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11화 (311/649)

311화. 연구자

그제야 의문이 풀린 장목화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 바로 말을 이었다.

“어디 갔다 오셨길래 이제 오신 거예요?”

장문봉이 잠시 물끄러미 딸을 쳐다보았다.

“귀만 안 들리는 게 아니라 기억력도 어디로 간 거니? 오늘 황 씨 생일이잖아. 매년 이맘때 그 집에 같이 갔었던 거 기억 안 나?”

멍한 표정을 드러내던 장목화가 탄사를 내뱉었다.

“아, 요즘 날짜 감각이 좀 없어서요.”

장문봉이 언급한 황 씨는 반고 바이오 이사회 회원이자 수석 과학자, M3급 관리층인 황인휘를 가리켰다.

설수민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장목화를 홱 노려보았다.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다녀서야 어떻게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팀 팀장이라고 할 수 있겠어? 팀원들이 걱정되지도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회사 내근직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 이제 너도 어리지도 않은⋯⋯.”

“아빠⋯⋯.”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에, 장목화가 아빠를 돌아보며 간절히 도움을 청했다.

“응? 뭐라고? 안 들리는데?”

장문봉은 괜히 귀를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딸이 평소 하는 짓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짜증이 나서 장목화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알아서 살길을 찾았다.

“방금 그 민 삼촌도 황 씨 집에 손님으로 갔던 거예요? 그분 부인은요?”

이런 종류의 화제라면 설수민도 제법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였다.

역시, 장목화의 예상은 적중했다.

설수민은 문득 창문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뗐다.

“들리는 말로, 작년에 죽었다지. 정말……. 민수안이 M1급으로 승급하는 것도 못 보고⋯⋯.”

“민 삼촌은 뭘 연구하시는데요?”

이번에 장목화는 아빠가 답할 수 있는 화제를 꺼냈다.

장문봉은 곧 창문 앞 리클라이너에 앉으며 웃었다.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은 못 하겠지만 사실 넌 어릴 때 그 사람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전에는 그 사람도 나처럼 식물학자였지. 근데 나중에 무슨 일인지 연구 대상을 인체의 비밀로 바꾸더라고. 홍몽 연구소에서도 주로 그 분야를 담당하고 있고. 각종 보고서나 문서, 뉴스에 등장하는 C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는 많건 적건 그 사람이랑 관련돼 있다고 보면 돼.”

“어쩐지 제 어릴 때 별명을 알고 있다 했어요.”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장목화는 갑자기 흠칫하며 굳었다. 뭔가 갑자기 기억난 것이 있었다.

성건우가 지원자로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바로 C-14였다.

‘인체의 비밀 연구⋯⋯. C-14⋯⋯. 그 실험으로 각성자가 된 건우⋯⋯. 최근 M1 관리층으로 승급한 민 삼촌⋯⋯.’

따로따로 부유하는 정보들을 한데 종합한 장목화가 생각에 골몰했다.

그에 장문봉이 딸을 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네? 뭐라고요?”

장목화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금속 와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장문봉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장목화는 이내 진실과 거짓이 반쯤 섞인 답을 내놓았다.

“C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본 적이 있나, 생각하고 있었어요.”

곧 장문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귀, 아무래도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정 무섭거든 일단 정신과 의사부터 만나 그 방면의 치료부터 해 보자.”

연이어 설수민도 이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다.

장목화는 애써 웃으며 부모님의 장단에 맞춰주다가, 똑똑한 머리와 말재주로 이어지는 난관들을 겨우 넘겼다.

* * *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침대에서 일어난 장목화는 세수를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647층으로 향했다.

휴가라고 마냥 놀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었다.

몸에 꼭 맞는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뽀송뽀송한 수건을 챙긴 후, 장목화는 팀이 흔히 사용하는 트레이닝 룸에 들어섰다.

아니, 들어설 수 없었다. 앞에 장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성건우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거 연습해서 얻다 쓰게?”

장목화가 정말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물었다. 단순히 균형 감각을 단련하기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차고 넘쳤다.

이내 성건우는 가뿐히 다리를 내리고 배와 허리 힘으로 벌떡 일어났다.

“언젠가 저랑 같은 유형의 각성자와 맞설 준비를 하는 거예요. 두 손을 쓸 수 없을 때는 두 발이라도 써야 하니까요.”

장목화는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진지한 성건우의 눈빛을 보자니 그 논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보조 칩이 장착된 무기를 쓰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게네바의 특정 모듈 같은 거 말이야.”

순간 성건우의 눈이 확 밝아졌다.

“맞아요! 만약 제 손 하나를 기계로 개조한다면 양손 동작 불능 능력 따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대화가 점차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을 직감한 장목화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곧 세 번째 섬을 돌파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는 일찍이 이 트레이닝 룸엔 감시 카메라도, 도청기도 없다는 사실을 다 확인했었다.

“이미 돌파했어요.”

성건우는 오늘 아침 메뉴가 뭐였다는 말을 하듯 덤덤하게 답했다.

“진짜? 변화가 있었어?”

장목화는 기쁨과 놀라움에 눈을 반짝거렸다.

성건우는 곧 실험 결과를 개략적으로 전달한 후 덧붙였다.

“구체적인 수치는 실험 대상인 여홍이가 와야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아마 제가 말씀드린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거예요.”

장목화가 실소를 터뜨렸다.

“넌 왜 항상 작은 빨강이를 그렇게 괴롭혀? 나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

“반복적인 시도가 필요하거든요.”

성건우가 강조했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트레이닝 복 차림의 용여홍이 웃으며 들어왔다.

“왜?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말을 맺자마자 그는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보았다.

“왜, 왜. 뭐, 뭘 하려고?”

잠시 후, 구조팀 활동을 마친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한 50퍼센트씩 강화된 것 같네.”

추리 광대의 정확한 능력 범위는 9m였다.

“건우가 다음에 만나게 될 섬은 어떤 섬일까⋯⋯.”

용여홍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성건우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난 그 섬들 자체를 두려워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자신만만하네! 자, 이제 몸 좀 움직여야지! 훈련 준비해!”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단, 백새벽은 예외였다. 아직 어깨에 입은 상처가 다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그녀가 트레이닝 룸에 온 목적도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훈련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문득 어젯밤 만난 민 삼촌을 떠올린 장목화가 성건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참여했던 C-14 프로젝트 주관자, 누군지 기억해? 혹시 민수안이라는 사람 본 적 있어?”

성건우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제가 들어갔을 때 안에 침대 하나밖에 없었어요. 마스크를 쓴 간호사가 저한테 마취제를 놨고, 그 후로는 잠들어 뭇별 홀에 들어갔어요.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엔 여러 연구자가 질문하고 검사를 진행했었어요. 그리고 전 민수안이란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요.”

‘……빨리 물어보지 그랬냐.’

장목화는 곧장 민수안의 생김새를 묘사해주었다.

용여홍과 백새벽 역시 성건우만 보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두 사람도 성건우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성건우는 금세 확신에 찬 눈으로 답했다.

“어젯밤에 제 기억을 되돌려봤는데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알겠어.”

장목화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 * *

잠시 후 네 사람은 각기 흩어져 샤워실로 향했다. 그렇게 다들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엔, 다시 복도에서 합류해 14호로 향했다.

문 앞에 이른 그때였다. 장목화가 우편함에 손을 넣었다가 편지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 적힌 수신인은 성건우였다.

“네 거네.”

장목화가 사무실로 들어가며 성건우에게 편지를 건넸다.

그녀는 딱히 반응도 없고 덤덤했다. 성건우의 공식 직장인 구조팀에 편지를 부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편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성건우 역시 차분하게 말했다.

“C-14 프로젝트에서 검사하자고 하네요. 프로젝트 이후에 반년간 진행하는 추적 관찰의 일부라고요.”

사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반년이 됐을 때 그는 지상에 나가 있었다. 그러느라 이제야 이 편지를 받게 된 것이었다.

* * *

지하 빌딩, 3층.

이 층은 성건우가 전에 정신과 의사를 만났던 그 층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에는 문밖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도마뱀을 방불케 하는 갑옷을 입은 보안 요원 네 명에게 검사를 받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두짝문을 통과했다. 그곳이 진정한 연구 구역이었다.

곧이어 성건우는 벽이 새 하얀색으로 칠해진 작은 방에 이르렀다.

방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네 개, 그리고 독특한 형태에 붉은색, 초록색 빛이 번득이는 기계 하나만 놓여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겉보기엔 서른 살도 채 안 될 듯한데, 꽤 묵직해 보이는 검은 뿔테 안경 때문인지 상당히 진지한 인상이었다.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지. 유성연이다.”

“안녕.”

상대가 무례하게 굴어도 성건우는 그러지 않았다.

성건우가 자리에 앉자, 유성연은 테이블 위에 놓인 기계를 가리켰다.

기계는 끝에 각종 센서가 부착된, 여러 갈래 전선이 뻗어 나와 있었다.

“이건 거짓말 탐지기야. 이거 다 부착하면 바로 시작할게.”

“알겠어!”

순간 눈이 밝아진 성건우는 잔뜩 신나서 거짓말 탐지기로 움직였다.

유성연은 그를 저지하는 대신 행동을 관찰하며 수시로 뭔가를 기록했다.

이내 성건우는 그 각기 다른 센서들을 정확한 위치에 부착했다.

유성연은 그를 바라보며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질문을 시작했다.

“최근 정신적인 문제가 악화되진 않았나? 통속적으로 말해서, 뇌에 쥐가 나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는 않았어?”

성건우는 거짓말 탐지기를 응시하며 솔직하게 답했다.

“전이랑 거의 비슷해.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어.”

거짓말 탐지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연은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듯 재차 물었다.

“확실해?”

“응. 나랑 어느 정도 대화해봤지만, 뭐 이상한 점 없었잖아?”

성건우는 여전히 거짓말 탐지기를 응시하며 대꾸했다.

유성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내 눈이 아니라 그걸 보고 있는 거지?”

성건우는 정확히 환자 같은 눈빛으로 유성연을 한 번 훑어보았다.

“넌 거짓말 탐지기가 아니니까.”

유성연은 입술을 벌렸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결국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느릿하게 내뱉었다.

“그럼 신체에 다른 사람이랑 차이 나는 부분이 생기진 않았고?”

“있어.”

성건우가 단호하게 답한 뒤, 벌떡 일어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유성연이 화들짝 놀랐다.

“다른 사람이랑 차이 나는 부분을 보여주려고. 너도 바지 벗어봐. 내 거랑 비교해보자.”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진지했다.

유성연은 순간 피가 머리로 확 쏠리는 느낌이었다. 가까스로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내 말은, 다른 사람한테는 없는데 너한테는 있거나, 다른 사람한테는 있는데 너한테는 없는, 그런 부분이 있느냐는 거야.”

성건우는 아쉽다는 듯 허리띠를 다시 채우며 자리에 앉았다.

“응, 보다시피. 나한테 변이가 일어난 부분은 없어.”

유성연은 거짓말 탐지기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고개를 숙여 이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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