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19화 (319/649)

319화. 모두의 기쁨

다음 날 오전, 647층 14호.

성건우의 진술을 다 듣고, 장목화가 물었다.

“기원의 바다에서 황녹색 안개를 봤는데 거기 구세계 도시가 있었다고?”

“네.”

성건우의 답은 단호했다.

장목화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네 심령 세계에 겁쟁이 기운을 들인 후유증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디마르코에게 대적했을 당시, 성건우는 야명주 안의 황녹색 기운을 자신의 기원의 바다로 들였었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성건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약간 신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장목화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C 구역 23호에 들어갔을 때 복도보다 더 싸늘해진 것 같았다고 했지? 디마르코가 의식 생명으로 전환했을 때처럼.”

“네.”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백새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장목화가 다시 용여홍과 성건우를 향해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 너희가 벌거벗고 뛰어다니던 천연 교파 구성원을 본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 설령 그게 환각이었다고 해도 우연은 아닐 거야. 어쩌면 건우의 심령 세계 속 황녹색 안개랑 관련 있지 않을까?”

장목화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용여홍은 혼란스러웠다.

“그게 관련될 수 있나요?”

장목화가 상세히 설명했다.

“디마르코가 그랬잖아. 심령의 복도 급 강자의 기운을 본인 의식에 멋대로 들이면 안 된다고. 그럼 그 기운의 주인을 건드리기 쉽고, 기운의 주인은 그 사람의 심령을 포착해 문을 열지도 않고 그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건우는 이미 겁쟁이 기운 대부분을 디마르코한테 사용한 상태야. 근데 아직도 그 기운 일부가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

이러한 상황이 그 기운 원주인의 주의를 끌었고, 그로 인해 건우 주위에 일반인은 감지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면?

그 이상 현상이 회사 내에 숨어있는 강자의 관심을 끌었거나, 원래부터 존재하긴 했어도 눈에 띄지는 않았던 모종의 문제가 활성화되고 23호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너희를 환각에 빠뜨린 거라면?

너희가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천연 교파의 신도를 목격한 건 그때 마침 나눈 그 사건에 관한 얘기가 환각에 반영됐기 때문인 거야.

하, 심령의 복도 급 강자에 대한 건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지금은 그냥 추측밖에 할 수가 없네. 뭐 하나 검증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어째서인지 용여홍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좀 기뻐했다.

“맞아요. 근데 어떻게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어요? 사실 우연의 배후에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이런 식으로 우연한 일이 생긴 건 성건우 때문이었다.

이내 성건우가 웃었다.

“근데 이 추측으론 그런 현상이 마침 그때, 네가 나한테 천연 교파에 대해 말해줬을 때 일어났는지에 관해선 설명이 안 돼.”

용여홍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목화는 추측을 그치지 않았다.

“천연 교파랑 관련한 소식이 촉발점인 거 아닐까? 여홍이를 안 만났다면 너도 소등 시간 이후에 C 구역에 접근할 리는 없었겠지. 어두운 밤, 오랫동안 비워진 방이란 조건이 있어야만 그런 이변이 생기는 건지도 모르고.”

“제 생각에는 후자가 가능성이 좀 더 클 것 같아요.”

백새벽은 두 번째 가설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용여홍은 불운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 봐요.”

성건우가 짤막한 평을 남겼다.

장목화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23호 관련 사건은 이미 회사에서 비밀리에 해결했을 거야.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앞으론 거기 다른 이상 현상이 발생하는지만 살피면 돼.

건우 넌 기원의 바다에 남은 그 황녹색 안개를 최대한 빨리 해결할 방법부터 생각해봐. 그래도 지금은 믿을 구석이 있는 회사 안이니까 나은 거야. 퍼스트 시티로 간 후에는 그것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

겉으로 보이는 영향이 없다고 해도 넌 겁쟁이의 원주인이 네 심령 세계에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거, 꼭 기억해야 해. 하……. 에이돌른의 계획적인 수작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다⋯⋯.”

장목화가 에이돌른을 언급하자,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건우 너, 전에 23호의 문을 열려는데 네 의식이 몸을 떠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지? 문 뒤에 회오리가 있는 것 같았다고. 혹시 에이돌른의 성휘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해?”

“문 뒤에서 이쪽을 몰래 내다보고 있는 여자의 인영⋯⋯.”

그 대신 질문에 답하던 용여홍이 순간 말을 멈췄다.

말을 하면서 백새벽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문!”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의미상 관련 있는 것 같긴 한데, 에이돌른의 주시랑은 다른 느낌이야.”

성건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랑 같은 중압감은 없었거든.”

“맞아, 또 에이돌른이라면 건우 몸에 디마르코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거야.”

장목화가 가장 강력한 증거를 댔다. 자신의 교회당과 신도들을 주시하길 좋아하는 달지기가 당시 지하 방주에서 벌어진 전투를 놓쳤을 리 없었다.

구조팀은 더 이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아무튼 일단 그 황녹색 안개부터 해결할 방법을 찾자. 수시로 상황 알려줘.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게.”

“이미 같이 회의하면서 몇 가지 방법을 마련했잖아요.”

성건우는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건지, 걱정시키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장목화가 소파 쪽을 가리켰다.

“물건 도착했어. 각자 것 찾아가면 돼. 휴대용 컴퓨터는 각자 한 대씩이야.”

그리고 그녀가 백새벽에게 자료 한 뭉치를 건넸다.

“이건 네가 현 등급에서 이식할 수 있는 생체 공학 의수. 잘 살펴보면서 생각해봐.”

“네.”

백새벽이 자료를 받아들었다.

성건우와 용여홍도 그것에 더 호기심을 느꼈는지, 다들 백새벽 곁에 모여 그녀가 든 자료를 함께 살폈다.

「고양잇과 형 생체 공학 의수 : 강력한 폭발력과 숨겼다 펼쳤다 할 수 있는 강인한 손톱을 가지고 있음.

구렁이 형 생체 공학 의수 : 강한 탄성과 조르기 능력이 있으며 여러 상해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음.

⋯⋯」

장목화는 빙그레 웃으며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왜, 너도 하나 장만하려고?”

용여홍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필요 없어요.”

군용 외골격 장치가 있는 한, 본래 신체를 잘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피식 웃던 장목화가 서서히 웃음을 거뒀다.

“여홍아, 아직도 구조팀을 나가고 싶어? 내가 한 번 더 신청해줄 수 있어.”

구조팀은 곧 위험한 퍼스트 시티에 갈 예정이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용여홍이 말했다.

“네, 근데 지나치게 강력하게 요구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강력하게 요구한다 해도 소용없어.”

자조하듯 웃던 장목화가 이번엔 백새벽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새벽이 넌? 이제 개조 자격도 얻었는데 다른 팀에 가고 싶지 않아?”

백새벽은 쥐고 있던 자료에서 눈을 떼고,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개조를 원하는 건 퍼스트 시티에 한 번 더 가고 싶어서예요.”

장목화가 살짝 입을 벌렸다.

“아, 난 네가 우리 동료들을 떠나기 싫어서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장목화의 눈빛엔 장난기 어린 웃음이 맺혀있었다.

백새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료로 눈길을 돌렸다가, 몇 초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안에 답을 드릴게요.”

“좋아.”

자리로 돌아와 앉은 장목화는 컴퓨터를 켜고 용여홍을 위한 신청서를 썼다. 작성을 마친 후엔 바로 인쇄도 끝냈다. 안 그래도 본래 부부장 사무실에 갈 일이 있어, 그 김에 신청서도 제출할 생각이었다.

* * *

646층, 부부장 사무실.

제니가 신청서를 들고 한번 쓱 훑더니 웃음을 지었다.

“1년도 안 돼서 직무를 옮기는 사람이 어딨어? 어디 몸을 다치고, 잃은 것도 아니고. 이 신청을 받아주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신청이 받아지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장목화는 부부장의 말에 웃음으로 응했다.

“그러니까, 1년만 채우면 직무를 옮길 수 있다는 겁니까?”

제니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에 장목화는 계속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체 공학 의수를 이식받는 것도 팔을 잃은 걸로 쳐주시는 겁니까?”

피식 웃던 제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팀장이 되더니 갈수록 능글맞아지네. 안전부 고위험 직군에선 보통 3년을 채워야 직무를 옮길 수 있어. 너희 상황은 더 특수하니 2년도 충분하겠지. 지금처럼 임무를 수행해가면 2년 뒤에 너도, 너희 팀원들도 그땐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부부장님. 근데 제가 각성자가 될 방법이 있을까요?”

기쁘게 답하던 장목화가 조금 머뭇거리다 떠보듯 물었다.

제니는 약간 놀라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장목화도 웃으며 말했다.

“밖에서 많은 위험한 일과 맞닥뜨리면 자연히 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제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회사에서 그 방면에 관한 연구랑 시도도 하는 중인데 아직 그렇다 할 결과는 없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밖엔 못 하겠네.

그래도 시도하겠다면 마취제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야 해. 모든 과정이 비밀리에 이뤄지거든. 성공 가능성도 크지 않고.

그리고 깨어난 후엔 각성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후유증을 앓게 될 거야. 지금 당장 결정 내릴 필요는 없어.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 답해도 돼.”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귀에 달린 금속 와우를 만지작거렸다.

* * *

495층, C 구역, 11호.

용여홍은 안방 겸 거실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감상했다.

지금 그는 이웃 주민들에게 둥그러니 둘러싸여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에게 관심이 집중된 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휴대용 컴퓨터에 이목이 쏠린 거였다.

원래 용여홍은 동생들에게 휴대용 컴퓨터의 기본 기능을 가르쳐주고, 동생들의 학업에 방해되지 않게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만 구세계 콘텐츠를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진 걸까?’

조금 전, 용여홍의 집으로 웬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선, 용여홍에게 휴대용 컴퓨터와 구세계 콘텐츠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또 그다음엔 동생들이 친구들을 데려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구세계 콘텐츠를 통해 식견을 넓히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까지 잔뜩 기대에 차서 기다리는 걸 보니, 용여홍도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심사에 통과한 드라마 한 편을 재생해야만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다들 어떻게 구세계 콘텐츠를 아는 거야? 어떻게 그 제목까지 정확히 대면서 틀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 거냐고……?’

용여홍은 혼자가 된 듯한 이 낯선 기분 속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한 중년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는 아버지가 보였다.

“오늘 너무 늦게 왔어. 내일은 자네 자리 하나 맡아줌세!”

어머니는 아줌마들 무리에 둘러싸여 만면에 희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또 그녀는 주변 지인들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봐. 우리 여홍이한테 계속해서 틀어달라고 말하면 돼!”

용지고와 친구들은 각각 빈틈에 끼어 앉아 드라마 내용을 진지하게 토론 중이었다. 미처 집으로 들어오지 못한 문밖의 아이들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려 애쓰고 있었다.

용애홍도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친한 친구들을 끌고 들어와 본인 자리에 앉았다.

가족들을 찬찬히 둘러보니, 어느새 용여홍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이내 용여홍은 몸을 낮춰 버튼 몇 개를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가상 화면이 떠오르더니, 드라마가 더 크고 또렷하게 재생됐다. 덕분에 멀찍이 있던 이들도 전보다 더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들으며, 용여홍은 동생 용애홍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매우 의혹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애홍아, 근데 나한테 이런 자료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용애홍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건우 오빠가 아까 활동 센터에서 발표하던데? 오빠가 가져온 이 컴퓨터에 어떤 드라이브, 어떤 폴더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까지.”

“…….”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용여홍의 안면에는 살짝 경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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