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13대 영역 (1)
장목화가 천천히 눈길을 돌린 순간, 성건우가 용여홍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용여홍은 반박을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도 없어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장목화는 제때 성건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민수안은 만났어?”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사 끝나고 잠시 얘기 나눴어요.”
“그래? 무슨 얘기 했어?”
“몰라요.”
순간 모두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장목화는 어이가 없어 성건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잠시 얘기했다며.”
그러자 성건우가 주머니에서 솜덩어리 두 개를 꺼냈다.
“그 사람 만나기 전에 틈을 타서 귀를 막아뒀거든요. 그래서 무슨 말 하는지 전혀 들을 수가 없었어요.”
어안이 벙벙해 있던 용여홍이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귀를 왜 막은 거야?”
성건우가 정색을 했다.
“인체 비밀을 연구하는 사람이고, C-14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과학자라면 그 사람도 각성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귀를 막고 있으면, 나를 방어할 수 있는 거지. 추리 광대 능력 하에 간단한 대화 몇 마디로 그 사람이랑 친구가 돼서 내가 아는 사실을 다 털어놓진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지.”
장목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건우의 행동이 이상하긴 해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윽고 백새벽도 호기심을 표출했다.
“근데 귀를 막고 어떻게 얘기한 거야? 그 사람이 뭔가 이상하다거나 그런 거 눈치채진 않았어?”
성건우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부분은 그냥 듣기만 했어. 그러다가 그 사람이 입을 다물면 ‘이해가 잘 안되네요.’라고 했고, 거의 다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이만 가봐도 되나요?’라고 물었지.”
장목화는 동상이몽 같은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웃었다.
“넌 진짜 대화의 귀재다!”
이 역시 구세계 콘텐츠와 강소월 관련 자료를 보며 배운 단어였다.
용여홍도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정보를 놓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안 됐어? 대화가 좀 무르익으면 중요한 정보가 흘러나올지도 모르잖아.”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답했다.
“C-14 프로젝트를 주관한 과학자라면 그런 실수는 안 할 거라 생각했어.”
‘맞아. 아주 알맞은 판단이야.’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때, 성건우가 덧붙였다.
“넌 다른 사람을 네 기준에 맞춰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라?”
용여홍을 향한 말이었다.
바로 용여홍이 씩씩거리자, 성건우는 돌연 의욕을 보였다.
“내 인격을 모독하는 건 괜찮아도, 내가 바보 같다고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럼 덤벼봐. 어디, 일대일로 붙어볼래?”
살짝 갈등하던 용여홍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장목화는 잠시 눈을 위로 굴리며 사무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다 말했다.
“내가 보기에 회사에선 이미 널 각성자로 의심하는 것 같아. 우리가 일반적으로 네 명이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해냈잖아. 게다가 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드러냈고. 그게 대가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앞으로 널 비밀리에 관찰할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근데 난 오히려 이 기회로 각성자라는 걸 회사에 드러내는 것도 방법이라 생각해. 밖에서 많은 일을 겪는 동안 각 대형 세력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각성자를 배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잖아. 회사도 널 실험 재료로 삼진 않을 거야. 다른 일들만 비밀에 부치도록 주의하면 되는 거지.”
“일단 상황을 한 번 지켜볼게요.”
성건우 역시 회사가 자신이 각성자란 걸 알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아직 읽지 못한 자료를 살폈다.
* * *
정오 무렵, 장목화는 컴퓨터를 켜고 습관적으로 메일함부터 확인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제니 부부장님께서 메일 보내셨네?”
장목화는 바로 메일을 클릭하고 내용을 읽었다.
“각성자 관련 자료야. 현재 우리 권한으로도 알 수 있는 거네.”
세 사람은 곧장 일어나 달리거나, 걸어서 장목화의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구조팀 모두가 모니터에 뜬 제니의 메일 전문을 읽었다.
「현재까지 수집된 모든 정보 분석 결과, 각성자는 대략 급 네 개로 나뉜다.
첫째, 뭇별 홀. 둘째, 기원의 바다. 셋째, 심령의 복도. 넷째,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란 단계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추측한 것뿐, 지금까지 신세계로 들어간 각성자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심령의 복도 급 강자들은 모두 심령의 복도에 존재하는 문 중 하나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 믿고 있다.
또한 적지 않은 교파에서 자신들의 수령이 이미 신세계에 진입해 그에 대응하는 달지기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령의 복도 다음에는 새로운 세계⋯⋯. 어떻게 생각해?”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조금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쌍한 염호.”
그 이름에, 용여홍은 한 기억을 떠올렸다.
일전에 장목화와 성건우는 분노의 호수 가운데 자리한 섬의 금기된 신전 안, 관에 누워 잠든 염호는 손톱으로 관 안쪽 벽에 ‘새로운 세계’라는 단어를 새겨두었다고 했었다.
“그럼 염호는 본인이 새로운 세계에 갇혀 있다고 말한 걸까요? 그는 이미 심령의 복도를 통과한 각성자가 된 걸까요?”
용여홍의 추측을 듣고,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적지 않지. 음, 염호가 남겨둔 그 종이 기억해? 각기 다른 숫자랑 상응하는 기호가 쓰여 있었잖아. 우리는 당시 그게 염호가 심령의 복도에 딸린 각각의 방을 탐색한 기록이라고 추측했었어.
체크 표시는 이미 탐색을 마치고 아무 문제도, 특별한 수확도 없다는 걸 확인한 방에 붙인 거고. 맨 마지막 줄 102에만 체크 표시가 없었지.
그걸 보고 우린 염호가 102호 방을 탐색하던 중에 신세계 관련 수확을 얻고 그것 때문에 예상치 못한 치명적인 상황을 맞닥뜨린 거라 생각했잖아.
근데 다시 생각하니까 우리 추측이 좀 대담하지 못했던 것 같네. 어쩌면 염호는 이미 102호 안에서 신세계 대문을 찾고 심령의 복도에서 벗어난 건지도 몰라. 그러다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일을 겪고, 어딘가에 갇혀서 여태 돌아오지도, 거기서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거지.
난 심지어 염호가 사력을 다해 관에 남긴 그 글이 훗날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한테 남긴 경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새로운 세계엔 문제가, 아주 큰 문제가 있다는 경고. 이 문장이 바로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장목화가 모니터에 뜬 메일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팀장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지금까지 신세계로 들어간 각성자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
그때, 성건우가 갑자기 웃었다.
“여러 교파의 수령도 신세계로 가서 그들이 신봉하는 달지기를 모시고 있다고 했죠?”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네 말은, 그들의 현재 상태도 염호와 비슷할 수 있다는 거야?”
성건우는 재차 안타깝다는 듯한 투로 대꾸했다.
“그거야 염호가 어떤 달지기에 충성했느냐부터 살펴야겠지만요.”
이번에는 용여홍도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세계에서는 달지기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그 대우가 천양지차로 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세계로 갔다는 교파 수령들의 상태는 염호보다 훨씬 나을 터였다.
또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장목화가 운을 뗐다.
“음, 심령 영역의 신세계에는 정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어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보가 충분치 않은 상황인 만큼,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이성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장목화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당시의 염호는 디마르코보다 훨씬 더 강했을 거야.”
그러자 백새벽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다고 볼 순 없어요. 디마르코는 에이돌른에게 제압 받고 있었잖아요. 어떤 제압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실력과 상태가 원래 수준엔 훨씬 못 미쳤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해요.”
용여홍도 동조했다.
“네, 디마르코가 에이돌른에게 제압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로소 염호와의 격차도 더 빨리 벌어졌을 것 같아요.”
고민하던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혼란의 시대부터 여태까지 지하 방주와 호수의 섬 중 어느 쪽도 다른 한쪽을 정복하지 못했잖아. 그게 그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셈이겠지.”
사실 상식을 초월하는 숙명통을 발휘하는 디마르코를 목격한 후로, 구조팀은 이를 줄곧 의심하고 있었다.
신력 이전부터 레드스톤 마켓에 자리해 있던 호수의 섬과 지하 방주는 지리상 가까웠던 것만큼 서로 간 전혀 왕래가 없진 않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서로에게 한 방씩 얻어맞은 뒤로, 그때부터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이들의 추측이었다.
이내 시선을 거둔 장목화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좋아, 마저 읽자고.”
그녀가 마우스의 휠을 돌리자, 모니터에 새로운 내용이 떠올랐다.
「각성자의 능력은 열세 명의 달지기 영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열세 명의 달지기는 다음과 같다.
1월을 관장하는 보리, 2월을 관장하는 여명, 3월을 관장하는 말인, 4월을 관장하는 왜곡의 그림자, 5월을 관장하는 감찰자, 6월을 관장하는 황금 저울, 7월을 관장하는 쌍태양, 8월을 관장하는 작열하는 문, 9월을 관장하는 만다라, 10월을 관장하는 에이돌른, 11월을 관장하는 깨진 거울, 12월을 관장하는 사명, 그리고 한 해, 혹은 윤달을 관장하는 장생.
1월 보리 영역의 각성자 능력은 대체로 감각 기관과 의식 방면에 분포돼있고, 지불하는 대가는 정신 상태, 욕망의 변화, 감각 기관의 상태와 관련돼 있다. 동시에 이 영역의 각성자 중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2월 여명 영역의 각성자 능력은 의식, 꿈과 관련돼 있고, 오감의 이상, 간헐적인 기절, 정신 분열이 현재까지 알려진 대가다.
3월 말인 영역 각성자는 주로 기억에 영향을 미쳐 굉장히 위험하다. 동시에 이들은 신체에 문제를 일으키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현재 알려진 대가는 특정 방면에서의 자제력 결핍, 기억 상실, 수면 장애다.
4월 왜곡의 그림자 영역 각성자는 보통 상대의 균형을 잃게 하거나, 근육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기이한 동작을 취하게 한다. 이들이 지불하는 대가는 언어 방면의 문제, 격투에 대한 심한 갈망이다. 그 외엔 알려진 바 없다.
5월 감찰자 영역 각성자는 목표의 취향을 통제하고, 그의 본능을 일깨울 수 있다. 대가도 이런 것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특정 심미안과 취향이 영구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두려움이 없어지기도 하고, 매력을 억제하지 못하기도 한다.
6월 황금 저울 영역의 각성자는 주로 상대를 마비시키는 등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들도 이에 대한 대가를 치러서인지 종종 불균형한 모습을 보인다. 다리를 저는 것, 한쪽 폐 기능 약화를 예로 들 수 있다.
7월 쌍태양 영역 각성자는 대개 시각 및 신체 능력을 방해하는 능력이 있다. 상대의 기이한 반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지불 대가는 성적 페티시, 건망증, 탈모, 실명, 빛에 대한 두려움, 퇴화 등과 밀접 관련이 있다.
8월 작열하는 문 영역 각성자는 보통 근육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특징을 보이며 상대를 바보로 만들기도 한다.
그 대가로 음악을 들으면 춤을 추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등의 기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또는 근육의 무력감, 추위에 대한 두려움, 겨울철의 기면증, 정서 불안 등의 비교적 평범한 대가를 치르는 이들도 있으나 그 외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