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22화 (322/649)

322화. 4월

“아무래도 건우가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야만 답을 알 수 있겠네요.”

용여홍이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

현실 속 늪 1호 폐허의 미스터리한 실험실은 이미 파괴됐다. 그러니 이젠 그곳의 비밀을 찾으려면, 특정인의 꿈이나 기억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염호가 기록해둔 심령의 복도 방들에 꼭 겁쟁이의 원주인이 있으리라 보장할 순 없어. 원주인이 다른 방에서 단서를 얻었을 때 모종의 목적이나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충분한 기운을 남긴 것일 수도 있잖아.

어쩌면 그 원주인의 방이 102호일 수도 있어. 염호가 그 호수 뒤에 체크 표시를 하지 않았다고 거기 딱 한 번만 방문했다곤 볼 수 없어. 첫 방문에선 탐색은 다 하지 못했는데 겁쟁이 기운은 성공적으로 얻었고, 그 이후 두 번, 세 번째 탐색을 진행하던 중에 더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건지도 몰라.”

짝짝짝!

때맞춰 성건우가 손뼉을 치자, 장목화는 늘 그랬듯 그를 째려보았다.

“넌 앞으로 다른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나 지켜봐. 우리는 그동안 회사에 늪 1호 폐허에 관한 기록을 받을 수 있는지 볼게.”

장목화는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쌓여있는 자료를 살폈다.

* * *

그 후 구조팀의 퍼스트 시티를 향한 여정 준비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네 사람은 시간 대부분을 개인 훈련과 퍼스트 시티에 대한 각종 조사에 들였고, 지상으로도 세 번 정도 나가서 야외 훈련이나 군용 외골격 장치의 심층적인 파악을 진행했다.

성건우는 더 이상 기원의 바다에서 황녹색 안개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장목화의 예상과 달리 네 번째 섬도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195층 B 구역 23호 방은 자유연애로 결혼한 한 부부에게 배급됐다. 입주 후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정말 용여홍과 성건우가 겪은 일은 한바탕 꿈이었던 듯했다.

마찬가지로 반고 바이오 내 천연 교파 세력 또한 이미 완전히 제거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후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 4월이 되었다.

장목화는 647층 14호 방에 서서, 엄숙한 얼굴로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내일이 출발 예정일이야. 혹시 다른 생각 있어?”

그러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지난달 토론을 거쳐 결정한 출발일이었다. 다들 이미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었다.

장목화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이대로 결정난 거다? 오늘은 일찍 퇴근해. 지금 당장 가도 좋아.”

“네, 팀장님!”

백새벽, 용여홍, 성건우가 입을 모아 한 목소리로 외쳤다.

* * *

622층, B 구역, 59호.

백새벽이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몇 안 되는 가구들이 간단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벽에 붙은 침대 하나, 창문 앞 테이블 하나, 테이블에 딸린 의자 하나, 침대 옆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내부는 단정하고 깔끔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백새벽은 불도 켜지 않고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창밖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몸 절반이 그 빛에 뒤덮여 있었다.

잠시 후, 백새벽이 손을 뻗어 책상에 딸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엔 낡아빠진 기계 부품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부품표면엔 수도 없는 균열이 나 있었으며, 색은 매우 어두웠다.

이후로 백새벽은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손에 쥔 부품만 바라보았다.

* * *

349층, C 구역, 12호.

장목화는 8시가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부모님께 미리 전화해 안전부 소형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갈 테니 자신의 것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뒀었다.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러다 장목화는 창문 앞 의자에 앉아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기대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 장문봉을 발견했다.

“눈 나빠져요!”

장목화가 곧장 거실 형광등을 켜자, 실내가 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이내 장목화는 눈가를 비비는 아버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빠, 이렇게 아껴봤자 에너지를 얼마나 아낀다고요. 아빠는 매달 배급된 양도 다 안 쓰시잖아요!”

그녀는 장문봉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좌우를 보며 물었다.

“엄마는요?”

“놀러 나갔다.”

장문봉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기회다.’

장목화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장문봉 옆에 앉았다. 그리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아주 여유롭고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빠, 저 내일 임무 나가요.”

장문봉은 노안용 돋보기안경을 벗고 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어디로 가니?”

“퍼스트 시티요.”

장목화도 순순히 답했다.

“아, 거기. 좋은 데지. 나쁜 곳이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문봉은 옆쪽 작은 테이블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와 몇 마디 얘기 끝에 전화를 끊은 그가 다시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황 씨가 퍼스트 시티 원로원의 마이어스라는 원로와 꽤 친해. 혹여나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는데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회사 지원을 받기에 시간도 부족하다면 이 원로를 찾아가 황 씨 이름을 대면 된다.”

“네.”

장목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봉이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자, 몇 초간 침묵하던 그녀는 아빠의 팔뚝을 끌어안고 머리를 기댔다. 그런 뒤, 전방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물었다.

“아빠, 제가 너무 멋대로고, 이기적인가요?”

장문봉은 반대편 손으로 딸의 팔을 토닥이며 웃었다.

“네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엔 회사 사람들 모두가 일에 열심이었단다. 회사 내부 순환을 완벽하게 보완해 다 함께 종말을 안전히 보낼 수 있게 밤낮으로 일을 쉬지 않았다는 거야. 어떤 사람은 이를 위해 희생했고, 어떤 사람은 병을 얻고, 어떤 사람은 가족과 친구를 잃었지만 후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더라.

네 할아버지께선 나한테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어. 지하에 남아있는 건 영구적인 해법이 아니라고.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태양 아래 놓여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난 네 이상을 이해한다.”

말 사이 공백에 숨은 아빠의 마음이 이해돼, 장목화도 말이 좀 느려졌다.

“……괜찮으세요?”

장문봉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괜찮아도 어떡하겠냐. 자식이 크면 자연히 부모 품을 떠나는 거지.”

장목화는 아빠에게 더 바짝 기대며 웃었다.

“그럼 이따 엄마를 위로할 때 좀 도와주세요.”

“나까지 끌어들일 셈이냐?”

피식 웃는 장문봉을 보고, 장목화도 따라 웃었다.

“설 여사 한 번 화나면 저한텐 아빠한테 기대는 수밖에 없잖아요.”

장문봉은 다시 앞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네 엄마는 말은 칼일지 몰라도 마음은 두부야. 네가 임무를 나갈 때마다 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수시로 눈물만 훔치기 바빠.”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목이 메어, 눈을 꼭 감았다.

“우리 설 여사님 드릴 선물, 잊지 말아야겠네⋯⋯.”

* * *

495층, C 구역, 11호.

용여홍의 다섯 가족은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완전 진수성찬이네.”

용애홍이 소고기 조림을 먹으며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내가 오늘 좀 일찍 퇴근했거든. 그래서 음식을 조금 더 준비했어.”

용여홍이 웃으며 대꾸했다.

“오빠가 매일 일찍 퇴근하면 좋겠다.”

용애홍이 꿈에 부푼 소리를 하자마자, 고홍자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매일 일찍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 아니면 백수인데, 넌 너희 오빠가 더 승진하지 않길 바라는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용애홍이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다 용애홍이 이야기하는 이 틈에, 몰래 고기 몇 조각을 더 집어가는 둘째 오빠 용지고를 보고 황급히 식사에 열중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무렵, 가족들을 둘러보던 용여홍이 대수롭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내일 임무 하러 나가요. 빠르면 한 달 정도 있다가 돌아올 거예요. 늦으면 몇 달 더 걸릴 거고요.”

전에 몇 차례 진행했던 외부 훈련과는 전혀 다른 기간이었다.

탁!

고홍자의 젓가락 한쪽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얼른 다시 집어 든 고홍자가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어디로 가?”

“퍼스트 시티요.”

용여홍은 상세한 이야기 대신,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젓가락만 꼭 쥔 고홍자는 한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용대용이 허리를 곧추세우며 묵직하게 말했다.

“만사에 조심해라. 나와 네 엄마는 아무것도 도울 수가 없구나. 집안일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밖에 해줄 게 없네. 밖에 나가면 팀장님 말씀 잘 듣고. 너보다 경험이 풍부하니 훨씬 더 나은 결정을 내릴 거야. 어떤 상황이 와도 지나친 영웅심 같은 건 발휘하지 마. 최대한 상황을 살피고 기다리⋯⋯.”

결국 용대용도 목이 메어 더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러자 고홍자가 코를 훌쩍거리며 말했다.

“얇은 스웨터 가져가는 거 잊지 마. 4월이라도 땅 위는 쌀쌀하니까.”

역시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한 그녀는 어느새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예.”

이미 용여홍의 시야도 부옇게 흐려진 상태였다.

끝으로 옆에 앉은 두 동생은 말없이 힘내라는 듯한 손짓만 취했다.

* * *

495층, B 구역, 196호.

언제나처럼 침대에 누운 성건우는 어둠에 잠긴 채 라디오 방송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늘 오전 9시, 이사회에서 금년도 제3차 관리층 회의를 열어 빅보스의 연말 담화를 복습했습니다. 회의에선 이사회 이사, 기택조 부총재가 일사분기 생산, 연구 및 무역 상황을 통보했습니다. 일사분기 생산, 연구 및 무역은 안정적으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관리층 회의에서는 앞으로 일주일간 고기, 달걀, 우유의 공급을 늘리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안전부 최신 보고에 따르면, 황야 위 강도들의 활동 빈도가 작년과 같은 기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봄맞이 탁구 시합이 막을 내렸습니다. 최종 승리는 580층 대표팀입니다.

올해 1차 베이비 붐이 도래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개혁이 안정적으로 추진 중입니다.

오늘 황야 구역의 기온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성건우가 C 구역으로 왔다.

용여홍은 이미 집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나란히 걸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두 친구는 곧 647층에 도착했다.

이어 성건우, 용여홍은 소형 탈의실에서 제복으로 갈아입은 후 각종 물건으로 가득 찬 전술 배낭을 맨 다음 14호 방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 두 사람은 이제 막 여자 탈의실에서 나오던 백새벽과 만났다.

그렇게 세 사람이 다 함께 구조팀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일찍이 준비를 다 마치고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던 장목화가 뒤돌아섰다.

그녀는 팀원들을 한번 둘러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자!”

장목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가 얼른 덧붙였다.

“전 인류를 구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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