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10화 (310/649)

310화. 돌파

고홍자는 쥐고 있던 뜨개바늘을 내던지며 환하게 웃었다.

“왔어? 이번엔 너무 오래 걸렸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안전부 직원이 찾아올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

말도 채 잇지 못하고, 고홍자는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

하얗고 말쑥한 중년 여자는 새해를 맞아 머리를 새로 볶아 그런지, 상당히 우아해 보였다.

그러자 용대용이 얼른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지.”

키가 170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튼실한 편이었다.

고홍자는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고, 옷장 쪽으로 다가갔다.

“새해맞이로 털실을 사서 여홍이 네 옷 좀 지었어. 입어봐, 맞는지 보자.”

용여홍이 그 말에 웃었다.

“이제 봄이 다 됐는데요.”

“얇은 옷이라 봄에도 입을 수 있어. 회사 안에만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계절을 또렷하게 구분하겠니?”

고홍자가 중얼거리며 옷장 문을 열었다.

의자 하나를 당겨와 앉은 용여홍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애들은요?”

바로 고홍자의 푸념이 쏟아졌다.

“머리가 굵어졌다고 도통 집에는 붙어있으려 하지를 않아. 가로등이 꺼지기 전까지는 코빼기도 안 비친단다!”

용여홍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자신 역시 그만한 나이엔 집에 있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용여홍은 성건우, 양진원과 함께 거리 구석에 쪼그려 앉아 라디오를 듣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나쁜 일은 아니죠. 어쩌면 연애 중인지도 모르고요.”

새 스웨터를 꺼내든 고홍자는 그 말에 흠칫 놀라는 듯하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참. 전에 만난 장 씨네 아가씨 말이야. 네가 마음에 들었었나 봐. 새해가 되기 전까지 줄곧 네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었는데, 나도 너희 아빠도 확실하게 답을 못 해줬지. 나중에 보니까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것 같더라.”

용여홍은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확인 사살을 받으니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한숨 끝에 연한 웃음을 지었다.

“그 문제는 차차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용여홍도 구조팀의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진, 연애는 오히려 상대에게 피해만 입히는 꼴이었다.

그러나 임무 중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고, 여태 제대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속이 답답해져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라⋯⋯. 혹시 밖에서 무슨 충격이라도 받았니?”

고홍자가 의혹이 어린 눈으로 용여홍을 몇 번 훑어보았다.

순간 말문이 막힌 용여홍은 서둘러 팔 근육을 드러내 보였다.

“많은 경험을 통해 마음이 성숙해져서 그런 거예요.”

고홍자는 아들을 흘겨보다가 얇은 스웨터를 던져주었다.

“전에 비해 말솜씨는 늘었네.”

더는 아무런 말 없이 웃으며 외투를 벗은 용여홍은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웨터를 입어보았다.

* * *

기원의 바다.

한참을 헤엄쳐왔지만, 성건우의 전방은 여전히 망망대해였다.

하지만 성건우는 전혀 실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웃었다.

이는 그가 마침내 세 번째 섬을 극복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에도 한 번 세 번째 섬을 벗어나 한참을 헤엄쳐봤지만, 원래의 그 섬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그 범위를 벗어난 상태였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의 정수리 위쪽으로 청록색 야명주가 떠올랐다.

동시에 성건우가 다시 아홉으로 나뉘고, 확성기와 같은 물건들을 구현하면서 능력의 변화를 확인해보았다.

아홉 성건우는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갖은 노력을 들인 끝에 기초적인 결론을 얻었다.

추리 광대의 능력 범위는 8~10미터 사이로 확대됐다. 동시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도 아홉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여러 목표 사이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신중해야 했다. 그들 자체를 목표로 삼아 1대1, 혹은 1대2로 구실도 없이 집단적인 조건을 설정해서는 이상적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확성기를 이용해 능력 범위를 확장했을 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상도 아홉 명으로 늘었다. 단, 목표들은 반드시 반경 3미터 안에 있어야 했고, 그만큼 효과도 대폭 약해졌다.

억지쟁이의 능력 범위도 15미터 정도로 늘었다. 이 역시 아홉 명에게 동시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다른 변화는 크지 않았다.

양손 동작 불능의 능력 범위는 30미터로 늘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목표에게 서로 다른 동작을 금지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는 다 성건우의 심령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 실험 결과였으니, 현실 세계에선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원래 여긴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할 일을 다 마치자, 급격히 피로가 밀려들었다.

성건우도 이제 기원의 바다에서 벗어났다.

눈을 번쩍 뜨자, 성건우의 시야에 바깥의 가로등이 들어왔다.

방 밖의 가로등이 아직 밝혀져 있었다.

이어 황동색 열쇠를 꺼내든 그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며 196호를 나왔다.

성건우는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느릿하게 C 구역 활동 센터로 향했다.

* * *

C 구역 활동 센터.

소등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은 때라, 직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두 테이블에서 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과 구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청소년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도 없는 곳을 골라 앉은 성건우는 조용히 내부를 눈에 담았다.

다들 옷 스타일은 비슷했지만, 표정들은 다양했다. 그리고 귓가에는 입씨름하는 소리와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활기차 보였다.

성건우는 계속 말없이 덤덤하고 평온한 얼굴로 사람들을 감상했다.

그렇게 1, 2분 정도 지났을 무렵, 활동 센터의 주관자 진현오가 성건우를 발견하고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밖에서 죽은 줄 알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의 농담에, 성건우도 그를 힐긋 보며 웃었다.

“진병욱 씨를 만났습니다.”

위드 시티에 잠복 중인 반고 바이오 정보 요원 진병욱, 바로 이 진현오의 막내아들이었다.

순간 진현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그 망할 녀석이 아직 살아있다고?”

성건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자 진현오의 눈동자는 그대로 빛을 잃었다.

성건우는 얼른 웃으며 입을 뗐다.

“뻥 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녀석이 죽었으면 안전부에서 진즉 내게 통지해줬겠지. 그래, 어떻든?”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진현오는 전혀 놀란 적도 없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은근한 그의 질문은 아주 모호하게 들렸다. 아들의 임무엔 보안 등급이 존재해서, 절대 세세한 걸 물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잘 지내던데요. 곧 직원 등급이 높아질 겁니다.”

성건우도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그 답변에 적잖게 마음을 놓은 진현오가 웃으며 성건우의 옆에 앉았다.

“몇 달 만에 돌아온 걸 보니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나 봐?”

성건우는 카드 게임 중인 직원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전부 아주 재미있는 곳들이었죠.”

진현오는 구석에 앉은 청소년들을 훑으며 소리 내 웃었다.

“그러냐? 당시 내가 방문했던 유랑자 거점은 하나같이 비참했는데.”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가지셔야죠.”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진현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거냐?”

성건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제 상사, 장목화 팀장님한테서요.”

이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드 게임은 분분히 끝이 났다. 게임을 마친 직원들은 복도 불이 꺼지기 전, 왁자하게 웃으며 떠나갔다.

모두가 집이나 공동 화장실로 돌아간 뒤, 활동 센터는 곧 다가올 밤처럼 공허하고 조용해졌다.

성건우도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진현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한 뒤 B 구역으로 돌아갔다.

* * *

성건우는 걸음을 옮기며 점점 가까워지는 196호를 바라보다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가만히 천장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빨간빛만 반짝이고 있었다.

성건우는 그 빛을 향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지하 빌딩, 349층.

다른 층과 달리 이곳은 저녁 9시가 넘었는데도 드문드문 복도 등이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밝기라 이 층에 사는 직원들이 휴식을 취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C 구역 12호에 들어선 장목화는 부모님이 아직 귀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일단 서재로 향했다.

곧이어 장목화는 아버지의 컴퓨터와 그의 계정으로 최근 몇 달간 있었던 크고 작은 뉴스를 확인했다.

‘천연 교파 그 사건 말고 크게 중요한 뉴스는 없네. 생명 제례 교단에 대한 후속 조사도 없었고. 아, 혹시 보안 유지를 위해 인터넷에 업로드를 안 했나? 아니면 아빠 권한으로는 그 뉴스에 접근이 안 되나?’

마우스 휠을 굴리며 웹 페이지를 훑어보던 장목화가 순간 멈칫했다.

문밖에서 미약한 전기 신호가 세 갈래 정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 갈래?’

의아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즉각 서재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아버지 장문봉과 어머니 설수민, 그리고 장목화에겐 아주 낯선 한 중년 남자가 보였다.

머리는 새카맣고 숱도 많았지만, 상당히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척 봐도 겉모습엔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유형이었다. 또 금테 안경을 착용해서인지, 상당히 학자 같은 기질도 풍겼다.

“엄마, 아빠.”

장목화가 부모님을 부르며 낯선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문봉도 딸의 그 눈짓을 알아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향을 튼 장문봉의 머리에서 흰머리 몇 가닥이 얼핏 보였다. 그도 이제 새해를 맞아 어느덧 반백이 되었다.

“민 삼촌이라고 불러라.”

장문봉이 웃으며 남자를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민 삼촌”

어른 앞이니만큼 장목화도 퍽 깍듯하게 굴었다.

민 씨 성을 가진 남자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카구나?”

‘뭐야, 왜 모르는 사람이 내 별명을 부르는 거야?’

속으론 약간 불만이 있어도, 장목화는 겉으론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네.”

“잘 컸네. D7급은 될 것 같은데? 우리 아들이 아직 스무 살도 안 됐다는 게 아쉽네. 조금만 컸다면 모카를 우리 며느리 삼으면 좋은데.”

민 씨가 자연스레 장문봉과 설수민을 돌아보았다.

이런 칭찬도 여러 번 틀은 터라, 장목화도 그냥 덤덤했다.

설수민이 막 인사치레하려던 그때, 민 씨가 돌연 긴 트림을 했다. 위장 속에 엄청난 기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하, 원체 위가 안 좋아서.”

그가 멋쩍은 듯 웃으며 변명을 했다.

그렇게 몇 마디 한담을 나눈 뒤 작별을 고한 민 씨는 C 구역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목화는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빠, 저는 왜 여태 민 삼촌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죠?”

“본 적이 있는 게 이상하지. 저 사람은 최근에서야 M1으로 승급한 홍몽 연구소 부소장이다.”

장문봉이 설명을 하며 거실로 향했다.

관리층을 대표하는 M급 중에서도 M1은 가장 낮은 등급이었다. 각 대형 부서의 보좌직과 중요 연구 프로젝트 책임자가 이 급에 해당했다.

안전부의 부부장 제니, 장목화의 아버지 장문봉 역시 M1급이었다.

“아, 여기로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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