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방안 (2)
다음 순간, 게네바가 입을 열었다.
“우리 내부 자료에는 강력한 각성자를 맞닥뜨리면 지능인이라도 최대한 신중하게 굴라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최대한 신중하게 굴기만 하면 문제없을 거라는 거네?”
성건우가 웃으며 반문했다.
그 사이 장목화는 게네바의 말에 담긴 뜻에 대해 고민했다.
‘특정 각성자의 능력은 지능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가? 환경 정보를 왜곡하는 환각에만 국한된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지능인에게는 인간의 의식 따위 존재하지 않기에 각성자 능력의 목표가 될 수 없었다.
장목화는 각성자 능력 대부분이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관여한다고 알고 있었다. 이는 심령의 복도 깊은 곳에 이른 각성자에게는 더 두드러지는 현상이었다.
성건우를 한 번 훑어보던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이 방안엔 분명 실행 가능성이 있긴 해도 한 단계씩 차분히 진행해야 해. 각 단계에서 상황을 살피며 더 나아갈지 말지 고민해야 한다고.
그래, 첫 번째 시도를 해보는 걸 허락해줄게. 일단 내통자를 찾아. 집사들 모두 상당히 경계심이 강한데, 너랑 쉽게 접촉하려 하지 않겠지. 어쩔 거야?”
일찍이 이에 대해 생각해둔 듯, 성건우가 또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이언 마운틴으로 가서 시체 처리자들을 기다려야죠.”
시체 처리자란 아이언 마운틴 쪽으로 난 출구를 통해 지하 방주를 나와, 하인들의 시체를 버리고 묻는 경비대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상대로야. 음, 만약 앞으로 사흘간 시체를 버리러 나오는 사람이 없다면 이 작전은 자동으로 끝나. 근데 그사이 누군가 나온다면 디마르코가 또 하인 하나를 죽이고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다는 거겠지.
그런 사람을 처리하는 건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행하는 일이 맞아.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지. 때가 되면 작은 흰둥이와 빨강이한테는 최대한 안전한 임무를 맡겨야겠어.’
장목화가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그 전에 일단 교회당으로 가서 송 경고자님을 만나자. 경계 교파의 태도를 확인해보는 거지.”
교회당은 달지기 에이돌른의 시선이 닿는 곳이었다.
“좋아요!”
역시 성건우는 매우 의욕적으로 나왔다.
* * *
빨간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교회당 안.
일행은 다시 그 반쯤 닫힌 문 뒤에 숨은 여인의 상징과 마주했다. 그러자 처음처럼 장엄하고 엄숙하면서도 매우 위험한 느낌을 받았다.
에이돌른의 성휘 아래엔 레드스톤 마켓에 새로 부임한 안토넬라 주교가 서 있었다. 남자는 키가 180센티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는데,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어도 덩치가 매우 좋아 보였다.
안토넬라는 역시 매우 간소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흰색 판지를 뚫어 눈, 코, 입 구멍만 만들어낸 듯한 가면이었다.
다만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민머리는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경계하는 마음이 영구히 존재하기를.”
안토넬라가 구조팀을 응시하며 두 손을 들고, 그대로 가슴팍 앞에 깍지껴 쥐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구조팀도 허리를 살짝 굽히며 호응했다.
그중, 남다른 반응을 보이는 인물도 있었다.
“거리 두기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구조팀을 통틀어 오직 성건우만 경계 교파의 방식으로 예를 갖췄다.
안토넬라는 구조팀의 가면을 쓱 훑어보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에 교파와 레드스톤 마켓을 위해 힘써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구사하는 애쉬랜드어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렸다. 해당 언어를 익힌 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저희를 알아보셨네요?”
성건우가 놀라며 물었다.
그 반응에 안토넬라 역시 놀랐는지 잠깐 공백을 뒀다가 대꾸했다.
“여러분들께서 레드스톤 마켓에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어제저녁부터 이미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과연 경계와 은신이 풍습인 곳 답네.’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내 몇 마디 한담을 나눈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송 경고자님은 안 계신가요?”
안토넬라는 몸을 살짝 틀어 비스듬히 떨어진 뒤쪽을 가리켰다.
“이미 사람을 보내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친구를 만나러요.”
성건우의 답은 가벼웠지만 솔직했다.
안토넬라가 그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친구라도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장목화는 이 틈을 타 설교를 하려는 주교의 마음을 읽었다.
그녀가 가면 뒤에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송하균이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오늘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였다.
가면을 쓰지 않은 송하균의 얼굴엔 여전히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귀밑머리만 살짝 희끗희끗할 뿐이었다.
송하균은 일단 안토넬라에게 예를 갖춘 뒤 구조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나 빨리 돌아오신 겁니까?”
“생각보다 주된 목표를 일찍 달성했거든요.”
장목화가 간단히 설명했다.
이때 성건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비엘은 또 숨었나요?”
송하균은 약간 성긴 눈썹을 살짝 꿈틀거리다, 몇 초간 침묵 끝에 답했다.
“지난 이틀 동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비엘은 전에도 며칠 동안 안 나타나지 않았던가요?”
장목화도 경계 교파 숨바꼭질 미사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여긴 식량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하지만 송하균은 더 이상 비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봤을 때 구조팀이 레드스톤 마켓으로 돌아온 건 여정 중에 필요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아뇨, 타르난에서 다양한 맛의 통조림을 여러 개나 교환했습니다.”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곤 기척 없이 이 홀에서 떠나려 하는 신임 주교 안토넬라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온 주목적은 고성능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송 경고자님, 경고자님도 보셨겠지만, 저희에게 로봇이 한 대 생겼거든요.”
선글라스를 낀 게네바의 큰 덩치는 너무나 눈에 띄어서 누구라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마르코의 집사 울리히나 앙헤바스를 찾아가면 될 겁니다.”
송하균이 자발적으로 방안을 제시했다.
“이미 그렇게 해봤습니다.”
장목화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알린 뒤 덧붙였다.
“일이 좀 골치 아파졌습니다. 지하 방주에서 최대한 많은 배터리를 얻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어요. 아, 참. 안토넬라 주교님은 새로 부임하신 후 디마르코 선생을 만났나요?”
장목화는 이야기를 하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여유롭게 대상을 바꿨다.
이에 옆으로 어느 정도 벗어났던 안토넬라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송하균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간단하게 답했다.
“영상 통화로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아아⋯⋯.”
그러자 성건우가 구체적인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적어도 지능 로봇 게네바가 갖춘 데이터베이스로는 그 탄식의 의미를 분석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쟤는 언제나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던 장목화는 아직 안토넬라가 홀에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척, 성건우에게 동조했다.
“교파 주교라도 디마르코와 직접 대화할 수 없는 건가요? 그땐 호수의 섬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저희까지 불렀으면서. 정말 알 수 없네요.”
‘팀장님, 진짜 연기력 대단하시네요. 건우 탄식만 듣고도 이렇게 쿵짝이 잘 맞는다고요? 그러니까 구세계 콘텐츠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란 건데.’
용여홍은 장목화의 연기력이 일취월장한 덴 구세계 드라마의 공헌이 높다고 추측했다. 그렇게 몰래 혀를 내두르다가, 문득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역시 백새벽도 저들이 지금의 장목화를 상대하긴 어렵겠다고 느끼는 듯, 약간 묵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사이 돌아선 안토넬라가 상당히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의 몇몇 주교들도 디마르코 선생과는 영상 통화로만 대화를 나눴습니다. 게다가 성 지그문트 님은 방주에 들어가 지하 2층에서 디마르코 선생과 한차례 면담하기도 했고요.”
장목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성 지그문트 님은 지하 방주에서 돌아온 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질문을 듣고 전의 대화를 떠올린 송하균은 구조팀을 한번 훑어보다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장목화의 질문은 어떤 기밀 사항과도 관련되지 않았다. 그래서 안토넬라도 기억을 더듬으며 숨김없이 답했다.
“성 지그문트 님께서는 저희에게 지하 방주의 주인이 에이돌른을 믿는 한, 그리고 레드스톤 마켓의 안정을 완전히 깨뜨리지 않는 한 그곳 내부 문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좀 이상한데.’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인 장목화는 그 말을 듣자마자 몇 가지 단어에 주목했다.
‘디마르코’가 아닌, ‘지하 방주의 주인’.
이는 두 갈래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첫째는 이것이 지하 방주에 대한 경계 교파의 장기적 정책이라, 그곳 주인이 바뀌어도 무엇이 변하진 않는다는 것, 둘째는 경계 교파에선 지하 방주 주인이 누구든 개의치 않는단 뜻이었다.
디마르코여도, 그의 아들이어도, 그 외의 다른 이라도 상관없었다. 지하 방주의 주인이 에이돌른을 믿고 레드스톤 마켓의 안정을 깨뜨리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 두 해석엔 아주 큰 공통점이 있었다. 지하 방주 주인의 교체는 그 내부의 문제라 경계 교파에선 절대 개입하지 않으리란 점이었다.
물론 방주의 새로운 주인이 에이돌른을 믿고, 레드스톤 마켓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게 확실한 전제로 깔려 있어야 하긴 했다.
이는 분명 장목화가 바랐던 경계 교파의 태도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약간 의혹이 남았다. 장목화가 보기에 저 말은 너무 직접적이고도 또렷했다.
설마 디마르코를 지하 방주의 주인이라는 칭호로 대체한 것에 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한참을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근데 디마르코는 전에 어인과 산 요괴를 끌어들여 레드스톤 마켓을 쓸어버리려 했잖아요. 이건 레드스톤 마켓의 안정을 깨뜨리는 행위 아닌가요?”
그래도 장목화는 이 기회에 디마르코를 비난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안토넬라가 말문이 막힌 사이, 송하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거 일은 따지고 들지 말도록 합시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야지요.”
“그렇죠. 이 일은 경계 교파의 일이니까요. 그냥 잠깐 의분이 끓어서 불평이 나왔나 보네요. 이해해주세요.”
장목화도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적절히 멈출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 용여홍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팀장님, 저 고상한 말투도 구세계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도대체 팀장님은 우리가 자는 틈에 구세계 콘텐츠를 몇 개나 훔쳐본 거……, 아니, 아니, 몇 개나 심사한 거지?’
이후 한 차례 한담을 더 나눈 뒤, 구조팀은 교회당과 작별을 고했다.
* * *
“아이언 마운틴 쪽으로 난 방주 출구로 가자.”
지프에 오른 장목화가 전방을 응시하며 지시했다.
게네바는 아직 이 구역의 지도를 수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운전대는 백새벽이 잡고 있었다.
“거기서 뭘 하시게요?”
용여홍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찾아라, 찾아라, 친구를 찾아라⋯⋯.”
성건우는 다짜고짜 노래만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