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05화 (305/649)

305화. 우연의 배후

다시 인간과 어인, 산 요괴들의 시체가 널린 광장이 펼쳐졌다.

집이라는 표시가 그려진 지도와 한명호 팔에 돋아난 호박색 비늘이 보이고, 분노에 찬 그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번졌다.

- 그래! 난 아류인이다! 내가 바로 아류인이야! 하지만 이 마을, 이 세상 어느 인간이랑 비교해도 나보다 더 인간다운 사람은 없을 거다!

또다시 빛이 휘몰아치며 그날을 불러왔다.

아직도 스스로를 인간으로 생각하냐는 그 질문에, 고등 무심자는 한없이 침묵했었다. 그리고 그 늙어버린 그림자는 고층 빌딩에서 추락했다.

-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습니까?

이와 함께 번지던 웃음과 함께, 게네바가 던진 묵직한 반문이 흘러나왔다.

- 우리는 인간의 일종이 아니라는 건가?

그 곁에 야트막한 언덕 위, 온전하지도 못한 시신들이 있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죽은 여자가 있었다. 녹음기에서 흐르던 무기력한 음성이 있었다.

-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죽인다고요?

그리고…….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눈빛들이 드리웠다. 좁은 포대에 담긴 시신들이 나타났다. 옅은 빛 속에, 채 눈을 감지도 못하고 원망하듯 하늘을 올려다보던, 공포와 절망에 찬 눈들이 있었다.

이 많은 장면과 질문에 둘러싸여서, 디마르코는 그저 겁에 질린 채 멍한 얼굴만 드러냈다.

성건우는 그를 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왜냐하면, 난 사람이니까.”

이윽고 그가 하얗고 고른 치열을 드러낸 채 웃으며 오른손을 뻗었다.

섬 주위에 굳어있던 거대한 파도들은 빛 속의 장면들과 휘몰아치며, 구세계 검은 사제복 차림의 인영을 집어삼켰다.

그 수많은 장면과 여러 명의 성건우를 비추는 거대한 파도 앞에, 디마르코의 인영이 점차 흐릿해졌다. 꼭 셀 수 없는 갈래로 나뉘어 어디론가 도주하려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그의 체내에 동화된 여덟 성건우가 각자의 동작을 취했다.

더러는 제 몸을 한껏 늘려 디마르코의 두 다리를 칭칭 감았고, 더러는 이마에서 두 팔을 뻗어 디마르코의 입을 단단히 막았다. 또 어디선 가슴팍을 찢고 나와 디마르코의 몸통을 움켜쥐고, 또 하나는 정수리에서 튀어나와 스피커로 구세계의 슬픈 노래를 틀었다.

디마르코는 이렇게 몸에서 자라난 여덟 성건우에게 꽁꽁 묶였다.

그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고,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그저 하늘을 뒤덮을 듯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를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심령의 복도, 그에게 속한 방의 검은 벽에 박힌 얼굴들이 하나둘 빠져나와 빠르게 옅어지고, 종국엔 그 방도 무너져 내렸다.

* * *

지하 방주, 지하 6층 C 구역, 엉망진창이 된 디마르코의 방.

장목화는 왼손을 그대로 허공에 멈춘 채, 더는 성건우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얼마나 더 관찰해야 할지, 성건우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때 다시 건드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성건우의 손에 들린 야명주가 돌연 청록빛으로 물들었다.

쿵…, 쿵…, 쿵….

장목화는 눈 깜짝할 사이 청록색이 된 야명주를 보며,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녀는 가파르게 솟구치는 긴장감 속에 성건우의 눈으로 시선을 옮였다.

생동감 넘치는 원숭이 가면 아래, 성건우의 짙어졌던 눈동자가 빠르게 원상태를 회복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 숙여 제 손의 청록 야명주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목화는 언제든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성건우를 한번 떠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어떤 색일지 생각하고 있어요.”

‘건우스러운 답이야, 디마르코는 절대 흉내 낼 수 없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목화가 뭔가 생각에 잠긴 양 물었다.

“디마르코가, 어……, 너한테 빙의하려고 할 때 틈을 봐서 반격한 거야? 그때가 제일 약할 때라 너를 아홉으로 나눠서 처리한 건가?”

그녀는 디마르코의 행동을 정확하게 정의할 말을 찾지 못해서, 언젠가 구세계 콘텐츠에서 접한 ‘빙의’라는 단어를 택했다.

순간 성건우가 몹시 놀란 눈빛을 했다.

“어? 팀장님도 다른 사람 심령에 침입할 수 있는 건가요?”

‘……건우다! 이건 틀림없는 건우야!’

장목화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지금 그 유리구슬과 융합한 건 디마르코의 남은 기운인 거고?”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목화도 이젠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 계획에 따라 처리하고. 난 우리 작은 흰둥이 좀 보러 갈게.”

한편, 이미 방으로 들어온 용여홍은 게네바와 함께 백새벽의 몸을 뒤덮은 콘크리트 조각들을 급하게 치우고 있었다.

“괜찮아?”

용여홍이 매우 걱정하며 물었다.

“아마도. 으, 죽진 않을 거야⋯⋯. 오른쪽 어깨랑 팔이 부러진 것 같아.”

백새벽은 몸을 살짝 움직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즉시 탐지 모듈의 매개 변수를 바꾼 게네바가 백새벽을 검사해봤다.

곧이어 장목화가 다가와 전술 배낭에서 페이카를 꺼내 백새벽에게 한 대 놔주었다. 뜻밖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조금만 참아. 일단 간단히 고정해줄게.”

장목화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부상을 입은 백새벽은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게네바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내부 출혈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장목화와 용여홍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새벽도 다행이라는 듯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디마르코 방의 사방에서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중에는 급한 것도, 느린 것도, 묵직한 것도, 가벼운 것도 있었다.

마침내 방주의 경비대가 디마르코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성건우는 곧장 검은 바탕에 흰색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다시 라르스의 얼굴에 씌운 뒤, 전술 배낭 안에서 확성기와 미리 작성해둔 원고를 꺼냈다.

뒤이어 그가 이 층계가 다 울리도록, 빽빽한 원고를 읽었다.

“디마르코는 이미 죽었습니다! 디마르코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 순간, 점점 가까워지던 발걸음 소리도 거의 동시에 멈췄다.

“우린 디마르코 한 사람만 노립니다. 다른 분들은 긴장할 것 없습니다. 설령 디마르코의 친척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계 교파에서는 방주 내 에이돌른의 신도가 더 이상 핍박받는 삶을 살지 않기를, 디마르코의 폭정에 떨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모두 자유롭게 방주 밖으로 나가 레드스톤 마켓 주위에 버려진 논밭을 일구게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 수확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식량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입니다. 자유롭게 원하는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방주를 떠나고 싶다면 떠나고, 여기 남고 싶다면 남아도 됩니다. 경작하고 싶으면 경작을, 계속 방주의 주인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원래 각종 사업을 담당하고 있던 집사와 관리자들 역시 놀랄 것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계속 여러분들의 일을 하며 상응하는 인맥과 루트를 유지하십시오. 여태 디마르코에게 속해 있던 수익을 모두에게 나눠주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두에는 여러분들도 포함입니다.

경비대원들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방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역량이자 모두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주는 무기가 될 겁니다.

또 우리는 방주 관리 위원회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구성원은 여러분 중에 선발될 거고, 교회 주교께서 감독해주실 겁니다.

좋습니다. 이제 다들 디마르코의 방으로 오십시오. 관리 위원회 회원 명단과 앞으로의 이익 분배 방안을 토론합시다.

어떤 분들은 이 틈을 타 일부 물자를 가지고 방주를 몰래 떠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분들은 이제 앞으로 혼자 삶을 책임져야 합니다. 외롭게 돌아다니는 황야유랑자가 되느니 이쪽에 합류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겁니다.

여천수, 보드, 너희들도 이 중 하나야.”

일단 확성기로 지하 6층 경비대원, 하인, 정부, 아이들에게까지 똑똑히 알린 뒤, 성건우는 곧 지하 방주의 방송 시스템을 이용했다. 녹음된 내용은 방주는 물론 당직을 맡아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들에게까지 전해졌다.

* * *

지하 2층.

구조팀에게 기절 당했던 네 경비 대원도 깨어나 방송을 들었다.

여천수와 보드 역시 기절한 척은 그만두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에 찬 얼굴로 동료들의 속박을 풀어주었다.

두 사람을 향한 네 경비 대원의 눈빛에는 약간의 어리둥절함과 분노, 그리고 부러움까지 마구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 여천수와 보드가 돌아보자 다들 일제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른 가자.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 걱정하지 마, 내 몫이 생기면 너희들도 한몫 단단히 챙겨줄 테니까!”

여천수가 동료들을 재촉하며 약속했다.

그러자 보드도 연달아 동조했다.

“그럼! 다 형제 같은 사이인데, 단단히 뭉쳐야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 네 경비 대원은 가슴팍을 탕탕 두드리며 앞으로 반드시 이 두 사람을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 * *

지하 1층, 아직 훈련 중인 하인들의 방.

바깥의 소란에 깨어난 갈예린, 갈예원 자매는 순찰 중이던 경비 대원들과 각 관리자들이 엘리베이터로 다급히 향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때, 성건우가 애쉬랜드어로 녹음한 내용이 무전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 디마르코는 이미 죽었습니다!

……

우리는 여러분 모두 자유롭게 방주 밖으로 나가 레드스톤 마켓 주위에 버려진 논밭을 일구게 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 수확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식량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흠칫 놀란 갈예린은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인들 목숨을 파리 목숨같이 여기는 그 못된 디마르코가 죽었어! 이제 지하 방주의 주인이 바뀐 거야! 그 새 주인은 모두한테 자유와 식량과 안전을 보장하고 있어. 우린 구원 받은 거야, 우리한테도 미래가 생겼어…….’

갈예린의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동생 갈예원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도 얼른 가자!”

노예라는 이름 아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이들도 각자의 방에서 쏟아져나왔다.

* * *

먼저 백새벽의 부상을 시급히 처치한 구조팀은 지하 방주의 모든 사람이 몰려오기만 기다렸다.

엉망진창이 된 방엔 이미 적잖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대부분 이 층에 속한 경비대와 디마르코의 정부, 그리고 아이들이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면서 무슨 말인가 하려던 장목화는 순간 문밖의 천장 통풍구를 보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곧 그곳에서 한 인영이 훌쩍 뛰어내렸다.

160센티미터를 살짝 넘는 키에 노란 머리카락, 파란 눈동자를 가진 소년.

며칠간 실종 상태였던 비엘이었다.

비엘은 방에 있는 디마르코의 시체를 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빨리 처리하다니. 내가 늦었네. 에이! 겁쟁이에 극도의 공포까지 더하면 디마르코가 귀신이라 해도 쇼크사로 죽일 수 있었는데.”

“뭐?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장목화가 되물었다.

그 즉시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조금 전 비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제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장목화가 비엘을 바라보았다.

“우리한테 야명주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지하 방주에 일찍부터 들어와 있었던 거야?”

비엘은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 실종이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 신사, 난 예비 신사야. 그 어인이 아니라 나야말로 장차 진정한 신사가 될 사람이지!

우연의 배후엔 종종 운명이 흐르고 있어.”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서로를 돌아보던 구조팀원들의 표정 역시 저도 모르게 진지해졌다.

이내 장목화가 떠보든 물었다.

“혹시 달지기가 우리한테 남긴 말 더 없어?”

비엘이 웃었다.

“신탁이라고 표현해야지! 달지기가 어떻게 일반인에게 신탁을 주겠어? 나도 이따금 그분이 다른 세상으로부터 전해 오는 목소리만 들을 뿐인데.

달지기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 모든 문제의 답은 신세계에 있다.”

달지기의 신탁에 관한 이야기에, 비엘의 표정이 더욱 엄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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