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제의 (1)
전과 비슷한 속도로 나아가던 지프는 이제 사거리에 이르렀다.
백새벽이 왼쪽으로 핸들을 꺾자, 성건우도 드디어 창밖으로 아비아 일행을 보게 되었다.
“경호원들이 전부 못생겼다는 게 문제인가요?”
“야, 그게 무슨 논리야?”
용여홍이 멍하니 되물었다.
성건우는 진지한 분석을 내놓았다.
“내가 만약 아비아라면 진짜 실력이 좋은 몇몇은 제외하고, 나머지는 잘생긴 사람을 고를 것 같은데. 눈 호강이라도 해야지.”
용여홍은 그 말에 반박하고 싶어도 너무 완벽한 논리라 덧댈 말이 없었다.
그때 게네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골라 줬고, 아비아에겐 거절할 권리가 없었을 수도 있지.”
용여홍이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 그래.”
게네바라면 성건우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방향을 튼 차가 라운드힐 스트리트로부터 멀어졌다.
장목화는 룸미러를 바라보며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의 생물 전기 신호, 고도가 똑같아. 표정도 아주 비슷하고. 자기들이 맡은 일에 딱히 집중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
“그럼⋯⋯.”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도 혼란스러워 한동안 머리를 굴릴 수가 없었다. 그저 공포스러운 이야기만 연상될 뿐이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양팔을 뻗고 몸을 살짝 젖혀 차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을까요?”
‘……!’
그제야 용여홍도 깨달음을 얻었다.
“환각! 방금 우리는 환각을 경험한 건가요?”
게나바의 눈에서 붉은빛이 몇 번 번득였다.
“타르난의 그 고등 무심자와 상당히 비슷하군.”
“실제와 흡사한 정도도 거의 비슷했어요.”
백새벽도 자신이 느낀 바를 밝혔다. 차 방향이 틀어졌을 때, 그녀 역시 아비아 일행을 보았었다.
이윽고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던 수확 아닌가? 적어도 환각 영역의 심령의 복도 급 강자가 어딘가에 숨어 아비아를 보호 중이란 걸 알았잖아. 낯선 사람인 우리를 환각으로 떠보려고 했지만, 다행히 우린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고.”
성건우가 잔뜩 흥분해서 말을 받았다.
“그가 혹시 주 관주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장목화는 바로 찬물을 끼얹었다.
“모르겠지. 신룡교는 주로 애쉬랜드인들이 모인 곳에서 유행하잖아. 회사에서 준 자료에도 퍼스트 시티에 신룡교 활동 흔적이 있다는 내용은 없었어.”
“주 관주는 우리한테 돼지고기를 빚졌어요.”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는 잠깐 고개를 내저었다.
“주 관주가 빚진 건 아니지. 어쨌든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건 퍼스트 시티가 심령의 복도 급 강자까지 붙여가며 아비아와 마커스를 아주 치밀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거야.”
단단히 무장한 사람도 각성자에 비할 순 없었다. 물론 각성자의 심리가 어마어마한 파괴를 일으킬 정도로 불안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이제 크라운 스트리트로 가나요?”
용여홍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물었다.
구조팀의 또 다른 목표인 마커스는 크라운 스트리트 57호에 살았다.
“아니, 라운드힐 스트리트를 구경했다가 바로 크라운 스트리트를 구경하는 건 너무 공교롭잖아. 의심을 살 수도 있어. 그건 다음에 다른 차를 타고 두세 명씩 조를 이뤄서 가보자.”
장목화는 일찍이 이러한 결단을 내려둔 듯했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지 않기 위해 백새벽은 골든애플, 레드울프 구역 다른 거리로 차를 좀 몰았다가, 점심 무렵이 돼서야 휴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 * *
한참 점심때인데 어쩐지 거리 행인이 너무 적은 데다, 여러 상점은 다 문이 닫혀있었다. 장목화는 여관 사장 휴고에게 직접 이를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왜 이렇게 조용하죠?”
휴고가 담담하게 답했다.
“무심병이 워낙 맹렬한 기세로 발병하고 있으니 그렇지. 상당수가 더는 여기 못 있겠다고 다른 곳의 친척이나 친구네 집에서 지내고 있어. 다들 알겠지만 보통 무심병은 한동안, 일정 구역 안에서만 폭발적으로 발발히잖아.”
지금 이 구역에 남아 있는 건 갈 데가 없는 이들뿐이었다.
장목화가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하기 전, 성건우가 물었다.
“만약 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달아나 버리면 이번 무심병 발발은 이대로 끝나버릴까요?”
구조팀에서 무심병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장목화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어떤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휴고는 질문한 성건우를 힐긋 보다가 조롱 같은 웃음을 흘렸다.
“다른 구역으로 전염되겠지. 노예를 거느리던 이들이 노예를 남겨두고 다른 곳으로 떠난 건 바로 그 점 때문이야.”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인 후 계속 질문했다.
“그럼 당신은 왜 떠나지 않죠? 무심병에 전염될까 겁나지 않나요?”
휴고의 눈빛이 좀 이상해지는가 싶더니 곧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만사에 무관심한 말투로 답했다.
“난 언제나 운이 좋은 편이거든.”
성건우는 그가 불쌍하다는 눈빛을 했다.
“그건 당신이 아직⋯⋯.”
장목화가 급히 성건우의 왼팔을 잡고 말을 끊었다. 뒤이어 고용주가 이번 무심병 발병 사례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면서, 휴고에게 이 부근을 담당하는 치안관 한 명을 소개해달라고 했다.
“10오레이, 자료는 내일 줄게.”
휴고는 직접 가격을 제시했다.
“좋습니다.”
장목화는 곧장 10오레이를 내민 뒤, 팀원들과 202호로 돌아갔다.
* * *
문가에 선 용여홍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팀장님, 저희도 다른 구역으로 이동해야 할까요?”
팀 내 누구라도 무심병에 걸린다면 결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고 누가 언제 무심병에 걸릴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었다.
장목화는 용여홍을 가만히 쳐다볼 뿐,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용여홍은 조금 불안해졌다. 자신이 너무 겁쟁이처럼 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로부터 몇 초 후,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무심병이 아니더라도 다른 구역이나 그린올리브 구역의 더 혼란스러운 거리에 거처 한두 개 정도 더 빌려두려고 했어. 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놓는 법이잖아. 지금은 비밀 작전 수행 중이니 더 많이 준비해야지.”
“그렇죠.”
용여홍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목화는 곧장 백새벽을 돌아보았다.
“전에 포기한 선택지를 다시 꺼내야겠어.”
“네.”
백새벽도 자신이라고 무심병에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구조팀에서 유일하게 이런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건 지능 로봇 게네바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사실 방법이 없었다. 무심자가 나타났다 한들 결국은 지하 빌딩에 있어야 하니,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때, 성건우가 한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선사들도 무심병에 걸리나요?”
그가 말하는 선사란 기계 승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장목화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게네바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답했다.
“관련 기록은 없다. 답은 그 내부에만 알려져 있는지도 모르지.”
“그들은 어떻게 보면 무심병에 걸린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용여홍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아직도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발광하던 정법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듯했다.
* * *
구조팀은 가진 돈으로 그린올리브 구역의 혼잡한 거리와 레드울프 구역에 방을 하나씩 빌렸다.
또한 방을 빌릴 때는 직접 나서지 않고 행인에게 돈을 주고 그에게 대신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이 일을 마친 후엔, 회색 SUV를 타고 퍼스트 시티 남문으로 향했다. SUV를 택한 건 어제 성건우와 장목화가 지프를 타고 조씨 가문 장원 주위를 관찰했기 때문이었다.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차를 바꿔야 했다.
오른 뒷좌석에 앉은 성건우는 이동 중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기원의 바다로 향하는 의식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네 번째 의식 섬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덧 이렇게 짬이 날 때면 기원의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습관이 돼 있었다.
* * *
미약한 빛이 번득이는 바다.
성건우는 여전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해안선으로 헤엄쳤다.
눈을 감고, 귀도 막은 채 아무렇게나 나아가며 아홉 명으로 분열해 각자 한 방향씩 탐색하기도 했지만, 섬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정신이 약간 피곤해졌을 때쯤 다시 하나로 합쳐진 성건우는 허상의 물결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생각에 잠긴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마 나한테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건가? 아니야, 나도 무서운 게 있어. 난 동료를 잃는 게 두려워⋯⋯.”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기원의 바다로 울려 퍼졌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크지 않은 섬 하나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섬의 중앙에서도 어렴풋한 금색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흥분한 성건우는 자신의 몸에 팔 여덟 쌍과 다리 열여섯 개를 더 만든 뒤, 그 섬을 향해 빠르게 헤엄쳐갔다.
곧 목적지에 도착한 그가 단번에 섬 위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늘렸던 여분의 팔다리도 거둬들였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성건우는 이 크지 않은 섬 중앙에 우뚝 솟은, 지하로 이어진 듯한 금색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엘리베이터 문은 꼭 닫혀있었고, 밖에는 한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회색 제복을 입은 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은 남자, 검고 곧은 눈썹과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수려한 이목구비의 미남.
다름 아닌 성건우가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성건우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안녕, 네가 기원의 바다 최후 관문이겠지?”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엷게 웃었다.
“아직도 두려움을 안고 있구나. 동료를 잃을까 봐 무서워하고 있어. 내가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줄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뭔데?”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네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게 하는 거야. 네 인격을 다 분리해서 그 동료들로 만드는 거지. 그럼 넌 영원히 친구를 잃지 않을 수 있어. 그런 아프고 강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일도 없을 거야.”
성건우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돌연 섬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원의 바다에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온 의식 세계가 당장이라도 다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다. 성건우는 너무 놀라 순간 눈을 번쩍 떴다.
* * *
성건우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성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열심히 흔들어 깨우는 게네바를 발견했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어.”
장목화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순간 정신을 차린 성건우는 곧장 하차해 땅을 똑바로 밟고 섰다.
“네 번째 섬, 찾았어요.”
“어?”
제대로 듣지 못한 듯 장목화가 한 번 더 되물었다.
성건우가 다시 말을 반복하자, 장목화도 이제야 관심을 기울였다.
“네 번째 섬? 거기 뭐가 있던데?”
용여홍과 백새벽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또 다른 저랑 엘리베이터요.”
“또 다른 너.”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달았다.
“그럼 너 자신을 찾은 거잖아? 그것만 받아들이면 이제 심령의 복도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냐?”
“음, 아직은 수용할 수 없어요. 문제가 좀 있는 것 같거든요. 그것 역시도 저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무슨 문제?”
용여홍이 물었다.
성건우는 이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성건우가 일종의 두려움이랑 하나로 합쳐져 있어.”
“어떤 두려움?”
장목화가 예리하게 캐물었다.
성건우는 살짝 웃음을 보였다.
“동료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요. 또 다른 제가 동료가 없어져야만 그 두려움도 사라진대요. 동료들을 다 죽인 후에 표본으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던데⋯⋯.”
이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땐, 성건우는 오직 용여홍만 똑바로 쳐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