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마음을 굴복시키면, 반란은 알아서 소멸하지
보드와 여천수의 진술에 따라 게네바는 머릿속으로 감시 카메라의 위치, 회로의 방향, 기계실의 위치 등이 포함된 대략적인 구조도를 그렸다.
이내 그가 가슴팍의 패널을 하나 열고, 땅에 해당 구조도를 투사했다.
“고쳐야 할 부분이 있나?”
게네바가 부드러운 중저음 합성음으로 물었다.
여천수와 보드는 몇 초간 멍한 눈빛을 보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투사된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어, 없어.”
장목화는 이를 보고 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학 기술이 삶을 바꾸는구나.’
그녀는 게네바 덕분에 확실히 일이 훨씬 줄어들었음을 실감했다.
여천수와 보드가 구조도 확인을 마치자, 성건우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감시를 담당하는 경비대원들이랑 접촉할 수 있어?”
“응.”
여천수가 빠르게 답했다.
그러자 성건우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장목화는 성건우의 생각을 짐작해보다가, 흠칫 놀랐다.
‘사람을 통해 추리 광대 능력을 전파할 방법을 고민하는 건가? 지금까지 건우의 각성자 능력이 그 정도 위력을 발휘할 조짐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직 한참 부족하잖아.’
장목화는 살짝 망설인 끝에 여천수와 보드에게 직접 물었다.
“혹시 그 사람들한테 구체적인 체계 상황을 물어볼 수 있겠어?”
보드가 답했다.
“아니, 그 사람들 입 엄청 무거워. 만약 디마르코에게 들켰다간 다 맞아 죽을 테니까. 근데 지난 몇 년은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 디마르코의 잔인한 성미에 상당히 불만을 품어왔어. 지금까진 교파의 지지가 없어서 우리끼리 저항할 엄두를 못 냈던 거지. 지금은 교파의 지지를 얻었으니까 가장 동요하기 쉬운 몇 명을 공략한다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전보다 자신감이 강해진 것 같네. 경계 교파의 지지를, 달지기 에이돌른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이것도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사람을 통한 추리 광대 능력의 전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초능력이 아니라 사람 마음의 미묘한 부분을 이용하는 거긴 하지만.’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리는 사이, 보드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정보를 얻은 뒤에 너희들한테는 어떻게 전해?”
잠시 생각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방주로 돌아가면 몸수색을 받지?”
“응. 폭발물 방지 검사도 받고, 전자 제품 검사도 받아. 아주 삼엄해.”
여천수의 답변이 장목화의 방안에 직격타를 날렸다. 이젠 게네바와 용여홍, 백새벽도 각자 정보 전달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 장목화가 물었다.
“혹시 앞으로 사흘 동안 임무 일정을 알고 있어?”
여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우리 둘은 한 조.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교대로 아이언 마운틴 출입구의 한 검문소랑 지하 2층 교회당 근처 통풍구를 맡아. 보통 일주일에 하루 쉬고, 다시 작업 시작할 때 6일간 모든 임무를 배정받는데 별일 없으면 이 일정은 변하지 않아. 아, 근데 다른 사람들 임무는 하나도 몰라.”
‘그래, 매일 랜덤으로 임무를 배정했다면 어마어마한 혼선이 빚어졌겠지. 강력한 지능 중추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어.’
장목화는 여천수와 보드의 답을 듣고 새로운 방안을 하나 마련했다.
“그럼 지하 2층 교회당 근처 통풍구는 언제 맡아?”
보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내일모레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시간제한도 있네.’
장목화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상황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너희 둘만 있는 거야?”
“아니, 총 세 조, 그러니까 총 여섯 명이 한 곳에 배정돼.”
보드가 답했다.
장목화는 게네바가 투사한 구조도를 자세히 한번 살펴보았다.
“모든 통풍구에는 감시 카메라 세 대가 설치돼 있지?”
“맞아.”
‘내가 아까 그 이야기까지 했던가?’
여천수는 의아했지만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장목화가 고민에 빠진 사이, 성건우가 게네바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먼저 방주에 들어가서 그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시스템을 분석하고 침입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실행 가능성은 있지만, 폭로될 위험이 존재한다.”
게네바가 전문적인 답을 내놓았다.
그때,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음……, 어쩌면 시도는 해볼 수 있을지 몰라.”
조금 더 자세한 질문들이 이어지다가, 장목화는 여천수와 보드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구조팀은 지프로 향했다.
* * *
용여홍은 시체를 묻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느라 가장 뒤늦게 지프에 올랐다. 그가 지프에 타자마자 성건우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저 사람들이랑 친구를 맺는 게 아니라, 우리 신분이랑 목적만 다르게 밝힌 거야?”
용여홍이 생각하기엔 친구가 되는 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었다.
용여홍의 질문에 답한 건, 성건우가 아닌 장목화였다.
“그래, 친구로 삼으면 짧은 기간 동안은 믿음직하겠지. 근데 건우의 추리 광대 능력은 적합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를 잃어.
생각해 봐, 지하 방주 내 대부분은 여천수와 보드가 건우랑 친구란 사실을 증명해주질 못해. 그럼 금세 자신이 속았단 걸 깨닫게 될 거야.
두 사람더러 우리 신분을 오해하게 하고, 우리를 경계 교파의 사도로 여기게 하고, 디마르코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걸 도울 사람처럼 보이게 한 건, 그게 바로 저들의 갈망에 부합하기 때문이야.
추리 광대의 인도가 있으면, 심지어 저들의 잠재된 욕망까지도 효과를 발휘하게 돼. 사람들은 늘 자기가 믿기 원하는 걸 믿잖아?
이러면 저들은 방주로 돌아간 후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감지하더라도, 추리 광대 효과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최면을 걸면서 우리 일을 더 적극적으로 도우려 할 거야.
이 효과가 극도로 잘 발휘된다면 추리 광대 능력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은 계속 반 디마르코 행렬에 가담해, 자발적으로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고 그 세력을 눈덩이처럼 굴려 나가겠지.
건우가 이번에 추리 광대 능력을 쓴 목적은 시간을 아끼고, 힘을 아끼고, 좀 성가신 중간 과정을 건너뛰기 위해서였어.
덕분에 우린 이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잘 선동할지, 어떻게 해야 더 설득력 있는 증거를 내놓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됐잖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용여홍도 점차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 마음을 장악한 상태에서 발휘한 추리 광대는 그야말로 무적이구나. 팀장님한테 그런 각성자 능력이 없어서 참 다행이야.
잠깐, 건우랑 팀장님은 사전에 경비대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내통자로는 어떻게 만들지 얘기한 적이 없잖아? 건우는 혼자만의 힘으로 상황을 다 파악하고 친구 삼기 대신 신분을 틀리게 밝힌 거야.’
용여홍은 슬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친구는 자신보다 머리가 훨씬 더 좋았다. 평소 성건우는 미친 것처럼 굴고, 각종 기이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면서도 정말 필요할 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러한 지능이 정신질환자의 평범하지 않은 사고 흐름과 합쳐지면 더욱더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뒤이어, 용여홍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성건우는 자신을 오도할 때, 추리 광대 능력을 쓰지도 않고 오직 머리에만 의지한다고 했었다.
‘그건 혹시, 어쩌면 진담이었을지도 몰라.’
한편, 장목화의 분석을 들은 게네바는 상응하는 프로세서에 그에 대응하는 장면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조금 전 장목화는 여천수와 보드에게 두려워 할 건 없다고, 할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고, 전혀 위험한 게 아니라고 말했었다.
‘이건 앞으로 이뤄질 자기 최면과 기만을 위한 포석이었던 거군.’
마침내 그녀의 목적을 깨닫고, 게네바가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혹시 너도 각성자인 거냐?”
그러자 장목화가 답도 하기 전, 성건우가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와, 어떻게 알았어? 팀장님 능력은 ‘사람 마음 가지고 놀기’, ‘기만전술’, ‘남들한테 겁주기’야.”
장목화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창 헛소리 중인 성건우를 째려보았다.
“난 그냥 머리를 쓴 거라고!”
그녀는 그제야 게네바의 질문에 답할 시간을 벌었다.
“난 각성자 아니야. 유전자를 개조하긴 했지만.”
그때, 장목화는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각성자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어?”
머신 헤븐의 대형 데이터베이스에 어떤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목화의 말에, 운전 중이던 백새벽도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게네바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겐 각성할 필요도, 방법도 없다. 소스 브레인은 그런 방면으로의 연구는 진행하지도 않아.
내부 인터넷에 업로드된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애쉬랜드의 각 대형 교파 내 각성자 수와 비율은 다른 세력보다 현저히 높다. 퍼스트 시티 같은 대형 세력의 각성자 수 역시 일반 세력보다 훨씬 많지.
대형 세력의 각성자 수가 많은 건, 가장 큰 이유가 그러한 세력이 각성자에게 미치는 흡인력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만, 혹시 또 그들이 각성자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타르난에서 급히 나오느라 용광로 교파 세례 의식도 못 갔는데⋯⋯.”
물론 그녀도 세례 의식으로 각성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처럼 신실하지 못한 신도가 각성자가 될 가능성은 그보다 더 희박할 터였다. 하지만 어쨌든 그 가능성이 0인 것은 아니었다.
이어, 성건우도 긴 한숨을 내뱉었다.
“돼지 파티도 놓쳤고요.”
게네바를 제외한 구조팀 모두에게 애석한 일이었다.
몇 초간의 침묵 후, 용여홍이 물었다.
“이제 뭘 하면 되죠?”
“다시 호수의 섬으로 가야지. 앞으로 우리 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고, 위험도 낮출 뭔가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보자. 우리한텐 게네바가 있으니까 염호가 심령 세계를 침략할 것 같은 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 * *
다음 날, 레드스톤 마켓, 치안소.
구조팀은 새로운 치안관이자 마을 경비대장인 도제훈을 만났다.
그는 168센티미터인 키에 아담한 체형이고 얼굴도 앳되지만, 피부는 햇빛과 바람에 꽤 거칠어진 편이었다.
“호수의 섬으로 갈 모터보트를 빌리고 싶다고?”
도제훈이 아무 표정도 없이 물었다.
“응, 거기다 자전거 세 대까지.”
성건우가 덧붙였다.
도제훈은 한창 여자들에게 빠져 있는 웰러를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성 지그문트님께선 우리한테 어떤 형식으로든 섬에 접근을 금하셨어.”
우아한 중 가면을 쓴 장목화가 웃었다.
“너희가 금지당한 거랑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우린 그 사람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 너희는 그냥 친구한테 모터보트랑 자전거 하나 빌려주는 것뿐이잖아. 여기에 무슨 트집을 잡겠어?”
도제훈은 전혀 동요되지 않고, 계속 무표정을 유지했다.
“말장난을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야.”
‘하, 어째 도발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일찍이 계획이 있던 장목화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말했다.
“성 지그문트인가 하는 사람은 너희만 막을 수 있지, 어인은 못 막아. 그리고 어인은 언젠가 그 섬에 다시 올랐다가 거기에 어떤 물건을 가져가서 새로운 신사를 배양해낼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 섬에 어떤 것도 파괴하지 않을 거야. 우리도 목숨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기껏해야 필요한 물건만 좀 가져오는 거야.
거기다 이건, 이 레드스톤 마켓에 잠재된 위험을 제거해주는 거야. 적어도 그게 어인 손에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역시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이야기를 듣던 도제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웰러를 향해 레드리버어로 말했다.
“이 사람들이 바람을 쐬고 물고기를 잡겠다고 모터보트를 빌린다면 난 거절할 생각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웰러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