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09화 (309/649)

309화. 성장

후룩, 후룩…….

용여홍은 한창 도시락통을 들고 먹는데 심취해있었다.

완성된 요리는 소고기 조림 통조림을 고명으로 얹은 토마토 달걀 볶음국수였다. 그가 연신 오물오물 국수를 씹으며 소감을 밝혔다.

“이렇게 먹으니까⋯⋯ 통조림도 그렇게 물리지는 않네요⋯⋯.”

끝으로 국수 바닥에 깔려 있던 양배추 조각을 먹으니, 고기의 기름기도 싹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때 마지막 국물까지 흡입한 성건우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못 먹겠으면 나한테 줘도 돼.”

용여홍은 그대로 말을 멈추고 국수 먹는 것에 집중했다.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아직 배가 덜 찼어? 뭐 좀 더 가져다줄까?”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 남의 음식을 빼앗아 먹을 정도의 배만 남아 있어서요.”

“음!”

역시 바로 고개 숙인 장목화는 소스에 젖어 더욱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달걀을 베어 먹었다.

백새벽은 나머지 셋에 비해 먹는 양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식사를 마치고 성건우처럼 남아 있던 토마토를 후식으로 먹고 있었다.

자고로 성찬이라면 성찬다운 모습을 갖춰야 하는 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목화와 용여홍도 식사를 마쳤다. 온몸을 감싸는 포만감에, 다들 각자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꼼짝도 하기 싫었다.

“역시 회사가 좋아⋯⋯.”

용여홍이 중얼거렸다. 이제 진정한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장목화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맞아. 여홍이 너, 나중에 집에 너무 오래 있다고 심심해하면 안 돼.”

“아뇨. 그럴 리가요⋯⋯.”

지난 몇 달간 지상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은 터라 용여홍은 전처럼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야 회사의 콘텐츠가 얼마나 단조로운지, 진정으로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애쉬랜드 위에 자리한 거점 대부분과 비교하자면, 반고 바이오 직원들의 여가나 취미 활동은 다채롭긴 해도 내부의 도덕관념을 벗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용여홍은 이제 생각이 좀 달라졌다. 집에 머물며 지인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영원히 파란 하늘 아래 탁 트인 세상을 만나지 못한다면, 언젠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해질 것만 같았다.

이내 성건우가 끼어들었다.

“구세계 콘텐츠만 충분하다면 심심함 따위 느낄 새도 없을걸? 심지어 여자친구 사귀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지 몰라.”

“설마⋯⋯.”

용여홍이 조그맣게 항의했다. 그쯤에서 그친 건, 장목화와 백새벽이 자신을 여자와 결혼에 미친 사람이라 생각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구세계 콘텐츠도 더 이상 보충이 안 되면 언젠가는 결국 물리겠지.

휴, 내가 얘기 안 했나? 난 이제 오랫동안 나가 있으면 돌아오고 싶고, 또 오랫동안 가만히 있으면 나가고 싶어져. 너희는 나처럼 안 되길 빌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네 사람은 각자 할 일을 맡아 설거지하고 사무실을 정리했다.

이 순간, 용여홍의 마음은 아주 평안했다. 평안함 속엔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운 즐거움도 피어나고 있었다.

‘평생 이랬으면 좋겠다.’

그가 속으로만 조용히 기도했다.

* * *

성찬을 마치고, 성건우와 용여홍은 함께 495층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두 사람은 누군가와 마주쳤다.

밝혀진 형광등 아래, 친구 양진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우리 마중 나온 거야?”

성건우가 놀란 듯 물었다.

하지만 양진원 역시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어? 너희! 드디어 돌아왔구나!”

사실 반고 바이오에서 몇 달간 나가 있어야 하는 임무는 극히 드물었다. 물론 특정 임무를 맡아 특정 지역으로 파견된 이들은 2년, 심지어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낸 후에야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나가서 뭘 하고 온 건지 알려지지도 않는 구조팀과는 달랐다.

용여홍은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성건우를 한심스럽게 한번 바라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피부도 하얀 양진원을 돌아보았다.

“그래, 피곤해 죽겠다. 한동안은 쉴 수 있을 거야. 여기는, 부모님 뵈러 온 거야? 아내는?”

양진원의 아내 주슬기는 용여홍에게 꽤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양진원보다 열 살 연상인 것도, 미래의 남편을 보겠답시고 직접 찾아온 것도 그러했다.

거기다 부부는 결혼한 이후, 일할 때를 제외하면 그림자처럼 내내 함께 꼭 붙어 다녔었다. 그래서 용여홍도 자연스럽게 친구의 아내를 찾게 되었다.

양진원이 웃으며 답했다.

“아, 우리 아내 임신했어. 그래서 어머니께 이것저것 여쭤보려고 온 거야.”

“야! 축하한다!”

용여홍은 친구의 경사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성건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지어 자원하기까지 했다.

“나한테 물어봐도 돼!”

“……어?”

결혼도 안 한 애가 무슨 수로? 양진원의 얼굴에 혼란의 빛이 떠올랐다.

“응, 이론은 빠삭하거든.”

생명 제례 교단의 신실한 신도 성건우는 아주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아직도 멍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양진원의 모습에, 용여홍이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하하, 구세계 육아 서적을 본 적이 있다고. 그 말이야.”

양진원도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그 책 아직 가지고 있어?”

“아니, 안 가져왔어.”

구조팀 일원인 용여홍도 이젠 거짓말 실력이 꽤 늘어나 있었다.

양진원은 아쉬움에 탄식하다가 성건우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건우야. 그럼 나중에 너한테도 한 수 배우러 갈게.”

“그래!”

성건우가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뻗었다.

다시 의혹 가득한 눈을 하던 양진원도 얼떨결에 두 손을 뻗었다.

성건우는 양진원의 양손을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양진원은 그제야 성건우가 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애가 조금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아마 땅 위에서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 거겠지.’

돌이켜보면 양진원도 대학 졸업 이후론 결혼할 때까지 성건우나 용여홍과 어울린 횟수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서 그도 성건우의 변화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월의 공백에선 또 많은 일이 있지 않았겠는가.

세 친구는 그렇게 복도에 서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내 자리를 파하려는데, 양진원이 용여홍을 위아래로 몇 번 훑었다.

“너, 전보다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그래?”

용여홍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양진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신감도 커진 것 같고, 정말로.”

“하하, 햇볕에 좀 타서 그런가.”

용여홍은 겸손하게 대꾸하면서도 자꾸만 피어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곁에서 성건우는 간단한 말로 그 기쁨을 무너뜨리는 대신, 양손을 자신의 입가에 대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보자니, 용여홍도 약간 뜨끔해졌다.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양진원을 배웅한 성건우, 용여홍은 친한 친구답게 인사 따윈 가볍게 생략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 * *

B 구역, 196호.

아직 가로등이 꺼지지 않은 틈을 타 이 좁은 방을 한바탕 청소한 성건우는 곡물 낟알을 채워 넣은 베개를 벽에 세운 뒤 천천히 기대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 *

기원의 바다, 산과 물이 흐르고,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섬.

이곳에 어느새 연못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연못은 논벼와 밀을 심은 논 몇 마지기로 에워싸여 있었다. 이삭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낟알은 묵직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흡족해졌다.

한편, 허공엔 물고기 눈알만 한 크기의 청록색 구슬 하나가 떠 있었다. 구슬 주위론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이는 성건우의 작품이었다. 검문소를 통과하기 전, 그는 디마르코의 기운이 고형화된 구슬을 자신의 심령 세계 안으로 전이시켰다. 디마르코는 이미 죽었으니 이를 통해 다시 침략해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이제 성건우는 선베드 아홉 개를 만든 뒤, 자신을 여덟 명으로 분열시켰다.

그렇게 분열된 성건우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자, 처음의 성건우가 손을 들어 청록색 야명주를 소환했다.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은 구슬은 전보다 더 밝은 빛을 발했다.

쏴아~

그와 동시에 섬 사방의 기원의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그 안의 미약한 빛들도 크게 불어나, 지금껏 일어났던 일들을 비췄다.

중생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숙명통.

현재 디마르코가 남긴 기운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로 인해 성건우는 심령의 세계에선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었으며, 현실에선 의식을 잠시 육신에서 분리할 수 있었다. 그때의 디마르코처럼, 전설 속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 능력엔 시간과 거리의 제한이 따랐다. 의식이 육신의 보호를 벗어나 자연환경에서 각종 악조건 영향을 직접 받게 되면 기껏해야 3초를 버티지 못했다. 그 시간을 넘기면 수습할 틈도 없이 흩어질 것이었다.

이를 알고 장목화는 흩어진 의식을 수습해 육신으로 되돌려도 매우 약해질 것이라 추측했다. 심지어 그대로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었다.

일단 의식이 육신에서 벗어나면 성건우는 디마르코처럼 곧장 타인의 심령 세계에 침입해 상대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이때 상대와의 거리는 반드시 30미터 안쪽이어야 했다. 애초에 의식이 육신에서 그 이상으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디마르코에게 따랐던 것보다 훨씬 강한 제약이었다. 의식 생명 유지 시간도, 능력의 적용 범위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성건우는 아직 이 야명주를 이용해 목표의 의식과 동화되면서 상대의 육신을 점거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파도 속, 갖가지 장면이 드러나자 아홉 명의 성건우가 작업에 돌입했다.

성건우들은 각자 한 구역씩 맡아 상응하는 기억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곧 한 차례씩 범위를 줄여나가다가, 마침내 목표 장면을 찾아냈다.

그 장면 속 성건우는 자신의 집 문 앞에 멍하게 서 있었다.

그때 남색 상의, 검은색 긴 바지에 낡은 구두, 짙은 색 야구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얇은 금속관과 작은 화살을 집었다.

성건우가 생명 제례 교단 각성자의 습격을 받았을 때의 장면이었다.

그 앞부분을 살피던 성건우들은 중간에 빈틈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다.

상응하는 기억은 정말로 삭제된 상태라 숙명통으로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건우들은 이에 실망하는 대신 진지하게 용의자의 옆얼굴과 뒷모습을 살피면서 특징을 찾아보았다.

한참 뒤, 성건우들은 청록색 야명주의 힘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그쯤에서 작업을 마무리 짓고,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전과 달리 풍성해 보이는 섬을 돌아본 성건우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기원의 바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다시 먼 곳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 * *

495층, C 구역, 11호.

이곳은 용여홍이 부모님을 위해 교환한 큰 방이었다.

전에 살던 곳에 비해 작은 침실이 두 개나 더 있어서, 용여홍의 동생들도 드디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곧이어 용여홍은 문을 열고, 방 안의 풍경을 마주했다.

라디오 ‘베드타임 뮤직’을 들으며 스웨터를 짜는 어머니 고홍자, 그 곁에 앉아 방에 흐르는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는 아버지 용대용…….

잠시 용여홍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때, 고홍자와 용대용도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중 한 사람은 멋대로 남의 집에 쳐들어온 사람을 욕할 준비를, 다른 한 사람은 그에 협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아들 용여홍임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