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활동 경비
레드울프 구역 블리스 스트리트에 자리한, 실버캔들 카페.
저녁 7시 40분, 이미 어둑해진 하늘 아래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각자 흩어져 감시에 돌입했다. 그리고 장목화와 성건우는 유리가 끼워진 묵직한 대문을 밀고 카페로 들어갔다.
테이블 표면이 기름으로 살짝 끈적이는 걸 보면 이곳은 식당도 겸하는 듯했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하고 창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인들이 ‘부샤르’라 부르는 커피 두 잔이 나왔다.
먼저 향부터 살짝 음미하던 장목화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렇게 맛이 풍부하진 않네. 그냥저냥이야, 너무 옅고.”
이것보단 게네바 집에서 먹었던 그 커피가 훨씬 나았던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긴 우유와 커피가 비교적 비싼 편이라, 추가하고 싶으면 별도로 돈을 내야 했다. 때로는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성건우 역시 잔을 들어 두 모금 정도를 마셨다.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네요.”
“여긴 중하층 주민들을 겨냥한 카페인가 봐. 애쉬랜드 전역을 통틀어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땅엔 이미 곡식이 자라고 있을 텐데, 커피콩은 얼마나 많이 기르고, 인스턴트 커피는 얼마나 많이 만들 수 있겠어?”
두 사람이 평범한 손님처럼 대화를 나누던 그때, 한 사람이 뒤쪽 테이블로 다가와 장목화와 성건우를 등진 채 앉았다. 그 테이블은 벽에 붙어있어서 바깥 행인들 쪽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약 1분 정도 지났을 무렵, 장목화와 성건우 옆 테이블에 앉은 그 사람이 갑자기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가리발디입니다.”
그는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었다.
흠칫 놀란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내가 귀가 원체 안 좋잖아.”
장목화가 금속 와우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가리발디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토록 정성껏 준비한 비밀스러운 만남에서 처음부터 극복 불가능한 난관을 맞닥뜨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까닭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등지고 앉아 대화하려면 당연히 갖춰야 하는 전제가 있었다. 최소한 상대가 말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성건우는 음량을 조절해 그가 했던 말을 반복해주었다.
“저는 가리발디입니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한숨을 토했다.
가리발디는 회사 정보원의 코드명이었다.
“전 회사 구조팀 팀장입니다. 목표와 관련된 정보는 다 수집했습니다.”
청력이 좋지 않은 장목화는 다른 손님에게 들리지 않게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 역시 애쉬랜드어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지나치게 낮췄는지 이번에는 가리발디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성건우는 곧장 통역사 역할을 자청했다. 꽤 즐거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제야 장목화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가리발디가 빠르게 답했다.
“두 목표의 상황은 대략 파악해 이미 자료로 작성해뒀습니다. 또 회사에서는 여러분이 목표 주변에 있는 이들을 쉽게 매수할 수 있도록 임무 경비로 1,000오레이를 준비했습니다.”
‘씀씀이 한번 크네. 퍼스트 시티에서 정보망을 갖추는 데 비용이 꽤 드는 모양이네.’
성건우가 전해준 말에, 장목화는 기쁨과 충격을 반반씩 느꼈다. 그렇지만 그 돈도 군용 외골격 장치와 기계 팔을 사기엔 한참 부족했다.
가리발디의 말이 이어졌다.
“또 뭐가 필요하십니까?”
장목화는 잠시 성건우를 바라보며 몇 초간 침묵하다 답했다.
“반 지성교 원로원 장로 소르스 암살 사건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어, 저희는 위드 시티에서 반 지성교와 충돌한 적이 있고, 퍼스트 시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거든요. 일찍 대비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가리발디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성건우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장목화가 잠시 또 생각하다가 물었다.
“최근 퍼스트 시티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진 않았습니까?”
가리발디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특별한 사건이랄 건 없었습니다. 굳이 골라야 한다면 두 건 정도? 하나는 북쪽 산기슭에서 기이한 흰색 늑대가 출몰한 사건입니다. 해당 사건은 사냥꾼 길드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하나는 원로원에 새로 들어온 구성원 가이우스가 주민들 집회에 대해 여러 차례 극단적인 의견을 표현했다는 겁니다. 이에 여러 원로가 불만스러워했고, 그중엔 감찰관 알렉산더도 포함돼 있습니다.”
원로원 구성원은 장로, 원로, 의원, 혹은 장인이라고 불렸다.
퍼스트 시티엔 명목상 집정관, 감찰관, 그리고 국토안전총장까지 3대 거두가 존재했다. 3대 거두는 모두 원로원에서 투표로 선출하며 이 투표는 4년마다 한 번씩 이루어졌다. 그중 국토안전총장은 총사령관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은 집정관 베울리스가 겸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가리발디의 답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반복했다. 듣고 있던 가리발디는 눈썹을 살짝 구겼다.
‘그냥 뜻만 전하면 되지, 왜 말투까지 똑같이 따라 하는 거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는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다른 질문은 없습니다. 나중에 또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연락드리죠.”
“돕다니요, 이건 제 일입니다. 협력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겠네요. 물건은 테이블 위에 놓고 가겠습니다. 잊지 마세요.”
가리발디는 겸손하게 대꾸한 뒤 곧장 자리를 떴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다른 손님들에게 들키지 않고자 잠시 공백을 뒀다가 잠시 후에야 고개를 틀어 뒤쪽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크지 않은 회색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바깥쪽에 앉은 성건우는 아주 여유롭게 그 가방을 들어 품에 숨겼다.
그와 동시에 성건우와 장목화는 가리발디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175센티미터보다 작아 보이는 그는 낡고 검은 얇은 코트을 입고서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왼손으로 모자를 꾹 누르며 얼굴을 가리기 바빴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계속해서 그를 빤히 응시하기보다 빠르게 자세를 고쳐 앉아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10분 정도 더 머무른 뒤에야 천천히 일어나 카페 부근에 세워둔 지프에 올랐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둘이 떠난 후에도 조금 더 기다렸다가 주변에 다른 감시자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속속들이 회색 SUV에 올랐다.
* * *
휴고 여관, 202호.
장목화는 자료를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마커스는 격투를 상당히 좋아한다네⋯⋯.”
퍼스트 시티에 유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은 포로와 노예 중 강자를 선발해 서로를 죽여 최후 승리자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중 승리자는 자유를 얻고 원로원 호위대 일원이 되거나 귀족의 사병이 되었다.
용여홍도 자신이 보고 있던 내용을 공유했다.
“아비아는 목욕에 미쳐있대요. 집 절반을 욕실로 만들었다는데요.”
아비아의 집은 골든애플 구역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였다.
“부럽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화장실 근처에 이른 순간, 주변 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약하게 닫혀있던 나무 문도 어느새 꽉 잠긴 상태였다.
뒤이어 문 안쪽에선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헉……, 헉…….”
야수가 숨을 헐떡이는 것 같은, 슬피 우는 것 같기도 한, 낮게 포효하는 듯한 그 기묘한 소리. 장목화는 일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녀는 황급히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방 안은 이미 새카맸다. 그대로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자신이 현재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걸 깨달았다.
방 전체엔 커튼을 뚫고 들어온 미약한 달빛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꿈이었구나.’
구조팀이 저녁에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던 상황과 장목화와 성건우가 오후에 겪었던 일이 혼재된 꿈이었다.
이때, 뭔가를 느낀 장목화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홱 틀었다.
그녀의 시야에 이미 일어나 앉아 있는 성건우가 들어왔다. 어둠에 자리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팀장님도 깨셨어요?”
장목화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되새겼다.
“응, 오후에 있었던 일이 꿈에 나왔어. 여관 사장 방에서 기이한 소리를 들었던 그 일 말이야. 그래서 놀라서 깼어.”
성건우는 덤덤한 빛으로 그녀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저도요.”
장목화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이게 너무 공교롭다는 말을 딱히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었다.
같은 일을 겪은 두 사람이 비슷한 꿈을 꾸는 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간에 꿈을 꿨다가 거의 비슷한 시간에 깨어나는 것에는 분명 외부 요인이 있을 터였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는 문 쪽을 바라보다 망설임 끝에 입을 뗐다.
“사장이 한 짓일까? 꿈 영역 각성자라 우리가 오후에 뭔가 발견했는지 확인하려고? 그가 정말 각성자라면 우리가 당시에 했던 위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거야. 문 근처로 갔다가 홀로 돌아온 우리 존재를 감지했을 테니까.”
성건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또 갸웃거렸다.
“그럼 우리한테 직접 물어봤어도 됐을 텐데. 전 거짓말을 안 하니까요.”
‘……그럼 난 한다는 소리야?’
실제로 반박은 못 하고 눈동자만 굴리던 장목화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냥 자자. 여관 사장은 우리가 이상한 소리만 들었지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모를 거라 믿고 있을 거야.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면 돼.”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마,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이게 바로 휴고 여관에서 관습처럼 이어져 오는 묵약이었다.
성건우는 다시 문 쪽을 보며 매우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기 사장은 혹시 우딕을 알고 있을까요?”
“같은 꿈 영역 각성자라도 꼭 같은 달지기를 믿는다고 볼 순 없지. 설령 같은 달지기를 믿고 있다 해도 같은 교파에 몸담고 있으리라 볼 수도 없고. 같은 달지기를 믿는다 한들, 경문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교파도 여럿이잖아.”
장목화는 간단히 대꾸한 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는 한숨을 한번 쉬고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이날 밤, 더 이상은 그 기이한 꿈도, 이상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오전.
구조팀은 빵 위주로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장목화는 간밤의 일을 간단히 전해주었다. 자신이 한 추측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용여홍은 여태 여러 각성자를 만난 데다 심지어 디마르코처럼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능력을 쓰는 강자를 마주하기도 했던 터라, 크게 놀라지도, 그렇게 겁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짧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과연 퍼스트 시티답네요. 평범한 여관 주인도 각성자일 수 있다니.”
장목화는 이 틈을 타 팀원 교육에 나섰다.
“그러니까 너무 우쭐거리면 안 돼. 우리가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냈다고 해서 둥둥 떠다니면 안 된다고.”
이내 게네바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둥 떠다닌다는 게 무슨 말이지?”
“신중하고 견실하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백새벽이 답했다.
성건우는 백새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여관 사장이 이 구역을 담당하는 치안관과 친하다고 했지? 어쩌다 그렇게 친해졌는지는 알고 있어?”
“안 물어봤어.”
백새벽의 답은 간결했다. 그녀는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
성건우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잔뜩 흥분해서 추리를 시작했다.
“매일 밤 그 치안관들 꿈에 들어가 각종 광경을 만들어내면서 그들과 친근감을 쌓은 게 아닐까? 그 치안관들은 꿈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사람을 점점 친근하게 느끼다가 서서히 친구가 된 거지.”
“약간 변태 같은데⋯⋯.”
용여홍이 흠칫하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구세계 콘텐츠에 나오는 어느 사랑 이야기를 살짝 바꾼 거겠지.”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사랑이라고 해도, 계속 변태 같은데요.”
꾸준히 난색을 표하는 친구를 보고, 성건우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일률적인가? 약간 변태 같은 사랑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다시 또 시작된 성건우의 헛소리에, 장목화는 그냥 시간을 확인한 뒤 테이블 근처로 가 팀의 무선 통신기를 조작했다. 조씨 가문의 가주 조기정에게 어제 조사로 얻은 수확을 전한 뒤 후속 지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구조팀은 이번 조사를 위해 특별히 설정한 비밀번호를 썼다. 다른 연락과 구분하기 위한 용도로, 연락 시간도 오전 8~9시 사이로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