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여는 방식
성건우의 답에 장목화의 심경은 퍽 복잡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두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성을 찾고, 무리하게 성건우 같은 행동을 하진 않았다.
그때, 곁에 있던 용여홍이 약간 무기력하게 말했다.
“장생 영역의 각성자랑 장생 영역의 신도는 다르잖아.”
성건우는 그를 바라보며 왼손으로 주먹 쥔 오른손을 감쌌다.
“지인은 무아하다. 신세계는 눈앞에 있느니라.”
이번에는 장목화뿐만 아니라 백새벽도 실소가 터졌다.
‘난 진짜 바본가 봐. 왜 맨날 얘랑 논쟁하려고 하는 거지.’
용여홍 역시 후회하며 깊은 자아 성찰에 빠졌다.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자, 백새벽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말했다.
“생체 공학 의수는 나중에 다른 유형으로도 바꿀 수 있나요?”
장목화는 이 분야에서는 준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할 말을 고른 후에 답을 이었다.
“이론상으론 가능한데, 실제로는 생체 공학 의수 종류에 따라 개조하는 신경과 처리하는 거부 반응이 달라서, 강제로 의수 유형을 바꾸면 몸에 꽤 무리가 갈 거야.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면 그걸 추천하진 않아. 음, 만약 네 의수가 고장 난다면 같은 유형 의수로 바꾸는 게 더 간단하고 안전해.”
한동안 침묵하던 백새벽이 답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볼게요. 더 좋은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신청할래요.”
장목화가 칭찬했다.
“똑똑하네! 별로 좋지도 않은 의수를 굳이 이식받을 필요는 없지. 넌 팔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쨌든 너한텐 군용 외골격 장치도 있잖아? 그러니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
이후 장목화는 용여홍을 돌아보고, 구조팀에서 근무 기간 2년 정도를 채워야 부서를 옮길 수 있다는 사실도 전했다.
용여홍은 그 사실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안도의 한숨도 작게 내쉬었다.
“앞으로 1년 동안은 외근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웃으면서 말하던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탁 트인 하늘을 보며 감정을 다스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곳은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이었다. 이곳 창밖으로 볼 수 있는 거라곤 거리가 아닌 복도, 빛나는 태양이 아닌 형광등뿐이었다.
복도 맞은편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벽과 창문, 나무 문, 그 위쪽으론 한 조각씩 연결된 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약간 멍한 얼굴이 된 용여홍은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
곧이어 장목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음, 내 생각엔 우리 작은 흰둥이의 뼈가 완전히 붙고, 지하 방주를 안정시킨 게네바가 위드 시티로 가 있을 4, 5월쯤에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물론 그동안 계속 쉴 순 없지. 2, 3주 정도 후엔 지상으로 나가서 단기 훈련도 진행할 거야. 야외 생존 기술을 잊어버리거나 하면 안 되니까.”
“네, 팀장님!”
성건우가 매우 큰 소리로 답했다.
“야! 난 귀가 그냥 좀 안 좋은 거지, 완전히 먹은 게 아니라고!”
이젠 일상처럼 성건우를 한번 타박한 장목화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백새벽과 용여홍의 뜻을 구했다. 그러자 두 사람 역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목화는 다시 빙그레 웃으며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시간이 꽤 넉넉하니까 어머님께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달라고 부탁해봐. 하하, 어쩌면 출발하기 전에 국수를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팀장님, 우리 반고 바이오 결혼식에 국수 같은 건 안 나오는데요⋯⋯.”
용여홍이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대부분 다 공동결혼식을 올리는 이곳에선 모든 게 간략화돼 있었다. 결혼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각자 집에서 잘 차린 식사나 한 끼 할 뿐이었다. 식량을 낭비하지 않는 건 반고 바이오 직원 모두의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적인 습관이었다.
그러나 관리층까지 그렇게 하는지는 용여홍도 잘 아는 바가 없었다.
“뭐? 뭐라고?”
장목화가 되물었다. 이번엔 정말로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였다.
용여홍은 방금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말해주셨는데, 결혼 생각이 있는 아가씨야 많대요. 근데 그분들 집에서 저랑 결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그냥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고 하더라고요.”
장목화도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신입이 단숨에 D5로 승급한 데다 큰 집으로 이사도 하고, 대량의 공헌점수와 휴대용 컴퓨터까지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용여홍은 안전부 소속이었다. 원래도 위험도가 높기로 유명한 부서인데, 그곳에서 일하는 남자를 선뜻 사위로 맞기는 꺼려질 터였다.
어느 부모가 딸에게 남편 잃은 슬픔을 안기고 싶겠는가.
곧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앞으로 반년만 더 있으면 또 공동결혼식이 진행되잖아. 그때는 너도 결혼할 수 있겠지.”
반강제적인 공동 결혼에 저항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때 성건우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낌새를 보고, 장목화가 다시 황급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식 직원이 된 작은 흰둥이도 공동 결혼 대상에 포함될 텐데, 너희 둘이 한 쌍이 되면 그것도 참 볼만 하겠다.”
흠칫 놀란 용여홍은 정말로 그 상황을 상상해보다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그는 어느새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중얼거렸다.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일어날 리가요⋯⋯.”
백새벽은 이에 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심드렁하게 장목화를 쳐다보며 무심히 대꾸할 뿐이었다.
“팀장님이랑 건우도 포함될 텐데요.”
장목화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아니지, 유전자 개조를 받은 내 몸 상태가 안정됐는지 그에 대한 최종 결론이 아직 안 났거든.”
뒤이어 그녀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아, 트레이닝 룸 가자. 4, 5월에 퍼스트 시티로 갈 준비를 해야지!”
* * *
495층, B 구역 196호.
정각 뉴스가 끝난 뒤, 성건우는 곡물 낟알을 채운 베개에 기대어 손을 들고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게 기원의 바다로 들어간 그는 지난번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수평선 위로 나타난 옅은 황녹색 안개를 목격했다.
곧장 천으로 눈을 가리고 솜으로 귀를 막은 그는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할 방식으로 앞을 향해 헤엄쳐 나갔다.
점차 피로가 몰려들 무렵, 성건우는 귀를 막은 솜을 빼고 눈을 가린 천을 거뒀다. 그때처럼 손 뻗으면 닿을 곳에 황녹색 안개가 자리해 있었다. 신기루 같던 도시도 지척이었다.
성건우는 재빨리 안개를 관통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탔던 자전거는 그가 일부러 세워둔 곳이 아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그 자전거에 오른 성건우가 미스터리한 그 실험실로 향했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성건우는 당황한 기색 없이 사방을 관찰했다.
거리엔 차들이 매우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다. 자전거 등을 이용해야만 겨우 관통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는 등불이 켜진 이후 도시 곳곳을 정리하는 무심자들이 없는 듯했다.
길가에 쌓인 낙엽은 썩어가고 있었고, 특정 구역엔 대량의 혈흔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나 무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시간은 저녁 무렵에 고정된 모양이었다. 그때와 같이 석양빛을 받은 유리 벽이 활활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주위를 살피며 나아가던 그때, 도시 모처에서 돌연 처량하고 탁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아우우우우=!”
순간 강한 두려움이 성건우의 마음을 움켜쥐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호응하는 존재가 없어서 그런지 이 포효는 금세 잦아들었다. 메아리만 2초 정도 유지되었을 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성건우가 이내 한 발을 땅에 디디고 섰다.
“정상적인 포효보다 훨씬 약하네.”
그의 목소리에선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다시 허리를 살짝 숙인 성건우는 페달을 빠르게 밟아, 조금 전 그 포효가 들려온 곳으로 돌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건우는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주위 다른 건물들에 비해 한참 낮은 이 건물은 겨우 3층에 불과했다. 전방엔 주차장을 겸하는 정원이 딸려 있었고, 전체적으로 은회색을 띤 건물이 지는 태양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유려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건물은 순수 합금으로 이뤄진 듯 굉장히 튼튼해 보였다. 두 짝으로 이뤄진 대문도 매우 묵직해 보였으며, 그 옆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버튼이 있었다.
다만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간판이나 현판이 걸려 있지 않았다.
이때 포효가 한 번 더 울려 퍼졌다.
포효는 이 건물 지하에서 울리는 듯했다.
성건우는 한동안 대문의 버튼을 만지작거렸지만, 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뒤로 몇 걸음 물러난 그가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휘둘렀지만,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성건우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자신을 한 명 더 분리해냈다.
이후 분열된 성건우는 자전거를 타고 도시 가장자리로 달려가, 옅은 황녹색 안개를 관통해 기원의 바다로 돌아갔다.
기원의 바다로 돌아간 성건우는 다음 순간 심령 세계의 특수함에 의지해 몸을 한 번 떨더니 대포들이 장착된 자동차로 변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발산하는 이 차는 곧장 황녹색 안개 안으로, 이 도시를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현판 없는 건물 앞에 이른 차가 진짜 성건우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자 대형으로 배치한 대포들이 묵직한 대문을 겨냥했다.
일찍이 옆으로 물러나 있던 성건우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준비, 발포!”
콰광! 콰광!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포성 아래 건물 대문에 포탄이 쏟아졌다.
일련의 포격 이후, 대문에 드디어 균열이 일어났다. 주위 벽은 벌써 다 무너져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다시 한 차례 포격을 더 가하려는데, 돌연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지면은 빠르게 갈라졌고, 건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된 도시 전체는 허상으로 변했다. 도시를 뒤덮은 황녹색 안개도 빠르게 흩어져 사라졌다.
성건우는 전방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는 건 공기뿐이었다. 그는 이미 미약한 빛이 번득이는 기원의 바다로 돌아와 있었다.
앞을 바라보던 성건우가 짤막한 평을 내렸다.
“너무 약하네.”
그 후 황녹색 안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출근한 성건우가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했다.
“설마 그 미스터리한 실험실이 꿈속 도시의 핵심이 아니었던 건가?”
용여홍이 추측했다.
그 말에 장목화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건우의 포격이 너무 큰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인지도 몰라. 난 심지어 겁쟁이의 잔여 영향이 이미 완전히 제거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황녹색 안개는 다신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백새벽도 용여홍을 보고 의견을 표했다.
“그건 원래부터 꿈의 일부 흔적이었으니까. 디마르코의 온 힘을 다한 폭발까지 겪었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강할 리는 없지.”
“아쉽네. 그 실험실 안에 뭐가 있었는지 보고 싶었는데.”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 손바닥을 내리쳤다. 아마 다른 방식을 시도해봤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를 보고 장목화가 웃었다.
“조금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잖아. 기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어. 원래 주인에 대응하는 심령의 복도의 방을 찾아서 그의 꿈이나 기억 세계에 진입하기만 하면, 그 미스터리한 실험실의 베일을 벗길 수 있을 거야.
음, 나도 상부에 한 번 신청해보려고. 혹시 회사에서 최근 몇 달간 늪 1호 폐허에서 뭔가 발견한 게 있는지 확인해 보게.”
그러자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심령의 복도에 방이 그렇게 많은데, 그 방을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
그는 말을 맺자마자, 동시에 자신에게 쏠린 세 사람의 시선과 마주했다.
용여홍은 그제야 깨달았다. 황녹색 기운 주인의 방은 염호가 남겨둔 숫자 중에 포함돼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1210, 757, 935, 314, 329.
이는 염호가 수색한 뒤 순조롭게 빠져나온 방의 호수였다. 그러니 분명 그가 얻은 수확도 그 방들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