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해야 할 일
“질문.”
“뭔데?”
장목화가 친절하게 되물었다.
“구세계 파괴 원인에 대한 조사를 막는 세력이 있다면 왜 이비아와 마커스, 혹은 다른 관련자를 죽이지 않은 거지? 단서를 완전히 없애야 하잖아.”
이는 게네바가 분석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늪 1호 폐허 실험실도 차으뜸이 완전히 폭발시켰잖아.”
그때, 갑자기 성건우가 오른 주먹을 쥐고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알았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오레이는 애초부터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은 거야. 그래서 이비아와 마커스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지.”
‘그럼 우린 퍼스트 시티에 왜 온 건데?’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이비아와 마커스가 퍼스트 시티의 엄격한 보호를 받고 있어서, 그런 세력이 미처 손을 쓸 수 없는 걸 수도 있지.”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게 더 가능성 있겠는데? 퍼스트 시티는 애쉬랜드 최대 세력인데 그 둘도 보호 못 할 리는 없지. 이건 우리가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우리한텐 어둠에 숨은 파괴자뿐만 아니라 퍼스트 시티 보호자도 적이니까.”
이 대목에서 그녀는 쓰게 웃었다.
“일단은 차근차근 가면서 상황을 지켜보자. 우리가 가진 정보가 너무 적잖아. 또 우리가 할 일은 조 씨 가문 연락책과 접촉해 교외 장원을 조사하고, 이번 주 내로 거금의 보상을 받는 거야. 다음엔 현지 사냥꾼 길드로 가서 흰 늑대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다른 능력에 관한 정보를 파는 거지.”
당시 차으뜸이 보인 모습들이 증거인만큼, 이는 실로 귀한 정보였다.
“퍼스트 시티에 있는 회사 정보원과 연락하는 게 네 번째로 할 일이라면, 다섯 번째는 한명호를 찾는 거겠죠? 우린 아직 한명호를 관찰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또 여섯 번째는 백용명 팀을 찾아 한 끼 거나하게 대접받아야 하고…….”
성건우가 나머지 일정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장목화가 피식 웃었다.
“네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성건우는 즉각 창가에 엎드려 밖을 내다봤으나 이곳은 2층에 불과해서 주위 건물과 장애물에 시야가 가려졌다. 보이는 거라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간간이 보이는 차 조금, 자전거들뿐이었다.
몇 초간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내려가서 물어보자.”
* * *
재빨리 홀로 내려간 구조팀은 마침 문가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관 사장 휴고를 발견했다.
백새벽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죠?”
돌아선 휴고의 얼굴은 조금 복잡해 보였다.
“최근 일주일 동안 이 근처 거리에만 벌써 세 번째로 무심자가 나타났어.”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깥 전봇대 위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갑작스러운 방송이 흘러나왔다.
- 물 고갈로 인해 오늘 저녁 7시부터 내일 아침 8시까지 단수 예정입니다.
세 번째 무심자의 출현, 그 소식을 전하는 휴고의 진지한 얼굴, 그리고 때마침 단수를 예고하는 방송이 한데 뒤섞여 매우 기묘한 공기를 형성했다.
구조팀 네 사람은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금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평상시 표정으로 되돌아온 휴고가 구조팀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선 불평도 조금 묻어나왔다.
“얼른 화장실 가서 대야랑 물통에다 물을 채워놔. 씻을 사람은 얼른 씻고.”
그는 말하는 동시에 1층 홀 뒤로 향했다. 단수 준비를 하려는 듯했다. 아마 이런 일을 경험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듯 휴고는 상당히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떠나버린 휴고 때문에, 최근 무심병의 상황을 물어보려 했던 구조팀은 갈피를 잃고 잠시 좀 삐거덕댔다.
결국 구조팀은 여관 사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필요한 물도 받아두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더러워진 몸과 피로도 씻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구조팀이 바쁘게 움직이며 샤워를 마쳤을 때, 서쪽으로 기울던 해는 이제 지평선에서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부터 바로 작전에 돌입하진 않을 거야. 나가서 뭘 좀 먹고 돌아와서 자자. 푹 쉬고, 충전하고, 시스템도 유지하는 거야.”
장목화의 말 뒷부분은 게네바를 향한 것이었다.
이 여관의 각 방에는 새것이든, 낡은 것이든, 억지로 고친 것이든 하나같이 전력량계가 붙어있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던 사이, 성건우는 벌써 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장목화는 바로 성건우를 붙잡아 세웠다.
“일단 기다려. 나랑 작은 흰둥이는 화장해야 해.”
물론 그녀가 말하는 화장은 치장이 아닌 위장에 가까웠다. 남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자 평범한 모습으로 보이려는 게 꾸미는 것이라 말할 순 없었다.
그때, 백새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필요 없는데요.”
그녀는 퍼스트 시티에서 생활해본 경험이 있어, 자신 같은 황야유랑자 출신은 이곳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장목화가 백새벽을 빤히 보며 빙그레 웃었다.
“설마 다른 사람들이 첫눈에 알아보기를 바라는 거야?”
몇 초간 침묵하던 백새벽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장목화 곁으로 갔다.
“저도 할래요!”
성건우의 굵직한 목소리가 뒤를 쫓아왔지만, 장목화는 이제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여기서 또 반박해봤자, 갖가지 해괴망측한 이유를 끌어와 말문을 닫게 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입씨름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서로 말이 통해야만 할 수가 있었다.
* * *
구조팀은 빠르게 준비를 마친 뒤, 그린올리브 구역의 라베 스트리트라는 곳을 여유롭게 거닐다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의 이름은 소박하게도 아크슨이었다.
아크슨은 레드리버 유역 한 지구의 옛 명칭이었다. 들리는 말로 당시 퍼스트 시티를 건립했던 이들 중 아크슨 출신이 주류를 차지했다고 했다.
종업원을 겸하는 식당 사장은 체격이 참 다부졌다. 린넨 셔츠 사이로 보이는 양팔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나이는 40대 정도 되어 보였고, 검은 머리칼에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던 장목화가 물었다.
“메뉴판 있나요?”
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은 레드울프 구역이 아니니까요. 오늘은 사탕무 잡탕, 검은 빵, 포크소시지, 감자뿐입니다.”
그는 감자라고만 이야기할 뿐 구체적인 메뉴는 밝히지 않았다. 감자로 할 수 있는 조리법이 아주 다양한데도 그저 감자라고만 말했다.
“전부 주세요.”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주문했다.
그때, 장목화는 일찍이 홀쭉해진 주머니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백새벽이 음식의 가격을 물었다. 한 끼 덮어놓고 먹었다가는 남아있는 오레이가 다 바닥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돈 좀 마련해야지. 아, 일단 회사 정보원한테 경비를 좀 받자.’
장목화는 바른 자세로 앉아, 제대로 음식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용여홍이 조금 희망을 안고 물었다.
“생고기는 없나요?”
“매일 조금씩만 들여오는 터라 점심이면 다 바닥나버린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긴 레드울프 구역이 아니니까요.”
사장이 간단히 설명했다.
사탕무 잡탕은 이미 다 완성돼 있고, 포크소시지도 살짝 데우기만 하면 됐던 데다 매시트포테이토를 만드는 것만 약간 시간이 들어서, 구조팀은 금세 따끈한 음식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직 하늘이 컴컴해지지는 않은 때였다. 태양은 여전히 지평선에 머물며 노을빛을 색칠하고 있었다.
“이 사탕무 잡탕, 좀 특이하네요.”
국물을 맛본 용여홍이 첫 평을 했다.
이 음식은 반고 바이오에서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걸쭉하고 달았다.
성건우는 자른 포크소시지에 집중했다. 어마어마하게 맛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지긋지긋한 통조림,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한창 맛있게 식사하던 중에, 먼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토지를 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한다! 우리는 삶을 원한다!”
호기심이 동한 용여홍은 몸을 살짝 돌려 식당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가 거리를 지나쳤다. 그중엔 나무 팻말을 든 사람도 있고, 종이를 든 사람도 있었다.
팻말과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토지를 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한다!」
「우리는 삶을 원한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이렇게 레드리버어 글자로도 고스란히 쓰여있었다.
글씨가 말해주듯, 다들 전부 전형적인 레드리버인이었다.
금색 머리칼, 밤색 머리칼 혹은 파란색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
특색만큼 가진 분위기들도 비슷비슷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들 하나같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입고 있는 셔츠와 외투도 다 낡아 보였지만, 그나마 세탁은 깔끔하게 잘 된 편이었다.
“다들 지금 뭘 하는 거지?”
용여홍이 의아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시위를 하는 겁니다.”
건장한 체격의 사장이 바로 답변했다.
현재 식당의 손님이 구조팀뿐이라 용여홍의 혼잣말이 조금 크게 들렸다. 정신이 팔린 나머지 용여홍이 약간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시위?”
장목화는 책 속에서나 봤던 그 단어를 되뇌었다.
역시 퍼스트 시티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시위?”
성건우도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이내 사장이 작게 불평을 시작했다.
“전부 옛 시민의 후손들이에요. 노력도 안 하고 도시 밖의 논밭은 벌써 다 잃어버렸지만, 서쪽 교외로 나가 일하긴 싫어하죠. 저들이 원하는 건 원로원이 전쟁을 일으키거나, 황무지에 새로운 거점을 지어 자기들한테 새로운 땅을 주는 일이에요. 아니면 공직에 오를 수 있게 해주거나요.”
퍼스트 시티의 구조엔 큰 문제가 있었다. 공장 구역이 레드리버와 더 가까운 서쪽에 있어, 폐수가 그대로 도시에 흘러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퍼스트 시티 동쪽과 북쪽은 모두 심각한 오염으로 많은 생물이 변이된 곳이라 공장을 지을 수 없는 데다, 동남쪽과 정남 쪽에는 비옥한 토지가 다량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구세계 파괴 영향으로 이곳 기후가 약간 혼란스러워져서 바람은 항상 동에서 서쪽으로 불었다. 도시 동남쪽 골든애플 구역 등은 레드리버 지류인 타웨이 리버를 수원지로 삼았기에 이러한 구조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용여홍도 사장의 설명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게을리 살면서도 고생하기는 싫다는 거네요.”
이때 성건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어쩌다 저렇게 많은 이들이 동시에 스스로 노력도 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논밭도 다 잃어버린 겁니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시위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수많은 시민 사이에는 언제나 게으름을 피우고 노력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법이지.”
장목화는 성건우에게 눈짓으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아예 접시에 소시지 몇 개도 올려주었다. 이거나 먹고 입 다물라는 얘기였다.
용여홍 역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식사에 마저 집중하기로 했다.
토지와 일자리를 원하는 외침은 점차 멀어져갔다. 방향을 보면, 그들은 아마도 레드울프 구역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었다.
배가 고팠는지, 구조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싹 비웠다.
바깥에선 해가 더 기울었지만, 아직은 사방을 분간할 수 있었다.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 바퀴 걸을까.”
용여홍은 그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팀장님이 제일 좋아하는 환경 관찰 및 지형 숙지 시간이 돌아왔네.’
“좋습니다!”
배를 든든히 채운 성건우가 제일 먼저 힘차게 답하고, 게네바도 뒤따라 그의 반응을 똑같이 흉내 냈다.
백새벽은 자신이 이미 이곳을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도 한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않아서, 어떤 변화가 생겼을지 알 수가 없었다.
뭐든 직접 살펴보며 상황을 파악해야 안심할 수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