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13대 영역 (2)
9월 만다라 영역 각성자는 욕망을 관장하며 매우 강력한 직감을 갖는다. 이들이 지불하는 대가 역시 이 두 방면과 관련돼 있는데 알코올 중독, 성중독, 비만, 욕망 상실, 감각 상실 등이 그 예다.
10월 에이돌른 영역 각성자는 목표의 감정에 중점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상대의 적의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대가로 안면 신경 마비, 호르몬 장애, 과민 반응 등을 앓고, 지나친 경계심으로 인해 타인의 말에 쉬이 욱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이 정도뿐이다. (*주: 남들의 말에 쉬이 욱하는 건 능력일 수도 있음)
11월 깨진 거울 영역 각성자는 환각 제조에 능하며 상대의 인지 능력을 잃게 하기도 한다. 거울 공포증, 빛 공포증, 물 공포증, 안면 인식 장애, 길치 등이 지불 대가다.(*주: 대가는 최신 정보에 따라 수정됨)
12월 사명 영역 각성자는 심장과 호흡을 관장하므로 매우 위험하다. 안구의 이상과 사지 마비가 현재까지 알려진 대가다.
마지막 1년 혹은 윤달을 관장하는 장생 영역 각성자는 대체로 사고와 의지에 영향을 미치나, 일부는 상대의 동작을 방해하는 능력을 가지기도 한다. 이들은 대가로 사고의 이상, 성격 변화,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보인다.
이상 설명된 능력과 대가엔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존재하므로, 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어떤 판단을 내려선 안 된다.
예컨대 보리 영역과 장생 영역엔 인격 분열과 양극성 장애 등의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소수의 각성자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문제의 근원이 같은지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대가가 일정 정도 심화돼, 같은 특징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내용을 다 살핀 뒤, 장목화가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너, 어쩌면 장생 영역 각성자일 수도 있겠다.”
비약적인 사고나 인격 분열을 대가로 지불하는 영역은 여럿이었지만, 성건우의 능력적 특징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바로 장생 영역이었다.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왼손으로 주먹 쥔 오른손을 감싸 쥐고 참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지인은 무아하다! 신세계는 눈앞에 있느니라.”
‘그대로 영원한 세월 교파로 들어가셔도 되겠네요.’
장목화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지금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구조팀도 이미 상부에서 지급한 자료를 끝까지 다 살폈다.
곧 마우스에 얹은 손을 떼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이따 인쇄해서 나눠줄게. 여러 번 살펴보면서 기억해두자. 중요한 순간에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
자료에는 각성자들의 능력과 대가가 좀 모호하게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건 분명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약속이나 한 듯 오늘 훈련을 취소했다. 대신 각자 위치에서 인쇄된 자료들을 진지하게 읽고 암기하며 토론도 나눴다. 심지어 추가 근무까지 더해, 거의 8시가 다 돼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495층, B 구역, 196호.
성건우가 렌지대 때문에 완전히 열리지 않는 문을 겨우 열었다.
복도 가로등 불빛은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쏟아졌고, 성건우는 외투를 벗은 뒤 다시 문을 잠갔다.
이내 그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침대는 성건우의 긴 다리를 간신히 받아주느라 조금 벅차 보였다.
성건우는 늘 그랬듯 불을 켜지는 않고, 창밖으로 스미는 빛이 닿지 않는 어둠으로 몸을 숨겼다.
어둑해진 분위기 속에,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뉴스캐스터 허정민입니다. 현재 시각은 저녁 8시 정각입니다.
오늘 오전 10시, 회사 이사회 이사를 겸하는 기택조 부총재가 에너지 구역을 시찰하고 새해 명절 동안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한 모든 직원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지표면 기상 관측소는 올해 기후가 상당히 안정적인 추세를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오전 9시, 수자원 보호 위원회에서 각종 오염을 더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수 칩 개발을 완성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오늘 저녁 6시 46분, 532층에서 악질적인 상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카드 게임으로 인한 빚 때문에 발생한 갈등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질서감독부 송대용 부장은 전 직원에게 잠시 내기를 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과하게 할 경우 몸도 상하고 가정까지 망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락부에서 주관하는 신력 47년 라디오 프로그램 개혁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모든 직원분의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립니다.
봄맞이 탁구 시합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숙한 소리가 어둑한 방을 물들이며, 성건우의 표정도 차차 편안해졌다.
* * *
495층, C 구역, 11호. 용여홍의 집.
안방을 겸하는 거실에서 다섯 식구가 제각기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족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용여홍과 지상의 일들을 얘기하고 중이었다.
물론 아직 심사가 끝나지 않아서, 용여홍은 말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일상적인 부분만 이야기했다.
“오빠, 훠궈 만드는 법도 배웠어?”
용여홍의 여동생 용애홍이 기대감에 찬 눈으로 물었다.
용애홍은 아직 열여섯 살밖에 안 됐지만, 키는 거의 170센티미터에 달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와 앞머리를 낸 긴 머리 스타일링 때문에 아주 앳돼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용여홍과 비교했을 때 훨씬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어, 한눈에 보기에도 영락없는 미소녀였다.
용여홍이 웃으며 말했다.
“향신료가 부족해. 물자 공급 시장에서도 구하긴 어려울걸.”
그러다 동생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을 보고, 용여홍이 얼른 덧붙였다.
“근데 간단하게는 만들 수 있을 거야! 내가 내일 시장에서 큰 뼈 두 개를 사서 육수를 내볼게.”
“좋아!”
이번엔 용여홍의 남동생 용지고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된 용지고는 대입 시험을 앞두고 있지만 키는 이미 형보다 3센티미터나 컸다. 이는 반고 바이오 내부에서도 중상위권의 신장이었다.
모두 유전자 개량이 보여준 훌륭한 효과였다.
다들 이렇게 흥분한 이유가 있었다. 훠궈 같은 음식은 직원 식당에선 먹어본 적이 없어서, 용여홍의 가족은 훠궈라는 음식이 뭔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훌륭하네. 한 번 나갔다 왔다고 할 줄 아는 음식도 생기고.”
라디오를 들으며 스웨터를 짜던 고홍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용대용도 웃으며 아내의 말을 받았다.
“앞으로 멋진 아가씨를 만나면 근사하게 대접도 하겠어. 내가 너만 했을 때는 음식이라고는 먹을 줄밖에 몰라서 네 엄마가 날 엄청 미워했어. 그 후에야 나도 천천히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지.”
반고 바이오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청년 중엔 요리를 못하는 이가 태반이었다. 보통은 직원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쪽이 더 편하기도 하고 값도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용여홍이 웃었다.
“훠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육수와 향신료예요.”
그는 전에 먹었던 훠궈를 종류별로 맛깔나게 설명했다. 그러자 용지고와 용애홍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가져와 먹었다.
동생들은 최근 저녁을 먹고도 외출하지 않았다. 용여홍이 가져온 간식 한 무더기와 음료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청소년이 집에 있는 주된 이유는 그들의 마음속 영웅인 용여홍이 들려주는 지상의 다채로운 이야기 때문이었다.
훠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용여홍이 씩 웃으며 말했다.
“휴대용 컴퓨터도 상당히 챙겨왔어. 너희들한테도 한 대씩 주고 싶어서 회사에 신청해두긴 했는데 허락이 떨어질지는 모르겠네.”
가족들은 컴퓨터를 만져본 적은 없어도 직장이나 학교에서 실물을 봤기에, 휴대용 컴퓨터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건 뭐에 쓸 수 있는 거니?”
고홍자가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컴퓨터는 직장에서 일의 편리성을 위해 쓰이는 것일 뿐, 집에선 전혀 필요가 없어 보였다.
용지고와 용애홍도 크게 흥분하지는 않았다. 아직 컴퓨터가 낯설어서, 그것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용여홍은 동생들이 꼭 과거의 자신 같아서, 연하게 웃음을 흘렸다.
“지고는 컴퓨터 미리 익혀두면 좋지. 대학에 올라가서 관련된 전공 공부도 더 쉽게 할 수 있을 테니까. 또 라디오 프로그램을 녹음해뒀다가 나중에 듣고 싶을 때 또 들을 수도 있고.”
동생들 학업을 위해 구세계 콘텐츠에 대해선 언급도 하지 않았다. 구세계 콘텐츠는 잠시 컴퓨터 안의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뒀다가, 동생들이 일을 시작하면 그때 알려줄 생각이었다.
라디오를 녹음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용대용이 중얼거렸다.
“전기가 많이 들진 않나? 배급받는 에너지가 많지도 않은데⋯⋯.”
지금도 이들은 작은 등 하나만 켜놓고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고 있었다.
반면 용애홍은 상당히 신이 난 듯했다.
“오빠, 그래서 언제쯤 받을 수 있는데?”
“그건 회사가 언제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렸겠지? 전에 누가 몰래 밖에서 얻은 물건을 숨겨서 들어왔다가 들켰다며. 앞으로 몇 달간 심사가 엄청 빡빡할 테니까 아마 꽤 걸릴 거 같아.”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고홍자가 고개를 들더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벌써 들었니? 우리 사무실 사람이 그러는데, 엄경태라는 안전부 직원이 그랬다더라고. 사이비 종교 자료가 든 녹음기를 갖고 들어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슨 의식을 거행하던 중에 현장에서 체포됐대. 아이고, 그때 그 방에 있는 사람들 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홀딱 벗고 있었다던데?”
‘그럼 천연 교파가 믿는 건 욕망 영역의 달지기 만다라인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용여홍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여동생과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남동생을 발견했다. 그러나 용대용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별 반응이 없었다.
결국 용지고가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정말 그렇게나 난잡하게 굴었대요?”
고홍자는 그런 아들을 살짝 노려보았다.
“넌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옷만 벗고 방에서 얘기도 나누고 기도드린 거래.”
‘그 말을 누가 믿겠어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도 용여홍은 사람들이 홀딱 벗고 순수하게 얘기만 나눴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설령 방 안에 있던 것이 남자뿐이라도, 혹은 여자뿐이라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남의 얼굴에 떠오른 불신의 빛에, 고홍자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나도 처음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 그 사이비 종교에서는 모든 사람한테 원시적인 본능을 찾으라고, 후천적인 존재에 방해받지 말라고 요구했다더라고. 다들 벌거벗은 상태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만 신령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거야.”
고홍자는 자기 주관은 배제하고, 전에 들은 내용만 말하려 애썼다.
“이상한 교파네요.”
용여홍은 한 마디로 평가를 내렸다. 저 이야기만 듣고는 천연 교파가 대체 어떤 달지기를 믿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이 틈을 타, 용대용이 바로 본인 생각을 밝혔다.
“그래, 정말 미친놈들이야. 홀딱 벗고 모여 있었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고홍자가 남편을 살짝 흘겨보았다.
“당신도 수시로 배를 내놓고 다니잖아?”
“그거랑은 다르지!”
용대용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용여홍은 입씨름하는 부모님을 웃으며 바라볼 뿐, 끼어들지는 않았다.
가족들은 그렇게 소등 시간이 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