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새로운 규칙
기원의 바다, 산과 물이 흐르고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섬.
모래사장 근처에 충격적일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가 하나 나 있었다.
성건우는 자신이 떠난 이후 메워지지 않은 구덩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뒤이어 여러 명으로 분열된 성건우들은 도랑을 파면서 이 구덩이로 연못의 물을 끌어왔다.
* * *
성건우가 잠든 사이, 용여홍은 수시로 장목화와 백새벽의 대화에 끼어들기도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고 파란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 걸려 있고, 그 아래 지프는 광야와 구릉이 교차 된 지대를 달리며 반고 바이오를 향해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위는 신록으로 파릇파릇했다. 가끔 야생 동물들도 보였다.
그리도 긴 겨울 지나, 어느새 봄이었다.
* * *
촉촉하게 내리는 이슬비 속, 카무플라주 무늬가 그려진 지프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지프가 다다른 곳은 구조팀에겐 더없이 익숙한 반고 바이오의 입구였다.
물론 지상에 올라오는 일은 그리 흔치 않으니, 다들 대문도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 그 험난한 여정 끝에 마침내 돌아온 이들의 집이었다.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 입구를 마주하자, 네 사람의 눈이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반면 성건우는 조금 다른 의미로, 손을 들어 입가를 훔치고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을 떠난 이후, 지프는 거의 멈추지도 않고 달렸다. 큰 거점에 한 번 방문해 식량만 좀 보충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네 사람은 자신이 있었다. 회사를 떠났을 때와 달리 생명 제례 교단의 매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네 사람의 전체적인 실력 역시 상당히 향상된 상태라 굳이 우회로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단, 신중한 태도와 경계심을 유지하며, 매복 당하기 쉬운 곳은 피해 달렸다.
그렇게 구조팀은 아주 효과적으로 시간을 절약해, 비로소 이 반고 바이오의 품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반고 바이오 입구의 은백색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순간 장목화는 눈썹을 살짝 까딱거렸다. 안의 구조가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이곳을 지키는 안전부 직원도 스무 명에서 서른 명으로 늘어났고, 신형 스캐너도 두 대나 설치돼 있었다.
장목화는 아예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쏙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때, 입구 구역 담당자가 이쪽으로 웃으며 다가왔다.
“어, 모카 아냐?”
서른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피부 빛은 고동색, 얼굴의 각이 좀 분명한 편이었다. 이름은 유정식, 안전부 D8급 대장이었다.
“⋯⋯.”
이미 상당히 낯설어진 어렸을 적 별명에 장목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뒷좌석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목소리를 잔뜩 깐 성건우가 조수석의 백새벽에게 말했다.
“모카라니, 큰 흰둥이랑은 너무 다른데.”
백새벽은 입술만 꽉 깨문 채 아무 대꾸도 없었다. 하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광대 때문에, 그녀의 얼굴 근육은 살짝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장목화가 숨을 느릿하게 뱉은 뒤,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고 하차했다. 그러곤 유정식을 향해 애써 웃음을 그려 보였다.
“유 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보안 조치가 왜 이렇게 강화된 거죠?”
‘그래, 누굴 탓해. 어릴 때부터 봤던 오빠 친구를 뭘 어쩌겠어.’
곧이어 유정식은 장목화를 따라 내린 성건우, 용여홍, 백새벽을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누가 일을 저질렀거든. 새해가 되기 전에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온 팀이 물건을 제출하는데, 어느 덜렁이가 몰래 두 개를 숨겨놓고 팀장한테 넘기질 않은 거야. 결국 그중의 하나가 뭔가 문제를 숨기고 있었던지 혼란이 일어났어. 뭐, 그렇게 큰 건 아니라 금세 해결되긴 했어.
어쨌든 이 일로 이사회에서 부장을 문책했고, 부장은 열받아서 새해가 되자마자 규칙을 바꿨어. 입구에 검사 시설이랑 등록 초소를 증설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팀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을 여기다 제출하라고. 물건들은 심사를 다 받은 후에야 다시 돌려받을 수 있어.”
장목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 모두한테 너무 불편한 거 아닌가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물건 하나를 숨길 방법을 고민 중이었다. 디마르코의 기운이 고형화된 청록색 야명주, 그건 절대로 상납하고 싶지 않았다.
유정식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맞아, 그래서 그 재수 없는 녀석도 무려 3급이나 강등당했어. 그래, 어쨌든 다들 좀 협조해줬으면 좋겠는데.”
“네.”
장목화는 아무 반기도 들지 않고 팀원들을 불러 지프의 트렁크를 열었다. 그와 동시에 성건우에게 눈짓을 했다.
성건우도 이미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팀원들이 나무상자 두 개를 옮기는 걸 지켜만 봤다.
“다들 좀 와 봐. 이게 뭐야?”
유정식은 검사를 담당하는 안전부 직원 몇몇을 부르며 호기심을 보였다.
대부분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면 전부 자잘한 것들만 가져왔었다. 보통 통조림으로 가득 찬 종이 상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 또 큰 것이라고 해봤자 이렇게 크고 단단한 나무 상자로 옮길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장목화가 의도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열어보면 알 겁니다.”
유정식도 거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건 그의 일이기도 했다.
곧장 허리를 굽힌 그가 둘 중 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유정식은 시야에 들어온 물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이, 이건 군용 외골격 장치잖아!’
“……헉.”
그보다 직급이 낮은 다른 직원들도 하나같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곧장 또 한 명이 나머지 상자도 열자, 그 안에도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들어있었다. 게다가 이건 좀 전에 본 것보다 더 신형이었다.
검사 직원들의 눈빛이 전부 그쪽으로 쏠린 이때, 장목화는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성건우는 그제야 주머니에 꽂았던 왼손을 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목화 역시 비로소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초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린 유정식이 구조팀을 쳐다보았다.
“너, 너희, 대체 이게 어디서 난 거야?”
군용 외골격 장치는 첨단 기계 전자 설비인 동시에 대량 살상 무기였다. 이런 건 회사에도 많지 않아서 늘 분배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겨우 넷뿐인 구조팀이 이 무기를 무려 두 대나 가져온 것이다.
“한 대는 사냥꾼 임무를 해결하고 얻은 물자로 교환했고, 다른 하나는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장목화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유정식과 안전부 직원들은 더욱 멍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들도 다 외근을 나가본 적이 있었다. 심지어 일부는 유적 사냥꾼의 신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줄 만큼 풍부한 보수가 약속된 임무는 본 적이 없었다.
전리품으로 얻었다는 설명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군용 외골격 장치 한 대를 갖고 있던 장목화의 구조팀에겐 실제로 그만한 실력이 있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유정식이 입을 열었다.
“이번 외근으로 경험도 진짜 많이 쌓았겠네.”
그는 상세한 일을 캐묻는 건 포기했다. 어차피 장목화가 보고할 대상은 그가 아닌, 제니 부부장이었다.
“그래도 인류를 구하기엔 아직 부족하죠.”
성건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마찬가지로 조용히 웃던 유정식이 주위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왜 다들 보고만 있어? 차례대로 검사하고 분류한 다음에, 등록해야지.”
이 군용 외골격 장치들을 먼저 선보인 덕에, 직원들은 더 이상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았다. 지프에는 휴대용 컴퓨터도 여러 대나 실려 있었지만, 기초적인 검사는 가볍게 통과하고 바로 상부의 심사 단계로 넘어갔다.
그동안 구조팀은 소지품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유정식은 네트워크 데이터에 근거해 구조팀이 전에 등록했던, 심사받았던 물건들은 곧장 돌려주었다.
그때, 한 직원이 평범한 유리구슬 하나를 들고 성건우에게 물었다.
“이런 장난감은 어디에나 널려있지 않아? 굳이 왜 가져온 거지?”
이런 구슬은 반고 바이오 지하 빌딩에선 보기 드물었지만, 애쉬랜드 위에선 흔했다.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니 그저 아이들 장난감으로만 쓰일 뿐이라 어디서든, 누구든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냥 폐허 도시마다 이런 유리구슬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지금 성건우가 가지고 있는 이 구슬보다 더 예뻤다.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기념하려고요.”
“하하, 혹시 어떤 아가씨한테 선물로 받은 거야?”
안전부 직원이 농담하며 유리구슬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기초적인 검사가 끝나고, 성건우는 스캐너를 통과했다.
이제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장목화는 즉각 텅 빈 지프를 원래 자리에 옮겨놓고, 팀원들과 함께 647층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네 사람은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전에 받았던 전보 내용에 따라, 이들은 저녁을 먹기 전 구조팀의 부부장 제니를 만나러 가야 했다.
장목화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문득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이따 모르는 거 있으면 적극적으로 질문해.”
“네, 팀장님!”
용여홍은 가슴팍까지 탕탕 두드릴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네 사람은 이미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지도부를 만났을 때의 주의사항을 상의했었다. 그때 부부장에게 먼저 질문하는 게 그녀에게 질문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도 나왔다.
게네바를 구조했던 것, 디마르코 일 등등 비밀을 품은 구조팀 입장에서는 최대한 제니의 질문을 줄여야 비밀을 들킬 가능성도 줄어들었다.
“제가 물어도 돼요?”
성건우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 의지를 밝혔다.
“⋯⋯아니.”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풀었다.
그녀는 성건우의 고질병이 의사가 보고한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못내 걱정스러웠다.
무엇보다 제니가 성건우 때문에 화가 나 여태 쌓아온 이미지를 잃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럼 구조팀은 훗날 더 큰 곤경에 빠지게 될지도 몰랐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646층에 도착했다.
구조팀은 제니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 뒤, 안내에 따라 긴 소파에 앉았다.
밤색 머리를 길게 기른 제니는 단정한 차림을 하고서 온화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하늘색 자기 찻잔을 들고, 일인용 소파로 다가와 앉았다.
“들어 보니까 군용 외골격 장치를 두 대나 가져왔다던데, 대단하네.”
장목화는 이 질문에 곧장 답하는 대신, 기대감 어린 웃음을 드러냈다.
“부부장님, 전에 그러셨죠. 저희 힘으로 군용 외골격 장치를 얻는다면, 그건 저희 팀에 맡겨주시겠다고요.”
그러자 제니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빙그레 웃었다.
“한 번에 두 대나 가지고 올 줄은 몰랐지. 휴, 이미 상당히 소식이 퍼져서 다들 분배받고 싶어 난리더라고. 방금도 작전반 총감독이 그 일로 전화가 왔더라니까? 너희 덕분에 내가 아주 난처해졌어.”
“제가 부부장님을 도와 그 사람들을 설득하겠습니다.”
성건우가 자발적으로 나섰다.
제니 역시 구조팀의 급한 마음을 알고 웃으며 반문했다.
“어떻게 설득하게? 주먹으로?”
‘그 방면에선 쟤가 전문가이긴 하거든요.’
장목화가 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내 제니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다른 사람들 압력이야 얼마든 감당할 수 있지. 심사만 문제없이 통과하면 그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엔 너희 이름이 걸릴 거야. 임무 때문에 밖으로 밖으로 나갈 때마다 수령할 수도 있고. 지프도 너희가 이미 개조한 것 같던데? 앞으론 너희들 전용 차량으로 써.”
“예! 감사합니다, 부부장님!”
장목화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으로 몰래 성건우의 팔을 꼬집었다. ‘저희와 지프의 사랑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등등의 헛소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대화로 분위기가 적당히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진 이때, 제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이번 임무에 대한 구두 보고부터 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