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겁쟁이
관이 옮겨지자, 그 아래에 깔린 석판에 시커먼 구멍 하나가 드러났다.
안쪽으로 자리한 계단도 어렴풋이 보였다. 아주 좁은 그 구멍으로는 매우 늘씬한 사람만 편하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네바처럼 덩치가 크다면 필수적으로 몸을 좀 틀어야 했다.
장목화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만능 로봇 게네바에게 구멍 아래의 공기를 좀 환기해달라 부탁했다.
원숭이 가면을 쓴 성건우는 그렇게 많은 장치와 기능을 가진 게네바가 참 부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곧 환경 정리를 마친 게네바가 안쪽 상황을 검사했다.
“독가스, 폭탄, 방사능, 위험 생물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방 구조도 상당히 안정적이야.”
다음 순간, 성건우는 손전등을 켜고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장목화와 게네바도 그 뒤를 바짝 따랐다.
* * *
계단은 일고여덟 개의 층계뿐이라, 성건우는 금세 땅에 발을 디뎠다.
크지 않은 방엔 침대, 책상, 옷장,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이곳은 온전한 어둠으로만 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황녹색 빛을 내뿜는 구슬이 하나 놓여 있었다.
평범한 물고기 눈알만 한, 아주 작은 구슬이었다.
“야명주⋯⋯.”
낮게 중얼거리던 장목화는 즉각 앞으로 나아가 탐색하려는 성건우를 막고, 게네바에게 그 일을 맡겼다.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게네바는 가장 빠른 속도로 작업을 개시했다.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안에 들어있던 옷은 이미 누군가 가져간 것 같았다. 침대 위엔 요와 베개, 얇은 이불만 놓여 있었고, 의자는 특별한 데는 없었지만, 신전 환경의 영향 때문인지 아주 깨끗했다.
그리고 야명주가 놓인 책상 서랍엔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종이⋯⋯.”
장목화는 성건우가 비추는 손전등 불빛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그 누르스름한 종이를 바라보았다. 종이엔 일련의 숫자와 부호가 적혀 있었다.
「1210, ✓
757, ✓
935, ✓
314, ✓
329, ✓
102.」
타르난에 가본 적이 없었더라면 장목화는 이러한 숫자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타르난에서 고등 무심자와 만나 그에게 503이란 숫자를 듣고, 주명희에게서도 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것에 기반해, 장목화도 자연스러운 추측을 이어갔다.
“일찍이 염호가 방문했던 심령의 복도 방인가? 체크 표시는 이미 탐색을 마쳤다는 뜻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102호 방에서 신세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수확을 얻었지만,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된 건가?”
성건우가 한 손으로 손전등 측면을 때리며 박수를 대신했다.
그러자 잠시 멍하게 있던 게네바도 성건우의 박수 행렬에 동참했다.
장목화는 둘을 못 말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성건우로 인해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다. 성건우 같은 존재 하나쯤 더 늘어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래도 그녀의 입가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종이는 가져가도 될 것 같아. 가져가서 조금 더 연구해보자. 자, 시간 얼마 없어. 빨리 움직이자.”
장목화가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녀 말의 요지는 방에 이 많지 않은 물건들을 최대한 빨리 살피고, 가져갈 만한 게 더 있을지 찾아보라는 의미였다.
게네바는 망설임 없이 이불을 털고, 베개를 두드리고, 요를 들추었지만 별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다.
그 사이 장목화와 성건우는 변화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잠시 후, 종이를 거둬 넣은 게네바가 황녹빛 작은 야명주 쪽으로 손을 뻗은 그때였다.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움직인다. 움직인다. 태아가 움직인다.”
“…….”
장목화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아직은 단련이 더 필요했다.
‘건우가 처음으로 가입한 종교 조직은 생명 제례 교단이 확실하네. 저렇게 뼛속 깊이 선명한 낙인으로 남아 있다니.’
물론 그녀도 성건우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방금 게네바의 손끝이 야명주에 닿으려던 순간, 야명주에서 발산되던 황녹색 빛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게 번득였었다. 게다가 그 내부에서도 감지하기 어려울, 생물 전기 신호도 번뜩 나타났다.
성건우가 말을 이었다.
“아주아주 약한 인간 의식이 떠올랐어요. 지금은 사라졌고요.”
‘심령의 복도 깊은 곳을 탐색한 강자들이 남긴 기운이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과 결합한 결과일까? 염호 본인에게서 기인한 걸 수도, 염호가 심령의 복도에 딸린 어느 방에서 얻은 수확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어.’
시종일관 시간에 신경 쓰던 장목화는 긴말 대신 짧게 지시했다.
“일단 챙기고, 나가서 연구해보자. 이제 나가봐야 해.”
게네바는 일찍이 준비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야명주를 잘 넣어 감쌌다.
그 후 셋은 일사불란하게 방에서 나와 손전등을 껐다.
게네바가 관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며 지하실 입구를 막자, 성건우는 재차 관 뚜껑을 들어 관을 빈틈없이 덮었다.
장목화도 끊임없이 시간을 계산하면서도 성건우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염호는 관뚜껑을 닫는 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내 성건우는 양팔을 들어 올리고 몸을 살짝 젖혀 허공을 바라보았다.
“모든 게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장목화는 한소리하고 싶었지만, 시간 탓에 앞장서 염라전을 빠져나왔다.
* * *
여관 구역, 어스름한 노란색 전구 불빛으로 밝혀진 방 안.
구조팀 전원이 식탁을 대신할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그들의 앞에, 황녹색으로 빛나는 야명주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이미 종이에 관한 연구는 마쳤지만 특별한 건 찾지 못했다.
장목화가 먼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떤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확인해봐야 해.”
주문을 듣고, 게네바가 바로 야명주를 집었다.
팟-
게네바가 야명주를 집자마자, 장목화는 또다시 튀는 듯한 미약한 전기 신호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그 외엔 다른 변화는 없었다.
게네바는 야명주를 이리저리 굴리며 물었다.
“어떻게?”
“정신을⋯⋯.”
게네바의 질문에 답하려던 장목화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발끝으로 생각해도 지능 로봇에게 정신이 있을 리는 없었다. 심지어 인간에게도 과연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미지수였다.
몇 초간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말했다.
“전류로 자극해볼까? 들고 있어 봐. 내가 한번 해볼게.”
장목화는 보통 어떤 생각이 들면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었다.
순간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웅크리면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백새벽과 성건우를 의식한 그는 자신이 너무 겁쟁이처럼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억지로 원래의 자세를 유지했다.
게네바가 손바닥으로 야명주를 받치고, 장목화는 왼손을 들어 조준했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서 발산된 은백색 아크 한 줄기가 짧은 거리를 가로질러 목표의 표면에 떨어졌다.
야명주가 발하던 황녹색 빛에 또렷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 내부에 잠재된 미약한 전기 신호도 다시 떠올라 혼란스러워졌지만, 금세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왔다.
“소용없네요.”
용여홍이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묘한 투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어떤 능력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장목화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새로운 방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성건우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장목화는 약간 고민하다 답했다.
“조심해. 일단 장갑부터 끼고. 게네바, 잘 보고 있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건우랑 야명주를 분리해줘.”
“안 돼요!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성건우는 이 순간에도 헛소리를 멈추지 않았지만, 행동은 아주 진중하고 성실했다. 라텍스 장갑 한 짝을 꺼내 왼손에 끼곤, 게네바 손 위에 있는 야명주를 천천히 움켜쥐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장목화는 미약한 전기 신호가 떠오르는 걸 느꼈다.
곧 성건우가 야명주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을 붙였다.
“너도 먼지에 가려진 빛나는 보석, 명주몽진이란 말을 들어봤을 거야. 야명주씩이나 돼서 봐주는 사람도, 칭찬해주는 사람도 없는 지하실에 수십 년간 갇혀서 얼마나 외로웠니. 하지만 이젠 네 빛을 마음껏 뽐낼 기회가 왔어.”
용여홍은 순간 우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친한 친구가 야명주랑 대화하는 꼴은 우스웠어도, 정말 야명주와 소통한 것 같은 상황은 두려웠다.
옆에서 언제나처럼 조용히 있던 백새벽도 흠칫 놀랐다. 성건우에게서 전에 만났던 정신 나간 황야유랑자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건우와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았지만, 성건우에겐 의사의 증명서가 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1분 정도 대화를 마친 후, 성건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화를 거절하네요.”
‘대화를 할 수 없는 거겠지.’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성건우가 돌연 야명주를 오른손으로 고쳐 쥐려 했다. 오른손은 라텍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장목화는 반사적으로 입을 달싹였지만, 끝내 저지하진 않았다. 얼른 눈짓으로 게네바를 준비시켰을 뿐이었다.
게네바는 2, 3초 정도의 시간을 들인 끝에 장목화의 눈짓을 분석했다.
오른손에 야명주를 쥔 성건우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빠르게 어두워졌다.
다음 순간, 장목화는 야명주 안에서 떠오른 미약한 전기 신호가 길게 자라나면서 매우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특정 생각의 강림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용여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들바들 떨면서 옆방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그곳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칭칭 감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이게 대체⋯⋯.”
잠시 멍해졌던 장목화가 곧 상황을 파악했다.
야명주가 드디어 어떠한 작용을 한 것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야명주를 바라보던 성건우가 웃으며 입을 뗐다.
“다른 사람의 담을 작게 만드는 것 같으니 겁쟁이라고 부르죠. 한 번에 한 사람만 노릴 수도 있고,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다수를 노릴 경우 효과는 대폭 약해질 거예요.”
갑자기 장목화의 눈이 확 밝아졌다.
“아주 강력한 능력이네? 이번 작전에도 상당히 적합하고.”
참수 작전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도중에 작전을 저지당하거나 상대측의 머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 야명주가 있는 한 선수를 치기만 하면 디마르코 주위의 방어력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약해질 터였다. 심지어는 디마르코까지 이 위력에 영향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성건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최대 거리는 약 120미터 정도에요. 지금 여기서 여관 구역 맞은편과 레드스톤 마켓 지하 시장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음, 이걸 진정한 심령의 복도 급 강자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들한테도 영향을 미칠 순 있을 거야. 근데 야명주 빛이 좀 어두워진 것 같지 않아?”
장목화는 현재까지 파악한 상황에 근거해 추측했다. 동시에 그녀는 또 그 예리한 감각으로 한 가지 문제를 파악했다.
“그렇다.”
게네바가 이전 데이터와의 비교를 거쳐 확실한 답을 내놓았다.
성건우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사탕처럼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회복되진 않나 보네요. 모든 힘을 순간적으로 폭발시킨다면 효과는 더 강력해지겠죠.”
이들이 토론하는 사이, 마침내 정신을 차린 옆방의 용여홍은 잠시 번뇌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이 방으로 돌아왔다.
장목화가 그를 웃으며 반겼다.
“훌륭해. 심령의 복도 급 물건의 영향을 받고도 이렇게 빨리 회복하다니.”
“생리적인 실수를 하지도 않고.”
백새벽도 거들었다. 원래는 오줌을 지린다고 말하려 했지만, 여린 용여홍에게 너무 큰 상처가 될 것 같아 애써 점잖게 표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