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알랑방귀
“아, 너희 아버지 춤 꽤 추시던데?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곤 모르는 거야.”
성건우는 조이덕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듯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세 사람이 무슨 말을 덧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조이덕은 하는 수없이 조금 전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께서 너희들한테 맡기고 싶은 일이 하나 있으시대. 혹시 한 번 뵈러 가지 않을래?”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살짝 교활한 눈빛을 반짝였다.
“자고로 군자는 무너지려는 담 아래 서지 않는단 말이 있지. 만나는 건 상관없는데, 조 씨 저택에서는 안 돼. 우리 모두 다 안심할 수 있는 곳이어야지.”
합리적인 말에 조이덕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가 막 장소를 제안하려는데, 성건우가 돌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밥부터 먹고. 식으면 맛없잖아.”
조이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성건우의 얼굴에는 온통 진심이 어려 있었다.
이내 시선을 거둔 조이덕은 힘겹게, 아주 힘겹게 식사를 재개했다. 정말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잔혹한 식사였다.
그를 바라보던 성건우가 문득 이야기했다.
“혹시 고기 먹기 싫으면 내가 도와줄게.”
‘……!’
조이덕에게 별안간 동아줄이 내려왔다.
“좋아! 좋아!”
황급히 대답하는 조이덕을 보고, 장목화는 조용히 입꼬리만 뒤틀었다.
* * *
위드 시티 중앙 광장.
태양이 산 아래로 완전히 저문 시각, 이곳에 조기정이 나와 있었다.
이곳이 바로 장목화가 고른 접선 장소였다.
조기정은 오늘 모자를 쓰고서 품이 넉넉한 가운 차림으로 나와,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거리 벤치에 앉아 있었다.
주변 경호원들은 현지 주민과 유적 사냥꾼들이 조기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물론 다들 표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경호원들을 둘러보는 조기정의 시선은 덤덤했다.
곧이어 구조팀도 이곳에 도착했다.
네 사람 중 장목화, 성건우는 조기정, 조이덕 부자에게로 향하고, 용여홍과 백새벽은 자발적으로 흩어져 사방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주요 감시 대상은 주위의 고층 건물이었다. 혹시나 존재할지 모르는 저격수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광장 구역 대부분은 성건우의 양손 동작 불능 능력의 영향 범위에 포함돼있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 오랜만이군.”
조기정이 가까이 다가온 장목화, 성건우를 보고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성건우가 두 팔을 벌려 보였다. 포옹하자는 뜻이었다.
뚱뚱한 조기정은 흰 수염을 쓰다듬다 애써 웃으며 성건우를 끌어안았다.
성건우는 푹신한 조기정을 안고서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춤 실력이 상당하시던데요?”
그 말에 조기정은 불이라도 덴 듯 급히 손을 거두고,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 다들 삶이 힘들었을 때는 수시로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었지.”
이윽고 그는 손을 뻗어 장목화와도 악수했다.
그렇게 넷 모두 각자 자리에 앉자, 장목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조 의원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조기정은 큰아들을 한번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인 끝에 입을 뗐다.
“일단 실례를 무릅쓰고 묻겠네. 혹시 앞으로 어디 갈 계획이 있나? 내 부탁으로 자네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을 못 하면 안 되니까.”
아주 겸손한 자세였다.
장목화가 웃으며 대꾸했다.
“대형 세력 몇 곳에 들려 저희의 운을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더 좋은 발전을 하게 되길 바라는 생각에서죠.”
조기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퍼스트 시티에 가줬으면 하네. 수도인 퍼스트 시티 말이야.”
“무슨 문제라도?”
성건우가 물었다.
조기정이 바로 자신의 상황을 알렸다.
“우리 조 씨 가문은 퍼스트 시티 교외의 레드리버 남안에 장원 몇 개를 가지고 있다네.”
웃는 듯 아닌 듯한 장목화의 묘한 표정을 보고, 조기정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우리 애쉬랜드인 사이엔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란 속담이 있잖나.”
장목화가 눈썹을 살짝 까딱이자, 다시 조기정의 말이 이어졌다.
“최근 그 몇몇 장원에 좀 문제가 생겼다네. 때맞춰 작년 수익을 상납하지 않는 거야. 날씨 때문에 생산량이 심하게 줄었다고 해서, 그곳으로 집사를 보냈었지. 집사도 분명 생산량이 줄었다고 보고했고.
후에 이덕이 동생도 보냈는데, 그 애도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전보를 보냈어. 원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 퍼스트 시티의 한 친구가 우연히 내 장원을 지나다, 신분이 불분명한 인사가 드나드는 걸 봤다고 말하기 전까진.
난 비밀리에 퍼스트 시티의 유적 사냥꾼 팀을 하나 고용해 일주일간 내 장원을 감시해달라고 했어. 그들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줬지, 정말로 내력이 불분명한 인사가 수시로 그곳에 출몰했다고.
그래서 난 유적 사냥꾼 팀을 하나 더 고용해 아예 장원에 들어가서 조사해 보게 했네. 그런데 그들은 정작 또 낯선 이는 없었다고 보고하더군.”
“좀 이상하긴 하네요.”
성건우가 생각에 잠겨 가만히 턱을 쓸며 말했다.
조기정은 이제야 구세주를 찾은 듯 서둘러 이야기했다.
“그렇지? 그래서 난 우리 아들이, 몇몇 심복이 참으로 걱정돼 길드의 고급 사냥꾼을 고용할지 고민하던 차였어. 그런데 이덕이가 자네들이 돌아왔다고 하더라고. 내가 볼 때 자네들은 고급 사냥꾼보다 더 강한 실력자거든.”
그는 당시 우딕 역시 성건우의 친구가 됐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성건우는 깊은 고민 모드에 돌입했으며, 장목화는 미소 띤 얼굴로 조씨 부자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조기정이 이를 악문 채 말을 이었다.
“자네들이 보기에 내가 썩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란 걸 잘 안다네. 그러니 원한다면 그 능력을 써서 날 자네들의 친구로 만들도록 해.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아주 훌륭한 태도네.’
장목화가 막 대꾸하려는데, 성건우가 순간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형제도 조씨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까?”
“⋯⋯.”
그 말에 조기정과 조이덕은 흠칫 놀랐다. 마음속에 후회가 급속도로 밀려들었다.
친구가 되는 각성자 능력이라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라도 형제가, 아예 그걸 뛰어넘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양아들도 될 수 있었다.
당연히 조 씨 부자의 상상 속 아버지는 성건우 쪽이었다.
곧이어 장목화가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농담하는 거예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네요. 저희에게 언제든, 아무 대가도 없이 임무를 포기할 수 있는 권리만 주시면 됩니다.”
순간 조이덕이 깜짝 놀라 장목화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 임무를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조이덕의 눈엔 기뻐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거야 보상부터 확인해야겠지.”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한편, 내내 조용히 고민하던 조기정이 운을 뗐다.
“무엇이 자네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겠군. 차라리 자네들이 먼저 제안하게. 우리 가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어.”
‘정말 훌륭한 태도야.’
장목화가 감탄했다. 그녀는 당시 귀족 의사당에서 조기정이 얼마나 오만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 높은 신분을 완전히 내려놓고 자신들의 비위를 맞추려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동일 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신력 초기에 그만한 지위에 이르러 귀족이 된 사람이니 절대 만만치 않은 자라는 건 장목화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다만 조기정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니, 그가 혼란의 시대를 직접 겪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7, 8초 정도 고민하던 장목화가 미리부터 생각해둔 답을 내뱉었다.
“거액의 돈, 그리고 조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퍼스트 시티 내의 연락망을 통한 도움 한 번이면 될 것 같습니다.”
장목화가 조기정의 제안에 응한 건, 위드 시티 귀족과 퍼스트 시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략 몇 오레이를 원하는 건가?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거지?”
캐묻는 조기정을 보고,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지금 구체적인 액수를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저희도 아직 이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큰 금액은 아닐 겁니다. 의원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실 거예요. 왜냐하면 위험도가 저희 예상을 넘어선다면 저희는 곧장 이 임무를 포기할 거거든요. 저희가 바라는 도움도 의원님 가문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과한 요구는 아닐 겁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이야. 하지만 때가 되면 조용히 자신들 말에나 따르라는 뜻이로군.’
조이덕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왠지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기자고 친절하게 의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사이, 조기정은 이 팀이 위드 시티에서 했던 일과 이제까지 알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지.”
“축하합니다.”
성건우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축하한다니?’
조기정은 망설이다가 성건우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만약 의원님께서 수시로 유랑민을 구제해주신다면 우리는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성건우는 진심을 담아 솔직하게 말했지만, 조기정, 조이덕 부자는 그저 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고개를 들고 하늘의 달을 살피던 장목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만간 퍼스트 시티 내 조 씨 가문 연락책의 상황을 알려주세요.”
따라서 일어난 조기정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네.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군.”
장목화 대신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춤추면서 축하하는 게 어떨까요?”
순간 표정이 굳어버린 조기정은 애써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우리 집에 가서 추도록 하지.”
성건우는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거기 갈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잖아요. 여기서 추시죠.”
성건우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이 오가는 중앙 광장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아예 전술 배낭도 내려놓고 소형 스피커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조기정과 조이덕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인파로 가득한 광장에서 자신들이 춤을 추는 모습이 절로 상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때, 장목화가 성건우의 손을 탁 쳐냈다.
“야! 사람들 불편하게 하지마.”
뒤이어 조기정과 조이덕을 돌아본 그녀가 안심하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얘 말은 들을 필요 없어요.”
비로소 한숨 돌린 조기정은 황급히 장목화에게 퍼스트 시티 내 조 씨 가문 연락책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 후, 그는 성건우의 실망한 눈빛을 뒤로한 채 얼른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까만 밤,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무리가 뭔가에 쫓기듯 멀어져갔다.
* * *
다시 모인 구조팀 네 사람은 산책하듯 사우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가로등이 다 밝혀진 거리엔 빛에 따른 명암이 극명하게 드라났다.
사연의 명암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낡고 더러운 이불로 몸을 둘둘 만 채 골목길 구석에 웅크려 졸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길가에 모여 오가는 행인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도움을 청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용여홍은 절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보다 도시에 걸인들이 더 늘어난 것 같네.”
백새벽은 전방을 응시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겨울에 밖에서 잠들었다가는 다 얼어 죽으니까.”
용여홍은 당시 도시 밖에 늘어서 있던 황야유랑자들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장목화와 성건우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걸음만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