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화. 퍼스트 시티
줄이 점점 줄어 이들과 목제 골조 사이의 거리도 적잖게 가까워져 있었다. 허양원도 조금 더 가까워진 기계 승려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구분이 잘 안 가. 기계 승려가 스스로 정념 선사라고 소개하면 나도 정념 선사로 대하고, 다른 선사라고 소개하면 다른 선사로 대할 뿐이지. 어쨌건 위드 시티에서 발작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으니까. 지금 설법 중인 건 정념 선사야.”
용여홍은 그 말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금세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기계 승려들은 서로 어떻게 구분하고, 상대는 어떻게 알아보죠?”
“전파 신호나 특수한 암호 같은 걸 이용하는 거겠지.”
장목화가 기계와 전자 제품의 각도에서 생각한 답을 내놓았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정념 선사가 자기를 자극하면 안 되는 걸 얘기한 적 있나요?”
광범위하게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기계 승려에게는 건드리면 발광하게 되는 약점이 하나씩 존재한다고 했다.
이러한 약점 중 일부는 그들이 지불한 대가였고, 일부는 의식 업로드 기술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폐해였다.
허양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어.”
“그럼 일반적인 상황에선 트리거가 안 나타난다는 의미겠네요.”
장목화는 이렇게 대꾸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줄은 계속 줄고, 이들도 점차 목제 골조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주변엔 이미 빵을 받은 많은 이들이 쪼그려 앉거나 서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성건우는 그들에게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너무도 부러운 모양이었다.
지금 음식을 배급받고도 다들 광장을 떠나지 않은 건, 승려 교단에서 음식을 나누는 대가로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설법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냥 가버리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막을 사람도 없지만, 그 순간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라 두 번 다신 음식을 받을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의 얼굴을 스캔하고 대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기계 승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동안 한담을 나누던 와중, 허양원이 하늘의 색을 한번 살피다 웃었다.
“최근 우리 집사가 황야에서 사냥해 온 짐승들이 몇 마리 있는데, 오늘 저녁 바비큐 파티에 올래?”
눈에 순간 광채가 발했던 성건우는 돌연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어떤 식재료는 구워 먹기 적합하지 않을 텐데요.”
장목화도 뭔가를 떠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허 성주님, 퍼스트 시티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허양원이 호탕하게 웃었다.
“지난번 일로 성주 저택이랑 주변 사람 한 차례 물갈이했어. 퍼스트 시티에서는 내가 알리길 원하는 소식만 접할 거야.”
“그럼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장목화는 그제야 성건우의 옷자락을 풀어주었다.
성건우 역시 기쁨에 벅차올랐지만, 갑자기 또 뜬금없는 주제를 던졌다.
“가짜 신부는 요즘 어떤가요?”
허양원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처형됐어. 원래는 포섭하고 싶었는데 그자에겐 너무도 위험한 능력이 있었잖아. 내가 언제 그자의 꼭두각시가 될지 모르니까.”
이는 성건우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겠지만, 허양원의 능력으론 성건우에게 절대 대적할 수 없었다.
“그렇죠. 뭐든 조심하는 게 나으니까요.”
장목화가 이해한다는 듯 말을 받았다.
백새벽과 용여홍도 그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나 성건우만은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허양원이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는 듯 입을 뗀 순간, 성건우가 홀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우리 차례다!”
허양원이 몸을 틀자, 어느새 눈앞에 여러 개 웍들이 보였다.
동시에 목제 골조 위에서 설법 중인 정념과 음식 배급을 담당하는 하인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들 모두가 허양원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하인들은 허양원이 정념 선사에게 내어준 이들이었다.
다들 허양원이 이 줄에 서 있는 이 상황이 몹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허양원의 얼굴도 한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에 당장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이내 한 하인이 어색하게 빈 사발과 빵 두 개를 건넸다. 허양원 역시 뻣뻣하게 음식을 받아 들고 자신의 사발에 죽 한 국자를 떠넣어 주는 또 다른 하인을 바라보았다. 사발에 담긴 죽의 양은 상당했다.
* * *
다음 날 오후, 위드 시티 외부.
개조된 국방색 지프가 황야를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엔 마찬가지로 군복 차림의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오늘 지프 운전대를 잡은 건 바로 파란 눈빛을 반짝이는 게네바였다.
레드스톤 마켓에서 출발해 위드 시티로 도착한 그는 이미 고성능 배터리 충전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이에 장목화는 백새벽을 시켜 남이 이모에게 적잖은 오레이를 건넸다.
게네바 옆 조수석엔 성건우가 앉아 있었고, 뒷좌석에는 왼쪽부터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이 앉아 있었다.
가운데 용여홍은 옆자리 숙녀분들을 위해 한껏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자세가 모처럼 아주 나른해 보였다.
“왜들 그래?”
게네바가 물었다.
중저음 전자합성음에, 성건우는 시원한 트림으로 답변했다.
“어젯밤 있었던 바비큐 파티가 아주 훌륭했거든.”
성건우는 어젯밤 허양원의 초대를 상당히 후하게 평가했다. 형제의 깊은 애정에 감명받은 듯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한테 생고기랑 조미료도 싸줬어. 오래 두고 먹을 수는 없으니 이틀 안에 해치워야 하긴 하지만.”
게네바도 인간들이 맛있는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 특별한 대꾸 없이 자연스럽게 주제를 전환했다.
“이제 바로 퍼스트 시티로 가는 건가?”
장목화가 답했다.
“응, 바로 퍼스트 시티로!”
* * *
일주일이 조금 더 지났을 무렵, 국방색 지프는 이제 새카맣게 탄 땅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곳은 무너진 건물과 소름 끼칠 정도로 기이하게 자란 식물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가끔 괴물 같은 모습의 짐승과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유적 사냥꾼들이 간간이 보였다.
조수석에서 이를 바라보던 백새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긴 구세계가 파괴됐을 때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곳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신력 이후 이 근처에 첫 번째 도시를 세웠지.”
반고 바이오의 교과서엔 퍼스트 시티는 인간이 구세계 폐허에 의지해 세운 첫 번째 도시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 근처 구역이 가장 심각하게 파괴된 곳이라는 설명은 없었다.
이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용여홍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꽤 고생했겠네. 적잖은 희생을 치렀을 테고⋯⋯.”
하지만 퍼스트 시티는 건립 이래론 파괴된 적이 없었다.
곧이어 운전하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그래, 퍼스트 시티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간에, 당시 그 종말 속에서 그런 도시를 세우고 문명을 일으켰다는 건 칭찬할만한 일이지.”
짝짝짝!
어김없이 들려온 박수 소리에 장목화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타박했다.
“손뼉은 왜 쳐?”
“팀장님 말을 들으니까 학교 선생님이 떠올라서요.”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엔 그렇게 손뼉 쳐도 된다고 그러셨어?”
“수업 말고 조회도 있잖아요.”
성건우는 장목화의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보며, 학교 안 다녀봤냐는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
장목화는 이를 악문 채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내달리는 지프 앞으로 어느새 거대한 강 하나가 드리웠다.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애쉬랜드에서 가장 길고 넓은 강, 바로 레드리버였다.
강은 그다지 깨끗하진 않았다. 수면 위로 해초와 각양각색의 쓰레기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또 강 맞은편으론 높지 않은 빌딩들과 굴뚝들이 빽빽하게 솟아있었다. 그 굴뚝 위로 회백색, 혹은 탁한 누런색 기체가 피어오르고 있어, 하늘색이 매우 흐렸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사방이 어둑한 지경이었다.
이때,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은색 헬리콥터 두 대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선 드론들이 주위 영지를 살폈다.
순간 용여홍은 숨이 턱 막혀왔다. 이는 그들이 진정으로 수도 퍼스트 시티에 도착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위드 시티를 떠난 이래, 구조팀은 도중에 한 황야유랑자 거점에서 식량을 보충했을 때를 제외하면 계속 광활한 황야를 가로지르기만 했었다.
퍼스트 시티는 애쉬랜드 최대 세력으로 불렸으며 인구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실제론 크고 작은 거점들과 도시라고 불리는 지역, 그 주변 경작지 혹은 지하자원이 매장된 지역, 교통의 요로만 통제할 뿐이었다.
광야와 산림, 늪, 폐허는 아무리 퍼스트 시티라도 손대지 못했다.
구조팀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유적 사냥꾼 팀만 여럿 마주쳤을 뿐, 퍼스트 시티의 정규군을 만나지 못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다들 많건 적건 기대감을 조금씩 드러내는 가운데, 성건우는 과할 정도로 흥분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지능 로봇 게네바 역시 프로그램 분석 결과에 따라 약간 격앙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또 강을 따라 아래로 한참 내려가다 보니 강 너머로 보이는 굴뚝들은 점차 줄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고층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빌딩 사이사이로 보통 규모의 건물들이 대량으로 늘어선 채 진정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늪 1호 폐허와 비교한다 해도 그 크기로는 절대 밀리지 않을 듯했다.
“대체 몇 명이나 살 수 있을까?”
용여홍이 감탄하듯 물었다.
“소문으론 거의 백만 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던데.”
백새벽은 구체적인 숫자를 대지는 못했다. 퍼스트 시티의 자체적인 통계부에서도 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오가는 사냥꾼과 상인 등 유동 인구도 그 어느 곳보다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창 밖 광경이 바뀌고, 다리 하나가 보였다.
차 여덟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이 다리는 레드리버 북안의 불모지와 산기슭, 남안의 퍼스트 시티를 연결했다.
다리 양 끝엔 완전 무장 한 정규군이 각각 백 명씩 자리해 있었다. 진회색 헬멧을 쓰고서 같은 색 제목을 갖춰 입은 정규군은 기관총 여러 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다리 끝엔 짙은 녹색 장갑차 여러 대로 간단한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있어, 평범한 크기의 차 한 대만 겨우 드나들 수 있었다.
어떤 차라도, 어떤 사람이라도 그 틈으로 다리를 통과하고 싶다면 모두 멈춰서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장목화도 출발하기 전 회사로부터 정보를 받았다.
경무기는 도시 내로 반입할 수 있으나 중무기는 일률적으로 압수되며, 그 외의 금지 물품 역시 반입이 불가했다.
불행히도 군용 외골격 장치 역시 군사 관제 물품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우회로를 선택해 다른 곳에서 레드리버 남안으로 향하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퍼스트 시티의 다른 진입로에도 주둔군은 존재하며, 하늘에서는 각양각색의 비행기가 이 구역을 감시 중이었다.
그러나 용여홍은 이러한 상황에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추리 광대가 있는데 어딘들 못 들어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