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15화 (315/649)

315화. 천연 교파

집에 딸린 작은 화장실을 쓰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용여홍은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공용 화장실로 향했다.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C 구역과 B 구역의 경계에 있었다.

직원 대부분은 샤워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잘 준비 중이었다. 그래서 용여홍이 화장실로 가는 도중에 마주친 이들도 겨우 두세 명뿐이었다.

어둑한 복도를 비추는 노르스름한 손전등 빛이 이리저리 오가며 공용 화장실 윤곽을 비추고, 용여홍은 막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때, 용여홍의 눈앞에 갑자기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것도 남자 화장실 문에 매달려 살짝 흔들리는 인영이었다.

예전의 용여홍이었다면 기겁해 뒤로 물러났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많은 일을 경험한 까닭에, 비록 온몸의 털은 쭈뼛 섰지만 그는 그냥 한 손만 뻗어 눈앞만 가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막 소리치려는데, 남자 화장실 문에 매달려 있던 인영이 가볍게 뛰어내려 용여홍의 바로 앞에 착지했다.

용여홍이 든 손전등 빛 아래, 서서히 인영의 윤곽이 잡혔다.

곧게 난 눈썹, 반짝이는 눈동자, 강하고 선이 또렷한 이목구비, 빼어나게 잘생긴 얼굴.

“…….”

성건우였다.

용여홍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물었다.

“문에는 대체 왜 매달려 있었던 거냐?”

“네가 오는 거 보고 인사나 하려고.”

성건우가 태연하게 답했다.

“……이게 인사야?”

“늘 틀에 박힌 방식으로 인사하는 건 재미없잖아. 새로운 방식을 한번 개발해봤어. 이러면 네 담력이랑 반사신경도 단련시킬 수 있잖아.”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진짜 너무 고맙다. 바깥이었으면 벌써 총 쐈을지도 모르겠네!”

용여홍도 이젠 서서히 안정을 찾은 것 같아서, 성건우가 피식 웃었다.

“아니, 넌 못 쐈을걸.”

“…….”

용여홍은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몇 초 후, 용여홍이 다시 한숨을 토하며 힘없이 손짓했다.

“문 막지 말고 비켜.”

성건우는 순순히 한쪽으로 물러났다.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용여홍은 순간 천연 교파 이야기가 떠올라 성건우를 붙잡았다.

“가지 말고 기다려. 할 얘기가 있으니까.”

“알았어.”

성건우가 사뭇 진지하게 대꾸했다.

* * *

용여홍은 손을 씻고 나와 성건우를 데리고 공용 화장실 근처 복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천연 교파의 대략적인 이념과 기이한 의식을 공유했다.

“그 사람들이 믿는 달지기는 누굴까?”

가만히 듣던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음, 지금 나는 목화 팀장님 모드가 아니라서 답을 해줄 수가 없어.”

‘……그래, 내가 멍청한 놈이지. 그냥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구조팀 사무실에서 얘기하는 건데.’

용여홍은 느릿하게 숨을 토해내며 손을 흔들었다.

“난 이만 가서 잔다.”

동시에 그가 든 손전등 불빛이 C 구역으로 이어진 통로로 향했다.

그 찰나의 순간, 멀리 떨어진 길목에 한 사람의 인영이 언뜻 비췄다.

미약한 불빛이지만, 용여홍은 상대가 홀딱 벗은 상태임을 확인했다.

상대는 남자였다.

“어⋯⋯. 봤어?”

어버버하던 용여홍이 옆에 있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눈 썩을까 봐 안 봤는데.”

처음에 용여홍은 성건우가 정말로 그 해괴한 존재를 보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세 성건우의 답이 어불성설임을 깨달았다.

‘보지도 않았는데 눈이 썩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용여홍은 그냥 성건우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자문자답했다.

“천연 교파에서 체포되지 않은 사람인가?”

“공중도덕 의식이라는 게 없네.”

성건우는 그에 질세라 한발 더 나아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용여홍이 손전등으로 멀리 떨어진 길목을 한번 비춰보았다.

“그냥 발작한 정신병자인가?”

왠지 자신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사는 이곳 반고 바이오엔 매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몇 명씩 나오곤 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얼마든 기이하고 해괴망측한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한테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빼앗긴 사람일 수도 있지.”

넌지시 건넨 성건우의 말에, 용여홍이 친구를 홱 노려보았다.

“야, 여기가 땅 위냐?”

반고 바이오 내부에선 그런 악질적인 사건은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 때문에 타인의 옷을 훔치는 그런 일은 여태껏 발생한 적이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 역시 정신병 환자가 저지른 짓일 터였다.

그때, 성건우가 홀연 웃으며 말했다.

“너희 집 근처인데.”

‘뭐?’

용여홍은 성건우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듣진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용여홍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천연 교파의 신도로 의심되는 그 사람이 들어간 C 구역 방은 용여홍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았다.

이제 성건우의 인간 의식 감지 범위는 30미터로 늘어난 상태였으니, 이는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이었다.

쿵…….

용여홍은 순식간에 제 심장이 저 아래로 추락하는 소리를 들었다.

“질서감독실로 가서 신고할까?”

용여홍이 손전등으로 어두운 복도를 비추며 물었다.

그러자 성건우가 왼손바닥으로 오른손에 쥔 손전등으로 박수를 쳤다.

“좋은 방법이야.”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자.”

이 층의 질서감독실은 C 구역 활동 센터 옆에 자리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가 갑자기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생각났어.”

“뭐가?”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심도환 아저씨 말이야. 질서감독실에 생명 제례 교단을 신고하러 갔다가 거기 들어가자마자 무심자로 변했잖아⋯⋯.”

용여홍은 목덜미의 털이 쭈뼛 치솟았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자가 자신을 뒤덮는 것만 같았다.

그가 다시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때랑 다르지. 천연 교파는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잖아.”

용여홍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러기엔 방금 그자가 사는 곳은 자신의 집과 너무나 가까웠다. 본래 남이 눈 똥에 주저앉고 애매한 두꺼비 떡돌에 치인다고 하지 않던가.

“난 그냥 너한테 조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성건우는 어느덧 또 멀쩡한 사람처럼 대꾸하곤, 손전등을 쥔 채 멀찍이 자리한 길목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용여홍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그러는 사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간 그는 그제야 익숙한 아이스모스와 연합 202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묵직한 어둠 속, 두 줄기 손전등 불빛이 전방을 비췄다. 아직 사방이 고요하지는 않았다. 이제 막 잠자리에 누웠거나 아직 잠들지 않은 직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던 용여홍은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여기는 질서 감독실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

지하 빌딩의 길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성건우는 손전등을 휘휘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일단 그 사람을 찾아서 얘기 한번 해 보자.”

“그 사람이라니?”

용여홍은 질문을 함과 동시에 성건우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조금 전 목격한, 천연 교파의 구성원으로 의심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용여홍이 물었다.

“그자가 왜 천연 교파에 가입했는지, 만회의 여지가 있는지 보려고?”

질서 감독실에 신고할지 말지는 그 후에 결정해도 될 일이었다.

이에 성건우가 고개를 돌려 용여홍을 빤히 쳐다보았다.

“천연 교파의 성찬이 뭔지 물어보려고.”

당연한 걸 굳이 왜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래야 너지⋯⋯.’

용여홍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성건우 역시 자신이 방금 했던 생각까지 했으리라 짐작했다.

* * *

곧이어 두 친구는 한 방 앞에 도착했다.

문패에 새겨진 번호는 23, 495층의 C 구역 23호였다.

그리고 이 방의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여기야?”

용여홍이 잔뜩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던 성건우가 스트레칭을 하며 용여홍에게 말했다.

“넌 좀 떨어져 있어. 뒤에서 나 지원만 해주면 돼.”

목소리를 낮게 깐 그에게서는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어, 알았어.”

용여홍은 뒤쪽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친구가 멈추자, 성건우는 그제야 손가락을 굽혀 23호 방문을 세 번 두드렸다.

짧은 침묵 후, 문 안쪽에서 약간 초조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성건우.”

성건우는 예의를 차려 자기소개부터 했다.

“모, 모르는 사람인 것 같은데.”

문 안쪽의 남자가 의혹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성건우가 씩 웃었다.

“상관없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지.”

몇 초간 말이 없던 문 너머의 남자가 외쳤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질서지도자를 부르겠어!”

성건우는 왼손으로 오른손에 쥔 손전등을 쳤다.

“좋아, 좋아.”

문 안쪽의 남자는 문밖에 있는 사람이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을 알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체 뭘 원하는 거냐고!”

“조금 전에 길을 지나다가 널 봤어. 상태가 별로인 것 같던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아?”

성건우가 매우 친절하게 물었다.

그 순간, 문 안쪽에 자리한 남자의 목소리가 약간 날카로워졌다.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이만 돌아가.”

“정말?”

성건우의 얼굴에는 못 믿겠다는 표정이 걸려 있었다.

“정말이야. 난 정말 괜찮다니까. 얼른 가, 가라고.”

급기야 문 안쪽에 자리한 남자의 목소리에서 울음기가 묻어나왔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건우는 손전등을 내려 방문 바닥 틈새를 비춰보았다. 환히 드러난 문틈 사이에 검은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성건우와 몇 발짝 떨어진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용여홍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이 방에 사는 게 누구인지 떠올려 보았다.

C 구역 토박이인 그는 처음부터 이곳에 살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구역 상황은 잘 알고 있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때, 돌연 용여홍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 방에 사는 사람은 없어!”

그의 기억으론, 이 복도에 붙은 방 몇 개는 아직 배급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야, 외근을 나가기 전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용여홍이 다시 말을 정정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외근을 나가 있던 몇 달 동안 이 방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성건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웃으며 재차 23호 방문을 두드렸다.

“이 방에 사는 사람은 없다는데?”

적막에 잠긴 문 안쪽에서는 더 이상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성건우 역시 질문을 이어가는 대신, 돌아서 용여홍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질서감독실로 가자.”

“그래.”

용여홍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했다.

그 복도에서 벗어난 후, 용여홍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왜 계속 안 캐물었어? 곧장 문을 열고 쳐들어갈 수도 있었잖아.”

성건우는 손전등으로 정처 없는 빛줄기를 만들며 덤덤하게 답했다.

“안에 있던 인간의 의식이 사라졌거든.”

“그게⋯⋯.”

순간 용여홍은 온몸이 오싹해져, 입을 다물고 성건우의 뒤만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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