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질풍노도
여천수와 보드, 그리고 나머지 두 개 조의 경비대원이 지시받은 대로 나뉘어 카메라를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여천수와 보드는 의도적으로 통풍구 아래쪽을 맡으며, 나머지 경비 대원이 자연스레 그곳을 등지게 했다.
이내 통풍구가 소리소문없이 열리고, 금속 철책 안에선 입이 뾰족한 원숭이 가면과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사람이 차례대로 뛰어내렸다.
사람이 착지할 땐 당연히 기척이 생기기 마련이었지만, 두 내통자는 때맞춰 다른 소리를 내며 자연스레 그 소리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성건우는 반사적으로 이쪽을 등진 채 다른 카메라를 살피고 있던 두 경비 대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퍽!
좌우로 날아든 주먹이 두 사람의 귀 아래에 각각 꽂혔다.
두 경비 대원은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성건우는 양손에 자연스레 그들을 받치고 바닥에 천천히 눕혀주었다.
장목화 역시 나머지 두 경비 대원을 손쉽게 기절시킨 뒤, 벽에 기댄 자세로 앉혀 놓았다. 덕분에 요란한 소리는 단 하나도 나지 않았다.
작업을 마친 장목화가 통풍구를 향해 손짓했다.
곧바로 파란 눈빛을 번득이는 셔츠 차림의 게네바가 떨어져 내렸다. 착지할 때의 소리도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곧이어 벽을 타고 오른 그가 금속 손가락 하나를 뽑아 B12 카메라에 대응하는 인터페이스에 꽂았다.
그 뒤를 이어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과 백새벽 역시 속속들이 지하 방주에 진입했다.
여천수와 보드는 밀려드는 긴장감을 느끼면서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경계 교파의 강자들, 사실 여천수와 보드에게만 그러할 뿐인 구조팀의 등장에 두 사람 모두 자신감을 찾았다.
다섯은 약속대로 이곳으로 와주었다. 하지만 디마르코 가문이 수십 년간 지하 방주를 통치하며 세력을 키운 만큼, 완벽한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이내 몸을 일으키며 두 사람을 바라본 성건우가 검지를 세워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비교적 흔히 쓰이는 몸짓 언어라, 두 사람도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오렌지 소총을 등에 메고 자라목 기관단총을 쥔 백새벽과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작용한 용여홍은 각각 쪼그려 앉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들의 허리띠를 풀어 그들의 양손을 단단히 묶었다.
거기다 미리 준비해온 천을 네 경비 대원의 입에 쑤셔 넣고 그들의 바지를 발목까지 끌어내리기도 했다. 이러면 깨어나더라도 당분간 큰소리를 치거나 속박에서 벗어나진 못할 터였다.
장목화의 참수 작전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했다. 사실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끝나겠지만, 언제나 돌다리도 두들겨봐야 하는 법이니 도중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백새벽과 용여홍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한 손으로 틈새를 붙잡고 벽에 안정적으로 붙어있던 게네바 역시 B12 카메라에 대응하는 인터페이스에 삽입했던 손가락 반 토막을 회수했다.
20초 정도 후, 파란 눈빛을 빠르게 번득이던 그가 손가락을 원위치에 꽂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손을 거둔 게네바는 B12 카메라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면서 그 김에 전기 충격으로 인한 고장까지 수리했다.
그렇게 B10, B11 카메라까지 수리한 게네바가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방주의 시스템 분석 및 바이러스 제작을 마치고 침입 완수했다. 앞으로 2, 30초 정도면 모든 카메라가 재부팅되고 전에 15분 동안 녹화된 영상을 반복적으로 송출할 거다. 물론 시간은 현재 시간 그대로 반영된다.”
게네바의 말투는 빨랐지만 또렷했다.
이제 감시실 안 경비 대원들은 지난 15분간 그랬듯, 방주에 아무 문제도 없다고 생각할 터였다. 물론 반복이 지나치게 오래되면 누군가는 결국 문제를 알아차리겠지만, 참수 작전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알겠어.”
장목화가 게네바에게 답한 뒤 여천수와 보드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알겠지?”
시선을 주고받던 여천수와 보드는 약간 흥분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네바가 방금 한 말을 모조리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구조팀이 상당히 대단한 인물임을 인지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껏 내내 지하 방주의 방어 시스템은 파리 한 마리조차 침입할 수 없다고, 애초에 기습할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이 경계 교파에서 보낸 강자들은 순전히 본인 실력과 지능 로봇만으로 이렇게나 간단하고도 기척 없이 감시 시스템에 손을 대고, 이를 침입의 도우미로 삼았다. 여천수와 보드의 자신감은 더욱 배가되었다.
둘은 정말로 이번 작전의 성공률이 상당히 높다고 자신했다.
시간이 거의 다 된 것을 확인하고, 여천수가 옷깃 안쪽에 설치된 전자 제품을 쥐고 보고했다.
“별문제 아니었어. 몇 번 흔들어보니까 해결된 것 같은데.”
마침 감시실 안의 경비 대원들도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으려다, 다시 밝아진 세 개 화면과 그 안에 보이는 B3 구역 상황을 확인했다.
세 개 조로 이뤄진 여섯 대원은 전처럼 평범하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 좋아, 수리공을 재촉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중에 또 고장이 나지 않도록 검사를 하긴 해야 할 것 같군.
B3 구역 확성기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여천수와 보드는 다시금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눈에 기쁨이 가득해서, 굳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들 앞으로 다가간 성건우가 생동감 넘치는 원숭이 가면을 꾹 누른 채 웃으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말을 채 맺기도 전, 그의 오른손은 이미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멍한 표정을 드러낸 여천수와 보드는 곧 상황을 파악하고 몸을 살짝 틀어 성건우 앞에 귀 뒤쪽을 내보였다.
힘이 적절하게 조절된 성건우의 주먹은 그대로 고스란히 꽂혔다.
여천수와 보드는 현기증을 느낄 뿐, 정말로 의식을 잃지는 않았으면서도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둘의 움직임은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만약 경계 교파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정말로 습격을 당해 기절한 척할 것이고, 모든 게 순조롭다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경비 대원들을 선동할 것이었다.
이제 남은 생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경계 교파의 후속 처리에서 파이의 큰 조각을 차지하려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내 작업을 마친 성건우가 게네바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게네바는 곧장 황녹색 야명주를 싼 라텍스 장갑을 꺼내 가볍게 던졌다.
성건우는 왼손에 야명주를 쥐고, 라텍스 장갑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를 보고, 장목화가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준비해.”
백새벽은 자라목 기관단총을 쥔 채 허리를 살짝 숙이고 언제든 돌격할 자세를 갖췄다.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용여홍도 백새벽 앞으로 다가가 그녀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용여홍의 앞엔 한 손으로 사신 바주카포를 쥔 장목화와 언제든 레이저와 유탄 등을 발사할 준비를 한 은흑색 로봇 게네바가 서 있었다.
그 모든 팀원 앞에 선 성건우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음악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스피커를 가져오지 않은 건……. 뭐, 당연한 얘기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이제 남은 일이 질풍노도 같은 돌격뿐이기 때문이었다.
지하 방주의 경비 대원들이 반응하기 전 디마르코라는 수장을 쳐야 하는 상황에, 스피커로 음악을 틀었다간 상대 앞에 이르기도 전에 음악 소리가 경비 대원들을 이끌어 들일지도 몰랐다.
구조팀은 재차 통풍관에 들어가 구불구불 이어진 그 통로를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시간이 길어지면 뜻밖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졌다.
‘디마르코는 지하 6층 C 구역에 있어. 거기 방은 하나뿐이고, 그 사람은 평소 거기에만 머물고 어지간해선 거처를 옮기지 않아.
C 구역엔 최신형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 전신 무장 대원 열여섯 명으로 이뤄진 여덟 개 조, 초능력을 가진 고문 두 명이 배치돼있어.
A 구역엔 디마르코가 거느린 다수의 정부가 살고, B 구역엔 현재 디마르코의 아이를 가진 정부가 있지. 감시실도 거기 있고.
C 구역으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는 없어. 그럼 일단 A 구역에 이르렀다가 B 구역을 거쳐 C 구역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그리고 디마르코 방엔 비밀 도주로랑 전속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 같아.’
장목화는 여천수와 보드가 해준 이야기를 하나하나 상기하다가, 마지막으로 구세계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던 디마르코의 모습을 떠올렸다.
“출동!”
낮게 외친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지하 2층 B3 구역을 빠져나갔다.
* * *
쿵쿵쿵!
성건우는 왼손에 야명주를 쥔 채 가장 먼저 B2 구역에 진입했다.
이곳 경비 대원들은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각기 다른 구석으로 달아나 웅크려 벌벌 떨었다.
전부 겁쟁이로 변한 것 같았다.
지금 그들은 두렵다는 감정 외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성건우는 거의 전력을 다해 야명주의 힘을 발휘하며, 겁쟁이 효과가 조금 더 오래갈 수 있도록 했다.
구조팀은 실험을 거친 끝에 추가로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이 능력은 최대 1분 30초 정도 유지된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쿵쿵쿵!
구조팀은 미친 듯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도중에 마주친 모든 경비 대원이 겁에 질려 썰물처럼 갈라지고 흩어졌다.
행여 소리라도 내면 총알이 날아들까, 다들 비명도 지르지 않고 최대한 안전한 곳에 몸을 쑤셔 넣고 부디 이 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다렸다.
쿵쿵쿵!
구조팀이 엘리베이터 로비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0여 초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구조팀은 서로 간의 거리와 순서를 엄격하게 유지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을 때 단숨에 모두가 쓸려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성건우가 쥔 야명주의 능력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전방에 자리한 흑회색 엘리베이터 세 대는 아주 묵직하고 듬직해 보였다.
일찍이 게네바가 지하 방주의 전체 시스템을 그가 만든 바이러스로 감염시켜 둔 상태라 엘리베이터에 올라도 따로 카드를 긁을 필요도, 비밀번호를 입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편안하게 지하 6층 버튼을 눌렀다.
* * *
천천히 닫힌 엘리베이터 문이 단 몇 초 만에 다시 열렸다.
차라리 문이 열고 닫히는 시간이 더 길 듯했다.
열린 문밖으론 황갈색 카펫이 깔린 복도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그 복도 양옆으로는 방이 여러 개 붙어있었다.
성건우가 쥔 황녹빛 야명주는 이미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천수와 보드의 진술로 만들어진 구조도를 떠올리며 앞장서 이 구역으로 뛰어들었다. 원숭이 가면에 가려진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걸려 있을 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구역 내 대부분은 다 잠들어 있었다. 거기다 성건우가 이곳에 진입한 영향으로, 다들 벗어날 수 없는 악몽에 잠겨 들었다. 그중 더러는 몸부림을 치며 뒤척였고, 더러는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순찰 중이던 경비 대원들 역시 지하 2층 동료들이 그랬듯 구석에 웅크려서 몸을 떨거나 이불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쌌다.
그러나 다들 일정한 기척은 내도, 크게 두드러지는 소란을 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