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32화 (332/649)

332화. 목욕탕

구조팀은 리베 스트리트를 거닐며 천천히 레드울프 쪽으로 향했다.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많은 이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다들 움직임은 민첩한데, 표정은 다소 굳어있었다.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나 서너 명씩 모여있는 무리도 수시로 보였다. 그러나 다들 구조팀을 슥 훑어보다가도 눈에 붉은빛을 발하는 게네바를 보고서는 시선을 거뒀다.

이제 구조팀의 눈앞에 그린올리브 구역과 레드울프 구역을 분리하는 써드 애비뉴가 막 들어왔다.

그런데 이곳에서 또 한차례 소란이 들려왔다.

장목화 일행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높지 않은 건물 꼭대기에 선 한 인영을 발견했다.

몸이 굽은 인영은 짙은 경계심을 안고 누군가와 대치 중이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인영은 건물 꼭대기에서 그대로 추락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용여홍은 뒤쪽 행인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소리를 들었다.

“네 번째네⋯⋯.”

이제 태양은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떠나고, 퍼스트 시티 곳곳엔 밤을 밝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지난날 써드 애비뉴가 은하수 같았다면, 이곳 퍼스트 시티의 밤빛은 꼭 드문드문 떠오른 별처럼 보였다.

지상 어디든 밤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듯했다.

위드 시티가 고작 한두 곳 정도 시끌벅적했다면, 퍼스트 시티의 밤은 곳곳이 다 시끄러웠다.

도시가 진정한 밤을 맞은 건 거의 자정이 다 됐을 때였다.

구조팀은 네 번째 무심자의 출현에 마음할 기분이 다 사라져서, 대충 한 바퀴만 돈 뒤 휴고 여관으로 돌아가 각자 휴식을 취했다.

* * *

다음 날 오전.

재활 훈련을 마치고 에너지 바와 압축 비스킷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구조팀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흩어져 행동하기로 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퍼스트 시티 내 조 씨 가문 연락책을 찾아 최근 교외 장원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상황에 따라 움직일 예정이었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 조가 맡은 임무는 퍼스트 시티 사냥꾼 길드로 가서 흰 늑대의 능력과 관련한 정보를 파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한명호의 행방에 대해서도 탐색해 보기로 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에 게네바도 함께하고 있으니, 장목화도 백새벽과 용여홍이 안전하리란 생각에 한결 마음을 놓았다.

오늘은 오레이의 두 후손에 대해선 조사하지 않을 계획이라 위험에 봉착할 가능성은 더더욱 낮았다.

회사 정보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장목화는 이미 암호화된 전보로 오늘 저녁에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해두었었다.

이렇게 장목화는 국방색 지프를 끌고 성건우와 함께 레드울프 구역 남쪽의 골든그레인 구역으로 향했다.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 조는 알아서 또 다른 차 한 대를 마련했다.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를 싣고 다니려면 차는 필수였다.

* * *

골든그레인, 올라오 스트리트.

[하비스트 목욕탕]

주위를 관찰하던 장목화가 목욕탕에 딸린 것으로 추정되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였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레드울프 구역 동쪽과 남쪽은 어지간한 유적 사냥꾼이 묵을 수 없었다. 원체 치안이 좋아 유적 사냥꾼들 도움이 필요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의 활동이 적은 곳에선 차량도 확실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애쉬랜드에서 교통수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유적 사냥꾼이었다. 보통 애쉬랜드에 차가 많이 나는 곳은 폐허라, 다들 그곳에서 차를 구해 수리와 개조를 거치곤 했다.

한편 이런 구역에서 거주하는 주민은 유적 사냥꾼보다 더 낫고 안전한 삶을 살긴 해도 차를 얻을 능력도, 극히 드문 신차를 구할 루트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적 사냥꾼들이 폐허에서 끌고 나와 수리한 차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금세 못 쓸 정도로 고장 날 것이라 생각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적 사냥꾼들은 안간힘을 들여 폐허에서 끌고 나온 그 차들을 절대 팔아넘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전체 층수가 3층에 불과한 하비스트 목욕탕은 로비가 흰색 돌기둥으로 떠받쳐져 있었다. 그다지 정교하지 못한 부조로 장식된 기둥이었다.

목욕탕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때였지만, 장목화는 조 선생 합작파트너의 이름을 대며 순조롭게 이곳 사장을 만났다.

사장 란스터는 레드리버인으로 꽤 체격이 좋았다. 키도 성건우보다 약간 작을 뿐이었다. 나이는 30대 정도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과 반짝이는 짙고 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또 몸엔 검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란스터가 성건우, 장목화를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하비스트 목욕탕을 소개하는 말투가 꼭 합작파트너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한증막 네 개, 온탕 여덟 개, 냉탕 네 개가 있습니다. 남탕, 여탕은 서로 구분돼 있는데, 릴렉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적인 종업원도 있지요⋯⋯.”

백새벽의 설명처럼 퍼스트 시티 목욕탕은 윤락업소를 겸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선 란스터가 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매우 친절히 물었다.

“조 의원님이 보냈다고요?”

“그렇습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 시티 내 조 씨 가문 연락책은 총 두 명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공개돼 있고, 한 명은 숨겨져 있었다. 공개된 연락책은 하비스트 목욕탕 맞은편에 자리한 라운 빵집의 사장 라운, 숨겨진 연락책이 바로 란스터였다.

란스터를 아는 건 가주와 미래의 가주, 구체적인 집행자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그저 조기정의 설명이었다. 장목화는 퍼스트 시티 내 조 씨 가문 연락책이 겨우 두 명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장목화와 성건우가 라운이 아닌 란스터를 찾은 건, 2주 전 라운이 분명 장원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란스터가 막 웃으며 한담을 건네려는데,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혹시 용광로 교파의 신도이십니까?”

그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진지했다.

다음 순간 장목화는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얼굴을 감싸기 위해서였다. 성건우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한증막 때문이겠지. 용광로 교파 미사 의식의 핵심이 사우나니까, 목욕탕을 운영하는 사장도 용광로 교파 신도라고 생각한 거 아냐. 하……. 그런 논리면 뭐 퍼스트 시티에서 목욕탕을 운영하는 사장들은 싹 다 용광로 교파 신도냐?’

그런데 막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장목화는 란스터의 낯빛이 급변한 걸 발견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환하게 웃던 그가 정색을 하고 있었다.

순간 장목화도 오른손을 든 그대로 멈춰버렸다.

란스터는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뭐 하자는 겁니까?”

장목화는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속으로 조용히 카운트다운만 했다.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쪽으로 두 걸음 비켜나더니 뭔가에 데이기라도 한 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신의 숨결에 푹 빠지기를.”

그 엄숙한 축복에, 란스터도 저절로 기립해 뜨거운 증기 속 연기처럼 춤을 췄다. 란스터의 눈에는 놀랍고도 기쁜 빛이 어려 있었다.

“당신도 신세계 대문의 신도인 겁니까?”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아직 정식 신도는 아닙니다. 타르난에 있었을 때 세례를 받을 날까지 정해놓았지만, 일이 생기는 바람에 서둘러 떠나야 했거든요.”

성건우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어려 있었다.

“맞아요.”

장목화도 증언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자신의 입교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교우였군요. 제가 달지기를 믿는 걸 어떻게 아시나 했습니다.”

란스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그냥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건데.’

장목화가 속으로만 대꾸한 뒤,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교파에서 당신에게 조 의원을 모시라고 한 건가요?”

란스터가 실소했다.

“아뇨. 이건 그저 일일 뿐입니다. 달지기는 달지기대로 믿고, 저는 또 저 스스로랑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요.”

“그렇군요.”

장목화가 이해한다는 듯 대꾸했다.

그 뒤를 이어 성건우가 물었다.

“이곳에도 성찬이 있나요?”

다시 자리에 앉은 란스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혹여나 들통날까 싶어 따로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구역 신도들은 매주 비밀리에 모여 성찬을 즐기죠.”

잠시 망설이던 성건우가 용기를 냈다.

“혹시 저희도 참석할 수 있을까요?”

성건우는 아예 동료들을 다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 말에 란스터가 웃었다.

“공헌자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라면 가능합니다.”

자꾸만 다른 곳으로 새는 대화를 보고, 장목화가 얼른 나섰다.

“그런데 조 의원의 장원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머뭇거리던 란스터가 답했다.

“제가 고용한 유적 사냥꾼이 말하길, 장원에 매일 낯선 사람들이 드나든답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줬어요. 사진기를 들고 가면 정체가 발각되잖아요? 음, 애초에 사진기가 없기도 하지만.”

서랍을 연 그가 안에서 종이 한 다발을 꺼냈다.

성건우는 잔뜩 흥분해 다가가 종이를 뒤적거리더니 돌연 기쁘게 외쳤다.

“나보다 그림 솜씨가 더 형편없네!”

장목화는 이게 그림 솜씨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초상화 속 인물에는 특징이랄 게 없어서, 이것만으로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란스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접촉했던 그 장원들의 집사는 모두 낯선 사람 같은 건 못 봤다고 말했어요. 제가 진행한 조사는 여기까지입니다.”

‘조기정이 라운을 통해 사람을 시켜 장원을 조사한 모양이네.’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말했다.

“혹시 장원 집사들 몇몇이랑 직접 만나볼 수 있을까요? 장원 밖에서요.”

란스터가 웃었다.

“그야 간단하죠. 조수인이라는 집사가 한증막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못해도 며칠에 한 번씩 꼭 찾아옵니다. 아마 오늘도 올 겁니다.”

장목화가 눈썹을 살짝 까딱였다.

“그래요?”

“네, 여기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점심쯤에는 볼 수 있을 거예요. 2층 방에서 쉬고 계시죠.”

란스터가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 * *

정오 무렵, 하비스트 목욕탕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사용 가능한 건 한증막 두 곳, 온탕과 냉탕 두 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란스터가 장목화와 성건우가 쉬던 방의 문을 두드렸다.

“조수인이 왔습니다. 한증막에 있어요.”

“제가 가서 만나볼게요.”

성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내 란스터가 장목화를 힐끔 바라보았다.

“여탕에 들어가 뜨거운 김 좀 쐬시겠습니까? 바로 이 옆인데요.”

호기심 많은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러죠.”

이때 성건우가 대뜸 입을 열었다.

“팔 고장 나지 않게 조심해요.”

장목화가 인상을 구기며 왼손으로 주먹을 바르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주먹을 그대로 성건우의 배에 꽂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곧 알아서 진정했다. 조금 더 곱씹어보니 성건우에게는 그 말이 나름의 걱정하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의 우려와 달리 생체 공학 의수가 탕 안의 증기나 물 때문에 고장 날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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