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위험한 만남
짙은 색 방탄유리를 더한 승용차 한 대가 위드 시티 거리로 들어섰다.
뒷좌석 왼쪽에 앉은 조이덕은 고개를 돌려 뒤쪽 쌀가게를 한번 쳐다보더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년에 일어난 유랑자들의 폭동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여겼다.
노스 스트리트 조 씨 저택 첫 번째 후계자인 조이덕은 다른 사람의 눈엔 어마어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매일 전전긍긍 살아왔다는 것을, 늘 살얼음 위를 걷듯 위태로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위로는 가문의 실권자이자 위드 시티 귀족 의사회 일원인 아버지 조정기에게 억눌리고, 아래론 야심만만한 동생 조이한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었다.
이에 조이덕은 대부분의 일에서 주도권을 다 빼앗기고, 극소수에 불과한 일부 자원만 겨우 장악해, 실수란 용납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지난 폭동 이후 야심가 동생 조이한은 퍼스트 시티로 내쫓기며 가문의 권력 다툼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아버지 조기정은 그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 건강이 악화되어 권력 일부와 사업을 조금씩 조이덕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최근 조이덕은 삼십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명실상부한 귀족 중의 귀족임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한 예로, 그가 방금 본 수익이 어마어마한 쌀가게는 오늘부터 완전히 그의 명의가 됐다. 또 여태까진 오직 조기정의 분부만 따르며 조이덕에겐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집사도 요즘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조이덕이 곧 차창을 내렸다. 모처럼 바깥의 싱그러운 공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그의 시야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개조된 흔적이 또렷한 국방색 지프차가 들어왔다. 하지만 위드 시티엔 그런 차들이 넘치도록 많아서, 조이덕도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 사이, 속도를 늦춘 지프차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선글라스를 벗고서 정확히 조이덕을 향해 왼손을 흔들어 보였다.
운전자의 얼굴엔 짙은 흥분과 기쁨이 가득했다.
조이덕은 그제야 저 뛰어나게 잘생긴 미남자를 알아보았다.
너무나 익숙하고 또 인상 깊은 얼굴에 조이덕의 머릿속이 한순간 하얗게 비워졌다. 동시에 심장과 폐도 그대로 멈춘 듯했다.
‘그 사람이야! 고성능 폭탄을 가져온 귀족 의사회를 협박한 그 사람! 기이한 능력으로 저도 모르는 새 모두를 자기 친구로 만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사냥꾼! 심지어 다 같이 춤도 추게 만든 그 미친놈!’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지만, 조이덕은 본능적으로 차창을 올리고 아무것도 못 본 척 정면만 바라보았다.
짙게 선팅된 유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조이덕의 곁눈으로 그 미남자가 실망한 듯 천천히 손을 거두는 걸 보았다.
삐거덕삐거덕 고장 난 듯 앞만 보고 있는 조이덕은 기사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아까 그자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이윽고 두 차는 아무런 일도 없이 서로를 스쳐 지났다.
조이덕은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사실 굳어버린 거라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시청 건물을 지나, 눈앞에 노스 스트리트로 이어지는 다리가 들어왔을 때야 조이덕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한편, 조이덕이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잘생긴 지프 운전자 성건우는 핸들을 돌리며 영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추리 광대 효과는 이미 사라진 것 같네. 휴, 저 사람 집에서 열린다던 무도회도 참석 못 했는데.”
당시 조이덕은 성건우를 무도회에 초대한 바 있었다.
이내 뒷좌석 왼쪽에 앉아있던 장목화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시간이 꽤 지났잖아. 넌 달지기도 아닌데 효과는 진작 사라졌겠지.”
그때 조수석의 용여홍이 매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저 사람은 분명 우리를 알아봤을 텐데요. 혹시 누군가를 시켜 복수하려 하지는 않을까요?”
구조팀은 지난날 위드 시티 귀족 의사회 의원들에게 대량의 피와 유랑자들을 선사했다. 게다가 성건우는 추리 광대 능력으로 그들을 형제회로 만들고 다 함께 춤까지 추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뒤에 귀족들은 어땠을까? 난감하고, 수치스러워 이를 부득부득 갈지 않았을까?’
용여홍은 그만한 자원을 가진 사람들이니만큼 자신들에게 반드시 복수하려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위드 시티랑 회사는 아주 우호적인 관계야. 성주 허양원이 우리한테 대적하려 하지만 않으면 귀족들 몇몇으론 큰 파란도 못 일으켜. 그들이 고용할 수 있는 외부인 중에 각성자는 몇이나 되고, 베테랑 사냥꾼은 몇이나 되겠어? 또 지금 우리 실력은 위드 시티를 떠날 때보다 곱절 이상은 성장했어. 딱히 방심하지만 않으면 절대 겁먹을 이유가 없어.”
허양원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귀족들은 개인적인 무력으로 도시 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용여홍도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맞아, 우리 팀 실력은 이미 상당히 강해졌어.’
“네, 어쨌든 우린 또 위드 시티에 며칠 안 있을 테니까요. 게네바만 오면 바로 떠날 예정이잖아요.”
게네바는 앞으로 이틀은 더 있어야 위드 시티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내부 상황도 미묘했으며, 지하 방주는 레드스톤 마켓의 다른 세력과 경쟁 관계였기에, 지하 방주 질서를 공고히 하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린 탓이었다.
곧이어 장목화가 차창에 팔꿈치를 얹고 손에 턱을 괴며 웃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이미 우리 배후에 작지 않은 세력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노스 스트리트로 가서 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이상 기껏해야 우리를 감시하는 정도에만 그치겠지.”
말을 마치고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던 장목화는 자신을 지나쳐 창밖을 바라보는 백새벽의 눈동자를 확인했다.
“뭘 보는 거야?”
호기심에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장목화가 함께 길가를 살폈다.
원래 그 노포 국숫집이 양가면관으로 바뀌어있었다.
장목화는 순간 말이 없어졌다.
성건우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프를 몰았다.
* * *
성건우는 우회로를 따라 한 바퀴 돈 뒤, 미행이 없음을 확실히 확인하고서야 윤복 총포사가 자리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지프는 건물들로 둘러싸인 뜰 안에 멈췄다.
주차 후 차에서 내린 용여홍이 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을 둘러보았다.
일전에 한동안 머물려 전투한 적도 있기에 분명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그 뒤로 어느 정도 개조를 거쳐서 그런지 조금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밖에 널린 옷들도 그때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오, 너희 또 왔구나?”
“차도 바꿨어? 못 알아볼 뻔했네!”
“잠깐 들어와 앉았다 갈래?”
근처를 지나치던 주민들이 당시 함께 싸웠던 구조팀을 알아보고 조심스레, 혹은 열정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주변엔 낯선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연말쯤 이곳에 도착했을 유적 사냥꾼인 듯했다. 그들 역시 구조팀을 심사하듯 살피며 호기심을 보였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 네 사람은 그저 간단히만 대꾸하고, 백새벽을 필두로 하여 윤복 총포사 뒷문으로 향했다.
낡은 드레스 차림에 얇은 스카프를 두른 남이 이모는 오늘도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층계참에 나와 있었다.
“전에 쓰던 그 방이야.”
그녀가 미리 쥐고 있던 열쇠 두 개를 건네며 웃었다.
이윽고 백새벽이 손을 뻗는데, 그녀보다 더 빠르게 손을 내밀어 열쇠를 집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건우였다.
“…….”
선수를 뺏긴 백새벽은 그냥 고개만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잘 지내셨죠?”
장목화가 웃으며 말을 붙였다.
“늘 그렇지 뭐.”
남이 이모 역시 미소 띤 얼굴로 화답했다.
다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던 장목화가 물었다.
“안 선생은 아직도 수업하고 있나요?”
“응, 전이랑 같은 시간에.”
남이 이모는 대답하는 동시에 몸을 틀어 길을 비켜주었다.
구조팀은 전술 배낭을 메고 나란히 이동했다.
복도는 그때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총알구멍만 몇 개 늘어났을 뿐, 서늘한 공기도 여전했다.
* * *
노스 스트리트, 조 씨 저택.
조이덕이 황급히 서재로 들이닥쳤다.
뚱뚱한 몸집에 흰 수염을 기른 남자가 찻잔을 받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무래도 큰아들이 영 못마땅한 듯했다.
“뭘 그렇게 허둥거려? 서른이 넘은 녀석이! 좀 큰일이 닥쳐오더라도 침착할 줄 알아야지!”
조이덕은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버지, 그자들이 다시 왔습니다! 폭탄으로 우리를 위협했던 자들이요!”
쨍그랑!
조기정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동시에 조기정이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몸매와는 달리 매우 민첩하고 날랜 움직임이었다.
“어딨는데?”
“사, 사우스 스트리트요!”
조이덕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살짝 안정을 찾은 조기정이 질문을 이어갔다.
“뭘 하고 있든?”
“길에서 마주쳤습니다. 그 미친놈은 기쁜 얼굴로 저한테 인사까지 했어요! 저는 못 본 척했고요.”
조이덕은 좀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고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온 거냐?”
조기정이 캐물었다.
조이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이제 어떡하죠?”
마음을 다잡은 조기정은 몇 걸음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성주와 다른 이들에게 알려 모두 경계하도록 해야지.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거다. 그들의 동정만 면밀하게 관찰하면 돼.”
조이덕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요?”
조기정은 냉소를 지었다.
“그럼 뭐, 복수라도 하려고? 그 미친놈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지 못하면, 너랑 난 평생 잠도 제대로 못 잘 거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만한 행동력과 능력을 가진 미친놈을 겁내지 않을 수 있겠어? 아무 내력도 없는 녀석들은 아닐 거다. 우리가 지난번에 그렇게 큰 손해를 본 것도 아니었고.”
조이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러는 수밖에요⋯⋯.”
그 순간이었다. 그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
“아버지, 그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해 내내 고민하고 계셨잖아요. 차라리 그들에게 맡기는 게 어떨까요?”
“너 미쳤어?”
조기정은 조건반사적으로 욕을 내뱉다가 서서히 침묵에 빠졌다.
몇 초 후, 조기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안 될 것도 없긴 하지⋯⋯.”
* * *
구조팀이 막 방에 들어와 정비를 시작할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떠나는 해의 긴 그림자가 온 도시에 노을빛 베일을 드리운 듯했다.
장목화는 팀원들이 옷을 갈아입고 아이스모스, 연합202를 잘 숨겨두는 것까지 기다렸다가 다 함께 윤복 총포사를 나가 사우스 스트리트로 향했다.
대형 거점에 이르렀으니만큼 더 이상 통조림이나 압축 비스킷, 에너지 바 같은 것으로 연명하고 싶진 않았다.
“전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것 같네.”
용여홍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지금 사우스 스트리트엔 오가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중엔 깊은 산이나 숲에서 나온 듯 보이는 행인도 있고, 구세계 느낌의 옷을 입은 행인도 있었다. 다들 차림새가 각기 달랐다.
차들은 그런 인파를 헤치고 물살을 거슬러 오르듯 느릿하게 움직였으며, 거리 양쪽의 국숫집, 여관, 식당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계속해서 감탄하는 용여홍을 보고, 백새벽이 간단히 설명했다.
“겨울에는 이곳에 오는 유적 사냥꾼이 적잖아.”
봄이 되면 대량의 유적 사냥꾼이 주위 구역에서 각 거점, 혹은 각 세력으로 몰려들어 기회를 찾거나 거래를 했다. 그로 인해 혼란했던 위드 시티도 점차 전과 같은 모습을 되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