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06화 (306/649)

306화. 귀로

모든 문제의 답은 신세계에 있다.

구조팀 모두가 소리 없이 이 말을 반복했다.

이들과 비엘의 대화에 방주 사람들은 이번 디마르코 암살 작전이 틀림없는 신령의 지시를 따른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짧은 침묵 후,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가 돌연 비엘을 쳐다보았다.

“너한테 극도의 두려움이라는 각성자 능력이 있는 거야?”

장목화가 따라서 물었다.

“헬빅을 죽인 게 너였어?”

그녀는 전에 경계 교파의 숨기 의식이 진행됐을 때도 비엘이 며칠간 실종된 것을 떠올렸다. 헬빅이 쇼크사로 죽은 것 역시 같은 시기였다.

이 두 사건을 한데 묶어 생각하긴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비엘은 아직 어린 소년으로, 헬빅과 별 원한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엘은 그냥 비밀이 많은 사람처럼 보일 뿐, 각성자와 관련된 인물로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비엘이 한 말엔 본인에게 극도의 두려움이라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헬빅의 사인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내 비엘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누가 내 키를 가지고 놀리래? 헬빅은 일찍 죽었어야 했어. 헬빅의 아내도 그렇고, 여기 수많은 사람이 헬빅이 죽기를 바랐다고.”

장목화가 황당한 얼굴로 비엘을 쳐다보았다.

‘키가 작다고 놀렸다고 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너무 과한 거 아냐?’

그때, 피식 웃던 성건우가 비엘을 똑바로 보며 앞으로 두 발짝 나섰다.

비엘은 순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무슨 짓이야?”

“맞혀봐.”

성건우가 얼굴에 쓴 생동감 넘치는 원숭이 가면을 눌렀다.

그 가면 너머에 있을 웃는 얼굴을 상상한 비엘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헤, 헬빅의 복수를 하려고? 그 사람은 악마였어! 그 사람을 죽인 건 여기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 대부분이 마땅히 칭찬할 일이라고!”

성건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고 또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몇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던 비엘이 날카롭게 외쳤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극도의 두려움을 쓸 거야!”

성건우는 웃음을 터뜨리며 옆쪽의 게네바를 가리켰다.

“못 봤어? 이 사람한텐 두려운 감정이란 게 없어. 거기다 나한텐 페이카도 있는데? 난 그렇게 쉽게 놀라 죽을 수가 없어.”

비엘은 은흑색 지능 로봇 게네바를 슥, 훑어내렸다. 그리곤 허리를 살짝 굽히여 언제든 공격에 나설 태세를 취했다.

“나, 난 예비 신사야!”

바로 그때, 성건우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왜 그래? 왜 긴장하는 거야? 난 레드스톤 마켓 치안관이 아니야. 나한테 널 심판한 자격 같은 게 없어. 난 그냥 차를 타고 레드스톤 마켓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걸로 비엘이 헬빅을 죽였다고 광고만 좀 할 생각이야.”

성건우는 전술 배낭을 열고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스피커를 꺼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비엘은 나중에서야 톡 쏘듯 말했다.

“맘대로 해!”

뒤이어 홱 돌아선 그는 빠르게 몇 걸음 내달리다가 훌쩍 뛰어올라 천장 위로 기어 올라갔다. 비엘은 그대로 통풍관 안으로 사라졌다.

성건우는 비엘을 눈으로 배웅한 뒤, 동료들 곁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금속 와우를 만지작거리던 장목화가 물었다.

“야, 진짜 비엘 하나 놀리자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야? 굳이 왜? 생각보다 너 뒤끝이 좀 길구나?”

성건우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저 정도로 위험한 애를 놀려야 재밌죠.”

당연한 순서처럼 장목화가 막 그에게 눈을 부라리려는데, 마침 하인들 한 무리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얼굴에 불안함이 어려 있었지만, 눈빛은 상당히 덤덤했다.

이내 그들은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쓴 시체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멈춰있던 그들의 눈동자에 점차 빛이 돌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레드스톤 마켓 서북쪽, 호숫가 밭.

갈예린, 갈예원 자매 앞에 지하 방주 관리 위원회 위원이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지하 방주 관리 위원회 위원은 바로 여천수였다.

여천수는 자매를 보며 앞쪽 밭을 가리켰다.

“오늘부터 이 땅은 너희 거야. 사람을 꾸려서 이쪽으로 도랑을 만들고 너희랑 같이 각종 개간 작업을 맡길 거야. 근데 그 이후론 너희 스스로 일해가야 해. 걱정은 하지 말고. 첫해에는 종자를 무료로 나눠줄 테니까.

레드스톤 마켓이나 교회당에 각종 기계 대여를 신청할 수도 있어. 상응하는 비용은 매해 밀수 사업에 지급되는 배당으로 대신할 거야.

첫해를 제외하고, 그 이후부터는 매해 수확량 일부를 상납하고 밀수 사업과 방주 경비를 담당하는 구성원들의 식량을 대주면 돼.”

“아, 알겠습니다!”

자매는 서로를 쳐다보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젖었다.

작은 거점 출신인 자매에게 직접 경작할 수 있는 땅을 얻게 된 건 기적과도 같았다.

토지에 대한 지계를 받은 자매는 경계 교회당으로 돌아가 에이돌른의 성휘 앞에서 진심을 담아 기도했다.

자매가 방주를 나온 건, 지하에서의 생활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다 첫째는 일단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자매는 우선 경계 교회당 지하 1층을 빌려 살다가 봄이 되면 밭 근처에 온전하고 숨기 쉬운 건물을 고쳐 살기로 했다. 사람을 불러 보수와 연결을 부탁하면 이제 안전한 보금자리도 마련할 수 있었다.

레드스톤 마켓 사람들은 경계 교파의 부탁에 어렵사리 지하 방주 관리 위원회의 존재를 인정하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건물을 이용하고 현재 버려진 논밭을 개간해 쓰는 걸 허락했다.

물론 거래는 공정했다. 지하 방주 역시 일정한 대가를 지불했으며, 밀수 사업도 적지 않게 양보한 상태였다.

* * *

온종일 바쁘게 움직인 뒤, 갈예린, 갈예원 자매는 임시로 분배받은 주거지로 돌아갔다. 갈예린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낡은 수건을 꺼내 흔들었다.

“일단 얼굴부터 씻어.”

“싫어. 좀 누워있을래. 오늘은 너무 피곤해.”

갈예원은 침대 위에 누워 응석을 부렸다.

오랜만에 어리광을 부리는 동생이 참 반가워서, 갈예린은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부터 씻을 테니까 다음에 씻어.”

가벼운 걸음으로 가장 가까운 화장실에 이른 갈예린은 차가운 물로 얼굴과 양손을 씻었다.

그렇게 세수를 마치고 돌아가던 그때였다. 갈예린의 귀에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닿았다. 소음은 바로 전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흠칫 놀란 그녀는 긴장감을 안고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순간 갈예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자신과 동생의 방 앞에 여러 사람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문 안쪽으로, 구부정한 자세의 동생이 보였다.

혼탁한 눈동자와 충혈된 흰자를 드러낸 동생은 입가로 침을 질질 흘렸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동생이, 너무도 낯선 모습이 되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악몽이 이보다 현실적일까.

갈예린은 돌연 자신의 세상만 현실에서 동떨어져 나온 기분이었다.

‘예원이……. 우리 예원이가……. 무심병에 걸렸어⋯⋯.’

갈예린은 눈동자에 초점을 잃고 문 안쪽만 멀거니 쳐다보았다. 차마 가까이 다가설 수도, 이 상황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

탕!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갈예원이 픽, 쓰러졌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느릿하게 퍼져나가고, 채 감지도 못한 두 눈에선 여전히 새빨갛게 충혈된 무심병의 그림자가 보였다.

갈예린은 갈대처럼 휘청이며 겨우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싸늘히 식어가는 동생의 곁에 쪼그려 앉아, 동생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실 시야는 일찍이 부옇게 흐려진 터라 사랑하는 동생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목은 자꾸만 따갑게 막혀서 동생을 불러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 갈예린의 귓가로 누군가의 음성이 와닿았다.

“무심병이야.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병. 너무 상심하지 마. 방금 막 땅이 생겼잖아. 훗날에는 네 가정도 이루고 아이도 낳을 수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 * *

달리는 지프 안.

장목화는 조수석의 백새벽을 바라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각성자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어. 디마르코가 신화나 전설 속에 존재할 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잖아.”

숙명통, 신경통, 육감 박탈 모두가 상식 밖의 능력이었다.

구조팀이 처음으로 시도한 참수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디마르코가 차지했던 라르스의 육신을 단번에 처치하지 못했더라면 그 후의 일은 더욱 어렵고 위험하게 진행되었을 터였다.

게네바와 야명주에 의지하는 한편 에이돌른의 예비 신사 비엘이 전투에 참여할 때까지 그저 시간을 끄는 방법밖에 없었다.

구조팀의 계획 중 첫 번째 단계가 거대한 성공을 거뒀음에도, 디마르코와의 대항은 위기의 연발이었다.

미리 정보를 파악해둔 구조팀이 디마르코의 약점을 빠르게 간파하고, 매사 특이한 성건우가 이 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게 다행이었다.

이내 뒷좌석의 용여홍이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번 작전은 성급하게 진행하면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준비는 이미 충분했어. 에이돌른의 비호도 받았고. 만약 작전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훗날 이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목숨을 잃었겠지.

지금은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았고, 그 외의 수확도 적지 않아. 고성능 배터리 무려 스물두 개, M-45형 군용 외골격 장치, 거기다 디마르코의 기운을 고형화한 야명주까지 챙겼어.”

그녀도 결국 웃음을 보였다.

지하 방주에 있던 고성능 배터리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장목화는 관리 위원회의 방어에 필요한 양을 고려해 전부를 다 챙기진 않았다.

또한 이 배터리는 현재 레드스톤 마켓에 남은 게네바에게 잠시 맡겨둔 상태였다. 게네바는 타르난의 시장이었던 경력을 바탕으로, 현재 지하 방주 관리 위원회의 임시회장이 되었다.

그는 그곳 상황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 위드 시티의 윤복 총포사로 가 구조팀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지금은 머신 헤븐에 쫓기고 있는 상황이라, 게네바는 기본적으로 방주에만 머물며 경계 교파와 접견할 때를 제외한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행여 이상한 기척이라도 보이면 아이언 마운틴 쪽으로 이어진 방주 출입구를 따라 그대로 도주할 계획이었다.

M-45라는 신형 군용 외골격 장치는 방주 주민들이 구조팀에게 감사 선물로 아득바득 안긴 것이었다.

장목화도 구조팀의 실질적인 상황을 고려해 이를 거절하진 않았다.

덕분에 백새벽의 전투 능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색이 변한 야명주로 말할 것 같으면, 성건우가 실험해본 결과 디마르코의 숙명통이 고형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물론 디마르코의 실제 능력보다는 훨씬 약한 수준이었다.

수확에 관한 이야기를 끝내고, 장목화가 백새벽을 힐긋 보며 웃었다.

“이번엔 우리 흰둥이만 다쳤네. 사실 좀 놀랐어. 작은 흰둥이는 평소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는데 이번엔 참수 작전에 반대하지도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왔잖아. 좀 낯설더라고.”

조수석의 백새벽은 앞 유리만 보며 한참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줄곧 이 애쉬랜드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은 이미 삶이 퍽퍽하고 힘드니까, 다른 사람한테 신경 써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유진에게 잡혀 노예가 됐을 때도 저 스스로한테 그렇게 되뇌었어요.

그래도 언젠가는, 누구라도, 아니면 어떤 팀이 갑자기 나타나서 절 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은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긴 공백을 두고 말을 이어붙이는 백새벽의 눈빛이 참 쓸쓸해 보였다.

“그렇지.”

장목화도 백새벽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성건우가 돌연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젠 정식으로 인류 구원 작전에 가담하기로 한 거야?”

백새벽은 그의 말엔 그냥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담이 오가던 그때, 성건우는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대며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에 따라 성건우의 눈도 스르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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