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08화 (308/649)

308화. 성찬

장목화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해자 마을부터 시작해 레드스톤 마켓에 돌아갔을 때까지 있었던 일 중 중요한 것들만 이야기했다.

숨긴 사연은 위드 시티 지부에 성건우 형제회가 설립됐다는 것과 지능 로봇 게네바에 관한 이야기였다.

디마르코에 대적했을 당시를 이야기할 땐, 경계 교파가 주력군이었고 구조팀은 보수를 위해, 또 정의감이 살짝 생겨서 고용군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이는 네 사람이 그렇게 큰 위험을 짊어진 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환이었다. 사실 이 설명에도 문제는 없었다. 비엘의 말처럼 우연의 배후에는 종종 운명이 흐르곤 하니까.

하늘색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인 제니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딱 한 번 나갔다 온 건데 다른 사람들이 열 번, 스무 번 임무를 수행한 것보다 더 많은 위험을 맞닥뜨렸네.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지난번에도 그랬지. 필터 칩 배달을 맡겼더니 일을 한 무더기나 저질렀잖아.”

성건우는 조용히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고, 백새벽은 이 모든 불운의 원흉이 구조팀인 것은 아니라는 양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부장이 앞에 있는 만큼 동료들 반응에 항변할 수도 없어서, 용여홍은 성건우의 시선은 하나도 느끼지 못한 척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제니도 네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보고 물었다.

“왜 그러지?”

장목화가 웃으며 설명했다.

“저희도 저희가 유난히 위험을 많이 맞닥뜨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우리 팀원 중 하나가 너무 재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닌가, 의심까지 하게 됐어요. 이렇게 좀 옥신각신하다 보면 차분해지기도 해서요.”

제니도 웃었다.

“장난치는 건 상관없는데,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기진 마. 미신을 믿는 건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니니까.”

이 순간, 용여홍 역시 장목화와 성건우, 백새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챘다. 하지만 여전히 모른 척 앞만 주시했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제니가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지하 방주에 대적할 때 경계 교파와 디마르코의 전투를 관찰했나?”

“아뇨.”

장목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성건우도 이상하리만치 진지하게 동조했다.

백새벽과 용여홍 또한 고개를 흔들며 같은 뜻을 밝혔다.

이들의 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경계 교파는 애초에 디마르코와 전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 모습을 관찰한 적이 있을 리가.

제니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쉽네. 그런 모습을 봤더라면 각성자나 심령의 복도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뒤이어 제니가 항상 짓고 있던 온화한 미소를 지우고 정색했다.

“이제 너희는 퍼스트 시티에 가게 될 거야. 거기 숨어있는 여러 인재 중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도 적지 않아. 막강한 화력, 대량의 군대, 선진화된 장비보다도 더 위험하고 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지.

뭐, 물론 맨몸으로 미사일도 막고 그런 존재까진 아니지만, 그만한 능력과 영향력이면 사람들도 많고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사람을 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일 수도 있어.

그래도 너희는 고등 무심자에 대항해 본 경험이 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장목화가 이 기회를 틈타 말을 받았다.

“부부장님,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혹시 회사의 각성자 관련 정보를 신청해도 될까요? 각기 다른 능력에 대응하는 달지기와 영역, 또 대략적인 대가의 범위와 관련한 정보면 좋겠습니다.

그런 정보를 알게 되면 각기 다른 달지기를 믿는 신도를 만났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늘 그런 사람들을 직접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보를 통해 회사와 연락할 순 없습니다. 야영지로 돌아와 무선 통신기를 쓸 수 있을 때까지 부디 무사히 넘어가기만 바랄 순 없을 테니까요.”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제니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긴 하네. 그럼 한 번 신청해볼게. 사실 이 정도까지 조사했는데, 너희들은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자격이 넘쳐. 하하, 물론 많은 위험을 맞닥뜨리기는 했지만, 수확도 적잖이 얻었잖아.

9대 연구원의 존재를 알아내고 퍼스트 시티 첫 번째 시민의 원래 신분을 알아낸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공헌이야. 심사를 마치면 너희들 등급도 승급될 거야. 권한도 높아질 거고.

그런데 아무리 회사에서 주는 자료라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돼. 그것도 완벽한 건 아니라 오류가 존재할 수 있거든.

또한 어느 달지기를 믿느냐와 어떤 능력을 각성하느냐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없어. 그저 상응하는 영역에 속한 능력을 각성할 확률이 더 높을 뿐이야. 그러나 예외도 아주 많으니까 단언할 수 없는 거지.”

적의 능력을 잘못 예측했다간 정말로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이는 구조팀이 생생하게 체험해본 문제이기도 했다.

성건우는 일찍이 생명 제례 교단의 특정 각성자에게 일부 기억을 삭제당한 적도 있었다. 이는 분명 말인 영역에 해당하는 능력이지만, 그 각성자가 신봉하는 것은 사명이었다.

이때 제니가 또 새로운 질문을 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용여홍은 용기를 내서 황급히 입을 열었다.

“부부장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아니, 저희는 대부분 유전자 개량을 받아서 퍼스트 시티로 가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저희가 반고 바이오 출신이라는 사실을 쉽게 들키진 않을까요?”

애쉬랜드 내에 반고 바이오의 명성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거기다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대형 세력인 퍼스트 시티와 반고 바이오는 당연하게도 격렬한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제니가 용여홍을 보며 웃었다.

“걱정할 것 없어. 퍼스트 시티에 가면, 키도 크고 잘생긴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 거야. 뭐 널렸다고 까진 할 수 없어도. 음, 회사에서 매해 수출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유전자 개량 원액이 어디로 갈 것 같아?”

“그렇구나⋯⋯.”

용여홍은 크게 깨달았다는 듯 멍한 얼굴을 했다. 회사로 돌아오던 중에 워낙 할 일이 없어 성건우가 가지고 있던 ‘배우의 자아 수양’ 책을 읽었던 게 꽤 효과가 있었다.

벽시계를 확인한 제니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일단 돌아가 쉬어. 언제 출발할지는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보고만 하고 바로 출발해도 돼.”

이내 그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확실히 알려둘 게 있는데,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는 매우 위험한 일이야. 우리뿐만 아니라 대형 세력들도 적지 않게 비슷한 노력을 해. 근데 파견 팀 대부분이 어느 조사를 진행한 뒤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거나, 미쳐버렸지.

예외는 거의 없었어. 거기다 퍼스트 시티에 숨은 강자들은 엄청 많고. 그러니까 반드시 조심해. 회사와 계속 연락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부부장님!”

성건우가 패기 넘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제니가 흠칫 놀랐다.

“⋯⋯그렇게 정석으로 반응할 필요 없어. 그냥 주의 준 거야. 좋아, 이제 가봐.”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부부장님, 전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입구에서부터 모든 물건을 제출하게 된 건가요? 유 대장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듣긴 했는데, 그 사람이 어떤 물건을 숨긴 건지는 못 들었습니다.”

제니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녹음기였어. 어느 비밀 교파의 선전 자료가 저장된 녹음기.”

“어느 교파였습니까?”

순간 성건우가 흥분해 물었다.

“천연 교파. 이 교파는 우리도 아직 아는 바가 없어.”

제니가 간단히 설명했다.

‘천연 교파⋯⋯.’

장목화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사이, 아직 뼈가 다 붙지 않은 백새벽이 입술을 깨물다 물었다.

“부부장님, 이번 보상을 받게 되면 저도 유전자 개조나 생체 공학 의수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실 신형 외골격 장치가 생겨서 그녀도 전만큼 조급하진 않았다.

제니는 백새벽을 바라보다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마음이 확실히 정해졌다면. 그래,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다면 말이야.”

백새벽은 고개를 끄덕일 뿐 그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구조팀은 제니와 작별한 뒤, 647층 14호로 돌아갔다.

* * *

이제 막 5시 반이었다. 식당이 문을 열기까진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아유, 역시 집이 최고야⋯⋯.”

장목화가 자신의 책상에 딸린 등받이 의자에 앉아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다 문득 긴 소파로 다가가 벌렁 드러눕는 성건우에게 시선이 닿았다.

“야, 적당히 좀 하지?”

장목화도 그냥 한숨만 쉬었다.

그래, 자신이 또 부주의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역시 집이 최고네요.”

예상대로 성건우는 장목화가 했던 말을 반복하며, 그녀를 흉내 냈다.

곧 용여홍이 그 옆에 자리한 일인용 소파에, 백새벽도 자기 자리에 앉았다.

결국 장목화도 성건우를 포기하고 말했다.

“이따 내가 한턱 쏠게!”

무릇 군자란 타인의 실수에 아주 너그럽지 않던가.

이후 넷은 각자 자리에서 편안히 한담을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오랜만에 다들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장목화가 갑자기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배에서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왜 갑자기 잠들었지? 지금 몇 시야?”

장목화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자 손목시계를 살폈다.

저녁 8시 5분, 식당이 이미 다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기함한 나머지 입을 쩍 벌리며 일어난 장목화가 책상을 두 번 내리쳤다.

“다들 일어나, 얼른!”

용여홍과 백새벽이 몽롱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성건우는 방금 막 일어났는데도 말똥한 눈으로 물었다.

“식당 문 열었어요?”

“아니! 이미 다 문 닫았어! 아, 왜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거야?”

장목화가 약간 짜증 난 듯 대꾸했다. 물론 본인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반면, 손목시계를 살피던 백새벽은 상대적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집에 도착했잖아요.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 거 아닐까요.”

밖에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야 했기에, 숙면은커녕 정신도 내내 팽팽하게 당겨진 활 시위처럼 긴장돼 있었다. 짧은 기간은 괜찮았지만 그런 생활이 몇 달이나 이어진다면 아무리 선택받은 자라도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장목화도 결국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었다.

“하긴. 다들 조금만 기다려. 먹을 것 좀 가져올게.”

“도와드릴까요?”

성건우가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장목화는 바로 인상을 팍 썼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우리 집에 가서 뭐 좀 있는지 보려는 거야.”

* * *

대략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장목화가 뭔가를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국수, 양배추, 토마토, 달걀, 고기 통조림 몇 개, 그리고 인덕션 렌지까지.

그녀가 가져온 것들을 한 곳에 내려두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직접 해 먹자!”

“좋죠, 좋아요!”

성건우가 곧장 튀어나왔다.

용여홍과 백새벽은 서로를 보며 풋,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 찾아온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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