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과거의 진상
기원의 바다, 산과 물, 그리고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섬.
산봉우리처럼 거대해진 디마르코의 인영은 돌연 극도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수면에 비친 그림자처럼 변한 인영은 파도에 휩쓸린 듯 출렁거리고 왜곡되면서 깨졌다가 재조합됐다.
인영은 기운도 일순 쇠약해져 급히 줄어들며 정상인 크기로 돌아왔다.
이때, 이미 그에게 오감을 박탈당한 성건우들은 나무토막처럼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디마르코는 그들에게 숨을 돌리거나 반격할 기회도 주지 않기 위해, 애써 정신을 차린 뒤 재차 오른손을 뻗었다.
“의식 박탈!”
이번에 그의 목소리는 허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성건우들은 하나둘 흐려지며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여덟 명의 성건우만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한동안 극도로 흐릿해졌다가 원상회복됐을 뿐이었다.
“이게⋯⋯.”
디마르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광에 휩쓸려 대량의 분신을 잃고 극도로 허약해졌다 해도, 상대의 모든 의식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디마르코와 성건우 사이엔 엄연한 급의 차이가 있었다. 게다라 디마르코는 순서에 따라 상대의 오감을 하나하나 빼앗으면서, 최후의 일격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한편, 의식 박탈이 실패로 돌아가며 효과에서도 벗어난 성건우들은 재차 구세계 사제복 차림에 같은 색 구식 모자를 쓴 중년 남자를 보게 되었다.
성건우들은 단체로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역시 허접하네.”
어딘가 익숙한 그 말에 디마르코는 한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힘도 다 잃고 허약해진 그는 더 이상 포악하고 광기 어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냅다 외쳤다.
“대화하는 와중에 능력을 발휘한 거냐?”
개인용 바주카포를 든 성건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내 능력으로 당신한테 미칠 수 있는 영향이 극히 적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최대한 일찍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고.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며 그 효과가 강화되길 바라면서 말이야. 한 번 더 말해줄까?”
들것을 든 두 명의 성건우가 한 명씩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허접하군.”
하얀 가운을 걸친 성건우가 총정리를 하듯 말을 받았다.
“디마르코 한 사람마다 서로 다른 말을 하게는 못 하는가 봐?”
“그러니까⋯⋯.”
그러니까 디마르코의 잠재의식 속엔 자신이 성건우만큼 미치진 않았다는, 자신이 생각만큼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었다.
지금처럼 오직 의식 영역에서만 이루어지는 대치 속에선, 자아 인지는 순전히 능력의 강도와 효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는 디마르코가 외부의 영향으로 힘이 빠지고 허약해졌을 때 대폭 강화되었다.
“너 이 자식!”
가만히 보면, 디마르코는 좀 쉬이 욱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돌격 소총을 쥔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혹시 나랑 이렇게 많은 말을 해선 안 됐다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달려들어 날 처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근데 말이야, 나랑 말하고 나서야 내 능력에 영향받게 됐다는 착각은 대체 언제부터 한 건데?”
성건우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디마르코가 자신의 심령 세계에 침입해 이 섬에 오른 순간부터 그를 향해 억지쟁이 능력을 발휘했었다.
다만 둘 사이의 급 차이로 인해, 성건우는 억지쟁이 능력도 전력을 다해 발휘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디마르코도 이 섬에서 더더욱 거만하고, 의기양양하고, 자기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나 이 순간, 디마르코는 더 이상 격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포악하게는 보였지만, 그 얼굴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너는 지금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지? 내 의식의 회복력이 너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말하는 사이, 디마르코에게 느껴지던 허약한 기색이 사라져 있었다.
그때, 스피커를 들고 있던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면 이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의 손에서 돌연 황녹색 빛 덩어리 하나가 나타나는가 싶더니 빠른 속도로 응결돼 물고기 눈알만 한 야명주가 되었다.
같은 시각, 현실 세계의 성건우 손에선 더 이상 빛이 발산되지 않았다. 그의 손 위엔 평범한 유리구슬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심령의 복도에서 얻은 기운이 현실로 나와 특정 물건과 결합하며 고정될 수 있다면, 다시 심령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다.
야명주가 반응을 보인 그날 밤, 성건우는 이를 일차적으로 확인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디마르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친 거냐? 심령의 복도나 현실에서 쓰는 건 상관없다지만. 다른 사람의 기운을 본인 의식 세계에서 쓰는 사람이 대체 어딨어? 여긴 네 기원의 바다다. 네 심령의 섬이라고! 그 기운의 주인이 거꾸로 이곳에 강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넌 겁도 안 나는 거냐?”
스피커와 야명주를 쥔 성건우는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그래? 난 몰랐는데.”
그 답에 디마르코는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여기가 그저 의식 상태로 존재하는 곳이라 망정이지, 육신이 있었다면 정말 그랬을지도 몰랐다.
성건우는 계속해서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미 그쪽도 들어왔는데, 한 명 더 들어오는 게 뭐가 대수라고.”
성건우들 모두가 웃으며 합창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웃고 있는 성건우들을 바라보다가, 디마르코는 상대가 정말로 이미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스피커를 든 성건우는 손에 쥐고 있던 황녹색 야명주를 그대로 으스러뜨리고, 남아있던 힘도 남김없이 폭발시켰다.
심령의 섬은 그대로 황녹빛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디마르코의 육신도 그 색에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디마르코의 눈앞에 문 하나가 나타났다.
허상의 하얀 문은 반만 살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의 어둠 속에선 보일 듯 말 듯 한 여자의 인영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디마르코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선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솟구치고 있었다.
“안 돼!”
결국 그가 겁에 잔뜩 질린 채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 * *
디마르코의 방.
전류의 자극에 장목화는 다시금 제 몸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녀는 의식에 미친 영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이 영향은 언제든 다시 몰려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사실이 그녀의 사고까지 방해하지는 못했다.
방금의 경험으로 장목화는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구조팀의 두 차례 공격으로 죽은 건 리만의 연인 라르스지, 지하 방주의 주인 디마르코가 아니었다.
디마르코는 그 상태가 영생인에 가까운 괴물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박리시킬 수 있지만, 의식을 특수한 칩에 업로드해 기계 승려로 변하는 대신, 다른 이의 육신을 점거했다.
장목화는 다시금 방주의 경비대원들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또 다른 각도에서 찬찬히 하나로 연결 지어 보았다.
‘역대 지하 방주의 주인들은 어쩌면 지금 디마르코라고 불리는 이 괴물 하나였는지도 몰라. 디마르코의 특수성은 각성자의 능력에서 나오는 거야.
역대 지하 방주 주인들은 여러 여자를 두고 수많은 아이를 낳고, 하인과 경비 대원들의 결혼도 장려했어. 겉보기엔 새 생명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지만, 사실 그 많은 아이 중에 가장 적합한 육신을 고르려고 그랬던 거야. 그 대상이 보통 디마르코의 혈육에서 나타났던 거지.
막내아들이 요절하고 디마르코가 갑자기 광기 어린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마 그 아이 말고는 적합한 육체가 없었기 때문이겠지. 적합하지 않은 몸을 억지로 차지하면 오랫동안 버틸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디마르코가 현재 쓰고 있는 육신은 이미 쇠락하기 시작해 사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테고.
궁지에 몰렸으니, 더더욱 도리에 맞지 않는 짓을 하며 더 잔인하고 포악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심지어 경비 대원과 하인 중에 출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한테 본인의 아이를 낳도록 강요한 것도 그것 때문일 거야.
그 와중에 라르스가 나타난 거야. 디마르코의 희망이 될. 라르스는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디마르코와 똑같고, 점거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육신이었던 거야. 디마르코가 라르스의 육신을 차지하고 안정을 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마르코의 정부도 아이를 가졌고⋯⋯.’
장목화는 조금 전의 경험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토대로 거의 정확한 추측을 해나갔다.
이때 게네바는 정신이 거의 또렷해진 용여홍과 백새벽을 기절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장목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 참수 작전 성공이라고 확신했는데, 그냥 디마르코의 육신 하나를 죽인 것뿐이었다니.
잠깐만. 라르스는 죽었고, 디마르코의 정부가 가진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그럼 지금 당장 점거할 육신이 없잖아?
디마르코의 의식은 곧 사라지는 거야!
아니야, 그런데도 디마르코는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인다거나 지하 방주 경비 대원들이 말한 것만큼 잔인하게 굴진 않았잖아.
설마 라르스 이후에 점거할 육신을 따로 준비해뒀나? 아니면…….
우리 중에 누군가를 점거할 생각인 건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의 시선이 성건우에게로 홱, 돌아갔다.
바로 그때였다. 입을 벌린 성건우가 겁에 질린 고함을 내질렀다.
“안 돼!”
그의 몸 위쪽으로, 흐릿한 인영이 분리되어 나왔다.
구세계의 검은색 사제복을 입고, 같은 색의 구식 모자를 쓴 인영이었다.
성건우 위쪽으로 분리된 인영은 전설 속 귀신처럼 흐릿했다. 그 인영의 등장으로 주변 온도마저 약간 떨어진 것 같았다.
‘디마르코!’
장목화는 마침내 이 세상에 의식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다.
사실 영생인 프로젝트가 성공했다는 사실과 기계 승려의 존재는 이미 그 문제를 어느 정도 증명하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 장목화는 온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식 전체가 냉동되는 듯했다.
이에 그녀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이 고함과 함께 디마르코의 인영이 또 그녀에게서 이탈했다.
그 후, 인영은 순간적으로 용여홍에게 향했다.
“안 돼!”
“안 돼!”
디마르코의 허상 같은 인영이 용여홍과 백새벽 사이에서 연달아 번득였다. 용여홍과 백새벽 역시도 절로 공포에 질린 고함을 내지르기 바빴다.
지하 방주의 주인은 마치 길 잃은 파리처럼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구조팀원들에게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어디에서도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 짧은 1, 2초 사이, 디마르코는 엄청난 속도로 벌써 두 차례 빙의를 마쳤다. 심지어는 지능 로봇 게네바에게도 빙의를 시도했으나 그가 보인 반응은 없었다. 심지어 게네바는 ‘안 돼’라는 소리도 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번득이며 돌아다니던 디마르코의 인영은 어느 순간 돌연 사라지면서 기이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방의 새카만 벽엔 허상의 얼굴들이 드러나 있었다.
일그러지거나 구겨진 얼굴들은 악에 받친 눈으로 디마르코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그를 물어뜯지 못하는 게 한스럽다는 모습이었다.
디마르코는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검은 문에 달라붙어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은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커먼 문의 반대편은 주홍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위엔 금빛으로 번쩍이는 숫자도 붙어있었다. 그러나 문고리와 자물쇠엔 검은 종이가 발려 있었다.
꼭 구세계의 봉인처럼 문고리와 자물쇠에 딱 달라붙은 종이가.
“안 돼!”
디마르코는 재차 공포에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지난 오랜 시간, 그는 자신의 방에만 갇혀 이따금 다른 이의 심령 세계를 통해서만 복도에 나와 단서를 찾았었다.
디마르코가 염호의 상태나 남긴 말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도, 해결 방법이나 신세계의 문을 찾아 이 곤경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다.
그런데 머지않아 디마르코가 조금씩 달라졌다.
본래 디마르코 같은 강자에게 어떤 효력을 끝까지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야명주는 순간적으로 모든 힘을 폭발시켜 적잖은 영향을 미쳤지만, 유지 시간은 매우 짧았다.
결국 채 얼마 가지도 않아 겁쟁이 상태에서 벗어난 디마르코는 방 벽에 가득한 얼굴들을 냉정하게 한 번 둘러본 뒤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