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솔직한 만남
1층 남탕으로 온 성건우는 간단히 샤워한 뒤 허리에 흰 수건을 둘렀다.
한증막 문을 열자마자, 부연 김이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그 자욱한 증기 사이로 구석에 앉은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역시 성건우처럼 홀딱 벗은 채 허리춤에 목욕 수건만 두르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 상대의 옆에 앉은 성건우는 빨갛게 달아오른 돌과 그 위에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요. 당신도 헐벗었고, 저도 헐벗었네요. 당신은 한증막에 앉아있고 저도 한증막에 들어와 있어요. 그러니까⋯⋯.”
멍한 표정을 드러낸 남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순간 반색을 했다.
“자네도 왔나?”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성건우는 이 틈을 타 몇 마디 한담을 나눈 끝에 상대가 조수인임을 확인했다. 동시에 그와 죽고 못 사는 형제가 되었다.
“듣자 하니, 장원에 낯선 사람들이 많이 왔다던데?”
성건우가 넌지시 건넨 물음에, 조수인이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아닌데?”
조수인의 눈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리던 성건우가 다시 또 물었다.
“꼭 낯선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최근 몇 달간 외부인도 안 왔어?”
“응,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일상 용품 파는 상인들 말곤.”
재차 고개를 젓던 조수인이 조금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근데 그건 왜 묻는데?”
“가십은 누구나 다 좋아하잖아.”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뭐? 가십?”
조수인은 그 단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성건우는 영락없는 애쉬랜드인인데다 대화도 다 애쉬랜드어로 나눴지만, 조수인 입장에선 너무 생소한 말이었다.
성건우가 막 그 뜻을 설명하려는데, 조수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이따 나가서 얘기하자.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
사실 이렇게 넓지도 않은 공간을 가득 채운 수증기 때문에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높은 온도가 몸의 각 부위를 압박하며 어지럼증과 답답증을 일으켰다. 이곳은 정말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최악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성건우도 바로 입을 다물고, 가끔 물을 한 바가지씩 퍼서 빨갛게 달아오른 돌 위에 끼얹었다.
치직- 치직-
조용한 공간엔 조용한 소음만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한증막에서 누가 더 오래 버티나 시합이라도 하는 듯했다.
한참 뒤, 이마 땀을 훔쳐내던 조수인이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안 되겠어. 더 버텼다간 쓰러질 것 같아.”
성건우가 웃었다.
“그럼 나가자.”
조수인은 곧장 한증막을 나가 멀지 않은 곳의 온탕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성건우는 상대를 따라 허리에 두른 수건을 풀고 탕에 몸을 푹 담갔다. 조금 전 몸 밖으로 배출된 모든 게 씻겨 내려갔다.
1~2분 후, 조수인은 또 벌떡 일어나 옆쪽 냉탕에 들어갔다.
“히익!”
너무 찬 온도에 조수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하지만 점차 그 온도에 적응한 듯, 얼굴 근육이 차차 풀어졌다. 전보다 정신도 훨씬 또렷해 보였다.
“친구, 이 애쉬랜드엔 오늘뿐이야, 내일 같은 건 없다고. 그러니까 누려야 할 건 최대한 지금 누려야 해.”
조수인이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건우 역시 냉탕에 몸을 담근 채 모든 게 신기한 듯 좌우를 둘러봤다.
“오후에 장원으로 돌아가야 해?”
조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시간은 충분해. 낮잠 좀 자다가 종업원이 깨우면 샤워하고, 점심 먹고, 나가서 쇼핑도 해야지.”
짝짝짝!
성건우가 그의 계획에 박수를 보내며, 동시에 물 아래쪽을 힐긋 보았다.
조수인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다시 온탕으로 넘어갔다. 그러고는 몇 분 지나지도 않아 황급히 일어나선 목욕 수건으로 몸을 감쌌다.
샤워 후 가운으로 갈아입은 성건우는 그제야 조씨 가문 장원에서 일하는 집사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나이는 40대 정도, 마른 편에 머리숱이 적고, 눈두덩이가 좀 불룩했다.
* * *
남탕을 나온 두 사람은 이제 휴게실로 가 리클라이너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웠다. 몸에도 사이좋게 얇은 이불 하나씩을 덮고 있었다.
대화 중 조수인의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 곧 그가 고롱고롱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성건우는 고개를 돌리고서 그를 바라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목욕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곧 주머니에선 청록빛을 발하는 야명주가 나왔다.
그 야명주를 쥔 성건우의 눈동자가 점차 어두워졌다.
곧이어 디마르코의 숙명통이 깨어났다.
숙명통에 영향을 받은 조수인의 기원의 바다에, 하얀 목욕 가운을 입은 성건우의 인영이 떠올랐다.
미약한 빛을 번득이는 바다 위로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보일 듯 말 듯 섬들을 가렸다. 하지만 조수인의 의식은 구현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뭇별 홀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일반인의 심령 세계였다.
성건우는 곧장 아홉으로 나뉘어 모조리 허공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뒤이어 숙명통 영향을 받은 기원의 바다에, 수많은 파도가 높이 치솟아 여러 화면을 드러냈다.
성건우들은 구역을 나눠, 최근 몇 달간 조수인의 기억을 샅샅이 살폈다.
몇 분 후, 작은 스피커를 쥐고 있던 성건우가 몹시 기뻐하며 외쳤다.
“찾았다!”
동시에 그는 찾아낸 화면을 가장 크게 확대했다.
책장과 책상이 놓인 방 안에, 조수인이 조이덕과 닮았지만 뚱뚱하지는 않은 한 청년을 향해 뭔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 청년 뒤쪽 의자엔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에 평범한 생김새의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머지 경호원들은 모두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상당히 특수한 위치로 보였다.
“왜 저 사람한테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느 부분에서 이게 단서일 거라고 판단했어?”
“각성자를 고용하는 데 많은 돈을 들일 수 없었던 건가?”
나머지 성건우들이 각각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소형 스피커를 쥔 성건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팀장님한테 배운 게 있지. 대담하게 가정하고, 조심스레 실증을 찾자. 저 사람이 좀 특이해 보이니까 저 사람이 포함된 조수인의 모든 기억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고.”
여덟 성건우는 똘똘 뭉쳐, 머지않아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포함된 모든 기억을 찾아냈다.
남자는 장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하인의 아들로, 조기정의 둘째 아들 조이한의 호감을 얻어 그의 하인이 돼 있었다.
하지만 한 성건우가 예리하게 한 사실을 밝혀냈다.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남자와 그의 부모는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그가 조이한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이유는 다시 미궁으로 빠졌다.
그 후, 성건우들은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의 남자를 한동안 관찰한 끝에 그의 낯빛이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주 초췌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동시에 성건우들은 딱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짜 신부!’
* * *
퍼스트 시티에서 차 한 대쯤 마련하는 거야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최근 몇 년 안에 생산된 신차를, 혹은 오래 이용할 수 있는 튼튼한 차를 구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차든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진 돈이 없고, 범죄도 저지를 수 없으며, 시간적 제한까지 따른다면 일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게 지금 구조팀이 처한 현실이었다. 용여홍과 게네바는 이 난관을 어디에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반면, 조장은 달랐다.
10시가 지나서야 조원들을 데리고 나온 백새벽은 몇 번이나 방향을 틀어가며 이동한 끝에 그린올리브 구역 내 레드리버 강변 어딘가에 이르렀다.
백새벽은 퍼스트 시티를 꽤 잘 아는, 매우 믿음직한 요원이었다.
이곳까진 걸어서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휴고 여관과 상당히 거리가 가까운 곳이었다.
건물은 매우 낡은 편이었고, 길은 더 협소했다.
어느 골목길에선 양팔을 뻗으면 건물 외벽에 손이 닿았고, 고개를 들면 하늘을 조각조각 가르는 빽빽한 전선이 보였다.
이동하는 도중 가장 많이 본 건 꾀죄죄한 아이들이었다. 어른들은 공장에 출근하거나 다른 일로 바빠서, 이 시간에 여기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에 탁 트인 공간과 그곳에 세워진 수많은 헌차가 나타났다. 용여홍은 바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여기가 차를 파는 곳이야?”
유적 사냥꾼들이 폐허 도시에서 찾은 차를 퍼스트 시티로 끌고 오면, 최종 구매자에게 넘길 때까지 기다리고 자시고 할 여유는 없었다. 곧장 헌차 상인에게 넘기는 게 보통의 수순이었다.
물론 가격으로 따지면 직거래보다 큰 손해를 보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아낄 수는 있었다. 유적 사냥꾼 대부분이 오늘 뭔가를 팔아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내일 당장 굶어야 하는 처지였다.
“맞아.”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린 돈이 얼마 없잖아.”
용여홍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새벽은 어깨에 자루를 멘 게네바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여긴 차를 빌려주기도 해.”
“빌려준다고?”
용여홍이 놀란 듯 되물었다.
‘뜯어갈 수 없는 집도 아닌 차를 빌려줘? 보통 상인은 구세계 각종 기술 수단이 없어서 빌려준 차를 그대로 떼일까 겁을 낼 텐데.’
이윽고 주차장 옆 허름한 건물로 들어간 셋은 카운터 뒤에서 한담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 살짝 구불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칼들도 한가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레드코스트인이었다.
곧이어 그들도 셋을 발견하고 방문 목적을 물었다.
“렌트하러 왔어.”
백새벽이 답했다.
그중 가장 장신이지만, 용여홍보단 작은 레드코스트인이 말했다.
“일단 차부터 골라. 가격은 거기 맞춰서 알려줄게. 그리고 담보로 뭘 맡겨야 해. 안 그럼 너희가 그대로 차 가지고 날라버리면 우리만 손해잖아.”
백새벽은 아무 말 없이 게네바를 가리켰다.
순간 용여홍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겐을 담보로 삼겠다고?’
하지만 게네바는 덤덤히 메고 있던 자루를 앞에 내려놓더니, 개인용 사신 바주카포를 꺼냈다.
“이거면 되겠어?”
백새벽이 물었다.
역시 게네바를 담보로 삼는다는 생각을 한 건 용여홍밖에 없었다.
레드코스트인은 동료들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런 중무기는 거의 구세계 헌차와 가치가 비슷했다.
“잃어버리면 안 돼. 우리한테 그거랑 비슷한 무기가 더 있어. 나중에 곧 다른 물건이랑 담보를 바꿀 거야.”
백새벽의 차분한 경고에, 레드코스트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이내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필요한 차량을 골랐다. 곳곳에 고친 흔적이 또렷이 남은, 각진 형태의 회색 SUV였다.
하루당 2오레이를 내겠다는 계약을 마친 뒤, 백새벽은 직접 운전석에 앉아 휴고 여관으로 차를 몰았다.
* * *
걸어서 왔던 길은 너무 협소해 차가 다닐 수 없었다.
그렇게 우회로를 타던 도중, 퍼스트 시티 서쪽 항구를 지나쳤다.
막 강 상, 하류에서 도착한 배들이 정박해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용여홍은 항구 근처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긴 포효를 들었다.
“아우우=!”
늑대의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날카롭지도, 매섭지도 않았지만, 왠지 모를 슬픔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든 소리였다.
“뭐지?”
용여홍은 가르침을 청하듯 고개를 틀어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백새벽은 전방을 응시한 채 대꾸했다.
“애쉬랜드인 창녀.”
“뭐?”
용여홍과 게네바는 그 단어와 조금 전 포효를 전혀 연결 짓지 못했다.
그러자 백새벽이 계속 앞으로 뻗은 길 끝만 응시하며 덤덤히 설명했다.
“노예가 돼서 윤락업소에 팔려 온 사람들이야. 근데 누구도 저 사람들한테 레드리버어를 가르쳐주지 않아서, 암컷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거야. 근처에 지나다니는 행인이나 항구 선원들한테 호객행위를 하는 거지. 퍼스트 시티에서는 그런 여자들을 암늑대라고 불러.”
용여홍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긴 충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