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희망
붉은색과 금색으로 이루어진, 텅 빈 홀 안.
상태를 회복한 장목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팀원들을 데리고 에이돌른의 성휘 앞으로 다가갔다.
문 뒤의 어렴풋한 여자의 인영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경건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하 방주는 과거에도 당신을 믿었고, 지금도 당신을 믿으며, 앞으로도 당신을 믿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당신의 신도들이 더 평안하게, 더는 누군가에게 죽임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고해를 마친 후, 구조팀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에이돌른의 성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는데요⋯⋯.”
용여홍이 약간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 역시 이는 그저 허황된 망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가장 신실한 에이돌른의 신도라도 원한다고 해서 달지기의 주시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팀원들은 이교도인데다 무신자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기대하지 않던가. 사실 에이돌른이 정말로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가장 먼저 놀라 까무러칠 것은 용여홍 자신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기대를 막을 순 없었다.
그러다 용여홍은 곁눈에 걸린 성건우의 표정을 보았다. 친구는 또 무슨 이유인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곧이어 흥분에 찬 성건우의 목소리가 퍼졌다.
“달지기가 묵인하셨다!”
뒤이어 성건우는 다시 털이 부숭부숭한 원숭이 가면을 쓰고 홱, 돌아서 지하 1층으로 향했다.
* * *
경계 교회당, 지하 1층.
낯선 환경 때문인지 갈예원은 내내 뒤척이다 결국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곁에 있던 언니 갈예린이 졸음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갈예원이 답했다.
“오, 아니, 화장실에 가려고.”
원래는 오줌을 눈다고 답하려 했지만, 순간 로크 관리자의 말이 생각났다. 방주에 들어왔으니 말도, 행동도 교양있게 해서 디마르코 선생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작은 거점 출신의 황야유랑자에게 매우 어색하고 생경한 일이었다.
그러나 매일 마주하는 세 끼 식사, 안정적인 환경, 포근한 침대, 가족과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이 절로 사람을 변하게 했다.
갈예원은 그 골치 아픈 레드리버어 공부마저 즐겁게 느껴졌다. 매일 단어 하나를 배울 때마다 그만큼 희망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았다. 그건 언젠가 더 나은 미래로 데려다줄 소중하고 귀한 희망이었다.
“나도 갈래.”
갈예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겨우 15살인 동생이 거점의 파괴로 부모를 잃고 많이 성숙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자매는 문틈 새로 들어오는 복도 불빛에 기대, 방 안을 더듬어가며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도중 지하 방주에서 파견한, 순찰 중인 경비대원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나온 이유를 설명하면서 어렵지 않게 그들을 지나쳤다.
* * *
콰르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내려가는 변기통 물을 바라보다가, 갈예원이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았다.
“언니! 이거 진짜 편리하다.”
전에 살던 보루에선 가장 큰 권력을 쥔 장로의 집에도 이런 건 없었다.
“그러게, 정말 좋은 날이 왔네.”
갈예린도 미소를 지었다. 앞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품는 것은 그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디마르코는 하인들끼리의 연애도 금지하지 않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고 했었다.
자매는 아까울 정도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로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여섯 명이 함께 묵는 방까지 단 몇 걸음을 남기고, 자매는 막 순찰 중인 지하 방주 경비대원 두 명과 마주쳤다.
그중 검은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애쉬랜드인은 친절하게도 자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갈예린은 뛰는 가슴을 안고 수줍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세요.”
애쉬랜드인 경비대원이 일렀다.
“네, 선생님. 수고하세요.”
갈예린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자매는 그렇게 예쁜 편은 아니지만, 노예 중에선 그나마 단정한 편이었다. 그래선지 경비대원도 거부감을 표하는 대신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방주에 들어오면 다 같은 동료니까요.”
갈예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두 분, 로크 관리자님께서 훈련을 통과하면 원하는 작업 분야를 선택할 수 있다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예, 하지만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선택 가능합니다. 작업 분야 당 인원수도 정해져 있고요.”
애쉬랜드인 경비대원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갈예린은 동생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어느 분야를 선택하는 게 좋을까요?”
잠시 침묵하던 애쉬랜드인은 곁에 있는 레드리버인 동료와 위쪽을 한번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향한 그곳은 지하 방주가 아닌 경계 교회당에 속한 감시 카메라였다. 그 후 애쉬랜드인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최대한 디마르코 선생 곁을 피하십시오. 그분은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해요. 걸핏하면 성을 내고, 화가 나면⋯⋯.”
그의 말은 확실치도, 또렷하지도 않았다. 두려움이 묵직한 바위처럼 그의 마음을 짓누른 까닭이었다.
곁에 있던 레드리버인 경비는 이를 보고 갈예린과 갈예원에게 경고했다.
“우린 당신 같은 하인을 수시로 보충합니다. 방주는 크긴 해도⋯⋯.”
거기까지였다. 두 경비는 계속 말을 늘어놓는 대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본인들의 순찰 임무를 이어 나갔다.
갈예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갈예린은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들의 남긴 말을 대략이나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전의 하인들은 디마르코 선생의 못된 성격에 결국 쫓겨난 건가? 아냐, 로크 관리자는 방주에 들어온 이상 특정 임무를 부여받지 않는 한 누구도 여길 떠날 수 없다고 했어. 살아서도 방주의 사람이고, 죽어서도 방주의 귀신이 되는 거라고⋯⋯. 그럼 설마, 전의 하인들은 저, 전부 다 죽은 거야?’
갈예린은 다시금 조금 전 두 경비대원이 보였던 연민의 눈빛과 진지한 표정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추측이 정확한 것 같았다.
이내 갈예린의 발걸음이 점점 불안정해졌다. 불구덩이 안으로 뛰어든 듯한, 호랑이의 입 앞에 떨어진 듯한 절망감이 온 마음을 휩쓸었다.
갈예린 역시 자신들 같은 황야유랑자는 언제든 죽을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이번에도 방주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알지도 못하는 어딘가에 팔려 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죽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든, 어떤 처지든, 어떤 환경에 있든 좋은 삶을, 좋은 생을 꿈꿨다.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침대에 누운 갈예린은 다시 잠든 동생을 바라보며 주체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이내 이불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바깥의 복도에서 순찰 중이던 두 경비대원 역시 이동하는 도중 서로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지하 2층, 한 통풍구 옆에 선 여천수도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방주로 돌아온 그와 보드는 참을 수 없는 흥분에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에게 얼른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경계 교파에서 디마르코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통치를 갈아엎는 데 도움을 주려 한다는 이 이야기를 전하려 했지만, 끝내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자신감도 부족했으며, 최근엔 디마르코에게 압력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화약심지에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셈이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일만 해주면 된다고, 위험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다.
여천수와 보드 역시 그들의 움직임에 제한적으로 협력하며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기로 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여천수와 보드도 망설임 없이 작전에 참여할 것이었다.
그러나 여천수가 한숨을 내쉰 건 성공에 대한 불투명성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그는 한 여자 하인과 눈이 맞아 막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나가려는 참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했다. 여천수의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경비대원이지만, 그 여자 하인은 직계 가족도 하인이기 때문이었다.
지하 방주 안에서 경비 대원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특수한 편이라 어지간해선 저 미친 디마르코에게 죽진 않았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해 하인 집단에선 경비 대원이 가장 좋은 결혼 상대로 손꼽혔다. 경비 대원과의 결혼이 곧 죽음을 면할 수 있는 티켓인 셈이었다.
반면 경비 대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비 대원과 결혼한 하인은 분명 디마르코에게 어느 정도의 자비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직계 가족은 여전히 하인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직계 가족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거나 디마르코를 화나게 한다면 결국 불똥이 튈 수 있었다.
디마르코의 성격상, 또 잠재된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는 빌미를 대며 그 집안과 사돈 관계에 있는 가족들에게까지 불길을 내뿜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경비 대원은 경비 대원끼리 결혼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적잖은 경비 대원들이 이 점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에 이유를 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최근 한창 이 문제로 고민 중인 여천수에게 경계 교파의 작전은 한 줄기 희망과 다름이 없었다.
기관단총을 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여천수는 고개를 돌려 동료 보드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긴장감과 불안함에 휩싸여 있는 얼굴이었다.
이에 여천수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저으며 보드에게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을 보냈다.
‘어쩌면 경계 교파에서 이미 계획을 포기했을지도 모르잖아?’
다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여천수는 평소처럼 금속 철책으로 막혀 있는 통풍구, 빈틈이나 사각지대 없이 설치된 감시 카메라 세 대, 그리고 나머지 두 카메라 아래에 자리한 다른 경비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두 개 조로 나뉜 총 네 명 중 셋은 레드리버인, 한 명은 애쉬랜드인이었다. 그들은 전부 제복을 입은 채 최신형 기관단총을 쥐고 있었다.
여천수와 보드의 각도에서 보자면 이러한 방어는 그다지 철옹성 같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쉬이 돌파할 수도 없었다. 침입자가 이곳에 자리한 여섯 경비 대원과 맞서는 동안 감시실에서 곧장 지원군을 파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파직-
두 사람의 눈앞에서 은백색 전광과 그로 인한 불꽃이 번득였다.
여천수와 보드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회로가 고장 났나?’
* * *
같은 시각, 지하 6층 감시실.
교대한 경비 대원 두 명이 해당 구역을 비추는 감시 화면이 번쩍 나타난 전광과 함께 암전된 것을 발견했다.
그중 한 남자가 곧장 머신 헤븐에서 구입한 전자 제품으로 지시했다.
“B3 구역 경비대원, B12 감시 카메라에 고장이 있는지 검사 바람.”
그 목소리는 해당 구역 확성기를 타고 여천수, 보드에게까지 전해졌다.
고개를 들어 B12 카메라를 본 여천수는 카메라의 인터페이스가 까맣게 타버린 것을 확인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통풍구의 금속 철책 안쪽에서 자신을 향해 흔들거리는 손 하나를 목격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여천수는 본능에 따라 느릿하게 시선을 거뒀다.
다음 순간, 또다시 나타난 전광과 불꽃이 연달아 두 번 번득였다.
감시실에서도 조금 전 지시를 내린 남자가 B10, B11 감시 카메라에 대응하는 화면도 암전된 것을 확인했다.
그가 재차 분부를 내리기 전, 정신을 차린 여천수는 옷깃 안쪽에 끼워진 전자 제품을 통해 말했다.
“카메라 세 대 모두 고장. 회로상 문제인 것 같다.”
여천수는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이 전에 없이 냉정하고 침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위험한 일은 없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보고하면 그만이었다.
- 한 번 더 검사해봐. 곧장 수리할 사람을 보내겠다.
감시실 안의 남자는 절차에 따라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