈인 전기 충격기를 시험해볼 작정이었다.
잠시 후, 몸을 바르르 떨며 깨어난 신규진이 눈앞의 네 사람과 옆쪽에 서 있는 은흑색 로봇을 쳐다보았다.
백새벽은 곧장 팀을 대표해 나섰다.
“야, 너 뭐야? 운전을 왜 그딴 식으로 해!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방향을 꺾거나 브레이크를 밟아야지. 우릴 죽이고 싶었어? 앞장선 게 로봇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넌 오늘 살아서는 못 돌아갔어!”
옆에서 용여홍은 화들짝 놀랐다. 백새벽에게서는 연기의 ‘연’ 자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 상황만큼이나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나? 아, 맞아. 새벽이는 황야유랑자 출신이지?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든 했을 거고, 그러다 보면 시비도 자주 붙었겠지.’
용여홍이 속으로 배우 백새벽에게 찬사를 보냈다.
깨어나자마자 욕을 진탕 먹은 신규진은 뭐라고 맞받아치고 싶었으나, 가슴에서 올라오는 진한 통증과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대에게 주눅이 들어 꼬리를 내렸다.
“잘못은 너희 로봇이 한 거야. 저 녀석이 내 차에 냅다 착지한 거라고.”
“이 아이는 개구리 형 로봇이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게 죄야?”
장목화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상황을 잠시 분석해보던 신규진이 애써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거야?”
백새벽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다시 칠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결국 구조팀은 신규진에게서 무려 50오레이를 뜯어냈다.
신규진은 곧 숲을 떠나는 구조팀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에 들어있던 종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천천히 소형트럭에 올라탄 신규진은 돌아가 치료받을 준비를 했다.
숲 안에서 도로 쪽을 바라보던 용여홍이 피식 웃었다.
“반 지성교의 일반 교도는 정말 똑똑하지 않네요.”
장목화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매번 이렇게 돈을 뜯어낼 수 있다면 굳이 공격하고 싶지도 않겠는데.”
성건우 역시 깊이 동조하는 바였다.
* * *
저녁 7시가 넘은 시각, 저녁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그린올리브 구역 아이언메달 스트리트에 빌려둔 숙소로 갔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자. 침대가 두 개뿐이라 바짝 붙어서 자야 해.”
주위를 둘러보던 장목화가 씩 웃으며 누군가를 주시했다.
“난 작은 흰둥이랑 잘래!”
방이 매우 좁아서 벙커 침대 하나, 테이블, 의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난 앉아서 쉬어도 돼.”
게네바가 말했다.
그 순간, 성건우와 용여홍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혐오스러운 눈빛을 보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장목화는 오후에 얻은 수확에 뭐가 있는지 전보문으로 작성했다. 내일 오전 조기정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바깥 항구 쪽에서 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우우우-!”
길게 이어진 소리는 야수의 울음처럼 슬프고도 기이했다.
“저게 뭐지?”
장목화가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백새벽은 전에 용여홍에게 했던 설명을 간단히 반복했다.
“애쉬랜드인 창녀요. 말이 안 통해서 늑대 울음으로 호객행위를 해요. 퍼스트 시티 내에서는 일종의 성의 상징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녀도 외부인이라 성의 상징이라는 말에는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들었을 뿐이었다.
장목화가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던 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성건우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가서 보고 올게요.”
용여홍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긴 퍼스트 시티고 우리 임무는 이제 막 시작 단계인데, 무턱대고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는 거 아냐?’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좌우를 둘러보니, 장목화와 백새벽도 성건우를 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성건우를 말릴 생각 같은 건 아예 없어 보였다.
게네바는 조금 머뭇대고 있었는데, 용여홍은 그게 상황 분석을 마친 게네바가 인간적으로 보이려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이랑 새벽은 뭔가 하려는 것처럼 보이긴 해. 근데 아직은 결과도 고려하고 장단점을 분석하느라 망설이고 있는 거지. 가만히 보면 위험한 일이 있으면 꼭 건우가 나서서 결국 우리 팀 전체를 움직이게 만들잖아?’
용여홍도 어느덧 가진 무기를 점검한 뒤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목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를 따라가니, 10여 분만에 8층짜리 빌딩이 나왔다.
구조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꼭대기에 걸린 간판들을 발견했다.
[애쉬랜드 늑대소굴]
레드리버 문자로 적힌 간판들이었다.
“7층과 8층이 전부⋯⋯.”
용여홍이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어진 침묵을 깨트렸다.
“응.”
장목화가 간단히 답한 뒤 고개를 틀었다.
이 순간, 성건우는 벌써 건물로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세 대 중 한 대의 문이 열렸다.
구조팀 다섯이 차례로 올랐다. 제일 마지막으로 탑승한 건 게네바였다. 그가 오르자마자 엘리베이터가 살짝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몇 번 흔들렸다.
용여홍은 다른 것보다 낡고 얼룩진 벽에 눈길이 닿았다. 벽엔 흰 종이들이 붙어있었는데, 그림이 그려진 종이나 사진이 포함된 종이도 있었다.
주인공은 다 여자였다. 교태를 부리는 여자, 특정 부위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낸 여자, 전형적인 애쉬랜드 생김새의 여자 등등.
용여홍은 바로 시선을 거두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7층에 도착했다.
용여홍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권총을 든 남자 네 명을 보았다.
전부 레드리버인으로 머리 색은 다 달랐지만, 모두 같은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팔도 하나같이 상당한 근육질이었다.
그들 옆으로 자리한 복도 양쪽 벽엔 화려한 색감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다양한 체위를 선보이는 남녀의 그림들이었다.
용여홍은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장목화는 몹시도 무덤덤했다.
“그림 한번 적나라하네.”
그때, 한 경비원이 몇 발짝 앞으로 다가와 레드리버어로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저희 가게에서는 여성 고객님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성건우가 턱을 살짝 치켜들며 거만한 자세로 대꾸했다.
“너하고는 할 이야기 없으니, 사장이나 불러와.”
경비원은 뒤에 자리한 게네바를 힐끔 보곤 순순히 소굴로 들어갔다.
1, 2분 정도 지났을 무렵, 굉장히 뚱뚱한 남자가 조금 전 그 경호원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왔다.
키가 겨우 170센티미터 조금 넘을까 말까 한 남자는 역시 검은 셔츠 차림이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차려입었다기보단 걸치다시피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밤색 짧은 머리칼은 살짝 구불거렸고, 입가엔 무성한 수염이 나 있으며, 눈두덩이는 그리 튀지 않을 정도로 약간 불룩했다.
그리고 남자의 오른손엔 연합202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여기 사장입니까?”
성건우가 예의 바르게 반문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사업 파트너들이 있긴 하지만.”
“이름이?”
성건우가 웃으며 물었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거입니다.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성건우는 변함없는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오거 씨, 제가 찾아온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사업은 좋지 않아요. 차라리 시간을 들여 직원들에게 채소 자르는 법과 양념장 만드는 법을 가르친 후에, 훠궈 식당을 차리는 게 어떻습니까?”
오거는 왼손을 들어 귀를 후비적거렸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농담이지?’
오거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원래는 이들이 난동을 부리려는 줄 알고 돈을 달라면 돈 몇 푼 쥐여주고 보내버릴 작정이었다. 정 안 되겠으면 기회를 봐서 도망친 뒤 더 많은 사람을 모으려는 생각도 했다. 로봇에 대적할 팀을 고용해 복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눈앞에 자리한 이들은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오거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돈 주고 사 온 여자들이야. 내가 내 노예들한테 뭘 시키든 그쪽이 신경 쓸 바가 아닌 것 같은데? 똑바로 말해라, 너희를 보낸 게 누구냐?”
그 사이 입구에 서 있던 네 경호원은 늑대소굴 내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10여 초 후, 경량형 기관단총을 쥔 네다섯 명의 경호원이 구조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 역시 같은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늑대소굴의 창녀들도 이젠 입구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중 일부는 멍하니 이쪽으로 모여들어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나같이 얇은 옷을 걸친 이 애쉬랜드인들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걸려 있지 않았다. 다들 하나같이 눈빛도 공허했다. 10대나 2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내 성건우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며 오거 무리를 쳐다보았다.
“봐봐. 저 여자애들은 여기서 생활하고, 너희도 여기서 살아. 저 여자애들은 인간이고, 너희들도 인간이지. 그러니까⋯⋯.”
오거와 여덟 경호원은 돌연 멍한 표정을 드러내며, 늑대소굴의 접대 홀로, 그곳에 있던 애쉬랜드인 창녀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우!”
꼭 짝을 찾는 수컷 늑대 같았다.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경호원 딱 한 명만 얼떨떨하게 있을 뿐이었다.
애쉬랜드인 창녀들은 방금 성건우가 했던 레드리버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항상 험악하기만 했던 사장과 경호원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점차 활력을 되찾는 눈빛들과 뻣뻣했던 얼굴들에 놀란 표정이 드리웠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보며 애쉬랜드어로 조용히 말했다.
“상황 수습할 방법은 생각해 둔 거지?”
성건우는 일단 남아 있는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
“따라와.”
그리고 늑대소굴 안으로 걸어가며 장목화를 향해 살짝 웃었다.
“방금 말했잖아요. 여길 훠궈 식당이나 다른 식당으로 바꾸겠다고.”
‘정말 그런 영업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
장목화는 이번엔 성건우의 생각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알아들은 애쉬랜드인 창녀 하나가 다급히 앞으로 몇 발짝 나섰다. 눈빛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 당신들, 우리를 구해주러 온 거야?”
여자는 얼굴도 나름 깨끗하고 생긴 것도 꽤 예쁘장한 편이었다. 다만 조금 피곤한 기색이 짙어 보였다.
“아니, 당신들이랑 합작하러 온 거야. 훠궈 식당을 운영해보는 거 어때? 다른 식당도 괜찮고.”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장목화는 순간 얼굴을 감싸 쥐고 싶었지만, 얼른 화제부터 돌렸다.
“이름이 어떻게 돼?”
조금 전 그 애쉬랜드인 창녀가 빠르게 답했다.
“소나영이야.”
이제 서서히 다른 애쉬랜드 창녀들도 모여들었다. 활력을 찾은 눈빛도 더 이상 공허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