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악명 높은
깊은 밤, 몽롱한 상태로 깬 장목화는 머리맡에 둔 물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맞은편 침대에 부동자세로 앉아있는 한 인영을 보았다.
장목화는 순간 잠이 싹 달아났다.
초점을 찾은 시야에 인영의 주인공이 들어왔다. 성건우였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
장목화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내 성건우는 양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돌렸다.
창틈을 파고든 옅은 달빛 아래,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실행 가능성 있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어요.”
장목화는 잠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열심이네⋯⋯. 그래서 무슨 방법이라도 나왔어?”
성건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요.”
“아⋯⋯.”
하지만 장목화가 채 안도하기도 전, 성건우가 다시 덧붙였다.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서요.”
“⋯⋯.”
잠깐 밝아졌던 장목화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와 별개로 성건우는 자문자답하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이 문제랑 세 번째 섬 극복을 같이 묶어 고민 중이었어요. 모든 걸 바치고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전 현실 속에서 어려운 일을 해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함을 바꿔야 해요.
인류를 구원하는 건 당연히 한 집단, 한 집단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돼야죠.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때가 되면 일정 수확도 생길 거고, 그 수확은 심령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겠죠.”
얌전히 듣고만 있던 장목화는 이불을 당겨 조금 더 편안하게 누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세 번째 섬 극복의 관건은 어쩌면 정말로 현실과 관련돼있을지도 몰라. 현실에서 확신을 통해 마음속 의심을 깨트려야 하는 거지. 근데 처음부터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장목화의 솔직한 말에, 성건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건 세 번째 섬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아니에요. 고민 끝에 구상해낸, 실행 가능성 있는 방안이죠. 세 번째 섬의 극복 방법은 그냥 부차적으로 도출된 것일 뿐이고요.”
순간 장목화는 웃고 있는 성건우가 꼭 맑고 순수한 아이처럼 보였다.
뭔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문 그녀는 한참 후에야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날이 밝은 뒤에 다시 생각해도 되잖아. 지금 한밤중이야. 얼른 자. 정신력을 보충해야 더 좋은 방법을 마련하지.”
마음 같아선 베개라도 던져서 조금 더 강하게 주장하고 싶었지만, 장목화는 가진 베개가 하나뿐이라 조용히 말로만 했다.
“예.”
성건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침대에 그대로 몸을 던지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장목화도 이불을 잡아당기며 몸을 틀어 맞은편 침대를 마주했다.
그렇게 고요를 되찾은 밤, 그녀가 불쑥 중얼거렸다.
“가끔은 네 순수함이 정말 부럽다⋯⋯.”
성건우는 진지한 말투로 대꾸했다.
“의사 선생님 증명서와 맞바꾼 거죠.”
“⋯⋯.”
장목화는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간단히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마침 여관의 고장 난 회로를 고치러 온 레드스톤 마켓 주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지프에 올랐다.
지프는 곧 공원 안 지하 시장으로 향했다. 비자 무역 회사에 방문해 고성능 배터리와 관련한 일을 협의하려는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비자 무역 회사를 지키고 있는 건, 전과 마찬가지로 파란 유령 가면은 썼어도 토끼처럼 겁이 많던 그 여자 직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직원도 일찍이 레드스톤 마켓의 거물이라 불린 이들을 알아본 듯했다.
“오늘은 어떤 집사가 있나요?”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울리히 집사요.”
직원이 답했다.
‘잘됐네.’
장목화는 속으로 운이 좋았다고 중얼거리며, 얼굴에 쓴 우아한 중 가면을 다시 한번 바르게 눌렀다.
“그럼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울리히 씨를 뵙고 싶어서 왔거든요.”
“알겠습니다.”
여자는 황급히 무전기를 꺼내더니 구조팀과 게네바를 피해 연락을 취했다. 누구와 연락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선글라스를 낀 게네바는 파티션에 절반 정도 가려진 그녀를 바라보다가 네 사람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 대화, 들려줄까?”
“그게 들려?”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그의 얼굴이 원숭이 가면으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 정도 거리, 이 정도의 음량이라면 감청할 수 있지.”
장목화는 구조팀 평균 청력이 대폭 상승한 것이 뿌듯하다가도, 잠시 또 무언가 떠올라 물었다.
“평소에도 주위 환경에 대한 감청을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편이야?”
게네바가 간결하게 답했다.
“임무 수행 중이나 그 비슷한 상황에서만 감청을 활성화하지, 안전한 환경에선 그러진 않는다. 활성화하지 않는 건 전력 소모량을 아끼고 배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고성능 배터리의 항속성과 생명 주기는 여전히 우리 지능인 규모와 사회 발전을 제약하는 중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한다. 소스 브레인이 구세계 원자력 마이크로화 기술, 초고성능 배터리 기술, 핵융합 연구 영역 자료를 계속 찾으며 그것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그 이유야.”
용여홍은 게네바의 기억력에 깊이 감탄했다.
‘과연 지능인이야, 우리가 당시 들었던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말하네. 역시 대형 데이터베이스와 선진화된 검색 알고리즘은 대단해.’
그 사이, 자리로 돌아온 비자 무역 회사 응대 담당 직원이 천적을 마주하기라도 한 양 몸을 살짝 떨며 말했다.
“회의실로 들어오라십니다.”
* * *
구조팀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긴 테이블과 의자 열 개, 액정 패널이 놓인 회의실이었다.
응대를 맡은 직원은 액정 패널을 켜고 상태를 조정한 뒤 방을 나갔다.
“이것들은 우리 머신 헤븐의 제품⋯⋯.”
게네바가 입을 떼자마자, 성건우가 본인 입 앞에 검지를 갖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게네바도 곧장 침묵했다.
2, 3초 후, 액정 패널에 검은 정장을 입고,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40대 남자가 떠올랐다. 엄숙한 인상의 그는 디마르코의 집사 중 하나인 울리히였다.
“울리히 씨, 회사에 계시는 거 아니었나요?”
장목화가 웃으며 물었다.
- 여러분 중 각성자가 있잖습니까. 공격력도 매우 강력하고요.
울리히는 침착하게 답했다.
당시 성건우는 디마르코의 경비들을 제압하며 양손 동작 불능 능력을 썼다. 울리히가 말한 강한 공격력은 아마 성건우의 놀라운 수류탄 투척 능력을 가리키는 듯했다.
곧 울리히가 깍지껴 쥔 양손을 가슴 앞에 댄 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 거리 두기는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익숙한 말에, 구조팀은 정말로 레드스톤 마켓에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경계 교파를 믿는 이들로만 이루어진 이 거점엔 모두가 과도하게 경계하며 은신과 거리 유지를 강조했다.
구조팀도 어제 만난 몇 사람과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미약한 수준의 교류만 했었다. 주민들도 레드스톤 마켓의 거물이라는 명망에 눌려 지극히 저자세만 취할 뿐, 현지 특징이자 종교적인 습관은 차마 보이지 못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며 고소해했다.
‘봐, 전에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비밀을 폭로하고 다닌 탓에 저자도 네가 각성자란 걸 알고 단단히 대비 태세를 갖췄잖아. 이래선 거리를 좁힐 수도 없고, 추리 광대 능력으로 연을 맺을 수도 없지. 지하 방주에 몰래 섞여 들어가기도 다 그른 거야.’
이는 즉, 성건우가 여태 고안해둔 가능한 방안 중 적어도 3분의 1은 못쓰게 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3분의 1은 아마도 성공확률이 꽤 높은 편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내심 동요했으면서도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장목화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곧이어 그녀가 웃으며 울리히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경계하시는 것도 이해됩니다.”
‘그런 짓을 저지른 저희를 문전박대 하지 않은 것도 감사할 따름이죠.’
-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울리히는 한담할 생각 따위 없다는 듯 즉각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내 장목화가 선글라스를 낀 게네바를 가리켰다.
“보시다시피 저희가 최근 로봇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비용 고성능 배터리가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라, 혹시 거래할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성건우는 바로 게네바를 보며, 일반 로봇을 대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자, 집사께 노래를 한 곡 틀어드려.”
상황을 분석하던 게네바는 위장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알아차리고, 장착된 연주 모듈을 활성화했다. 서서히 그의 입에선 입체 음향이 흘러나왔다.
“오직⋯⋯.”
“필요 없어. 울리히 씨도 이해하실 거야.”
한 소절을 부르자마자, 장목화가 제지하고 나섰다.
울리히도 이 유적 사냥꾼 팀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이런 상황은 깔끔하게 무시한 채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 지금은 아직 겨울입니다. 연말까지 남아있던 물건은 이미 다 발송한 상태에요. 퓨처인텔리의 밀수업자는 한두 달은 더 있어야 도착할 테고요.
무역 회사에는 현재 배터리 재고가 없고, 새로운 밀수품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는 뜻이었다.
용여홍은 백새벽이 구세계의 콘텐츠를 그렇게나 꺼렸던 이유를 문득 깨달았다. 장목화가 통제하지 않았거나 임무의 구속을 받지 않았더라면, 머신 헤븐의 추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아직도 그 즐길 거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았다.
구세계 사람들은 정말 놀 줄 아는 자들이었다.
장목화는 계속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지하 방주에서도 고성능 배터리를 꽤 많이 소모할 텐데요. 그러니 예비용 배터리도 가지고 계시겠죠. 그중 일부도 안 될까요? 앞으로 한두 달 후 도착할 새 물건은 퓨처인텔리에서 선진화된 기술로 만들어낸 신형 고성능 배터리일지도 몰라요. 그럼 저희는 지하 방주 창고 정리를 해드리는 셈이죠.”
울리히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이 유적 사냥꾼 팀이 레드스톤 마켓에서 보였던 모습도 있고, 무엇보다 주인은 지난번 사건으로 놀라긴 했어도 화를 내진 않았었다.
그렇게 몇 초 고민하던 울리히가 입을 열었다.
- 몇 개나 필요하십니까? 많지 않은 양이면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장목화가 웃으며 답했다.
“오십 개요.”
- 켁, 켁…….
울리히는 갑작스레 기침이 터져 나왔다. 여태까지 유지하던 엄숙하고 전문적인 태도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었다.
2, 30초 후, 비로소 안정을 찾은 그가 말했다.
- 그렇게나 많이요?
로봇 경비대를 만들려고 그러는 것일까? 배터리 오십 개는 레이저 무기 등 에너지 소모가 큰 무기의 사용을 자제하거나, 수시로 전투에 나서지 않고 그렇게 아껴만 쓰면 무려 로봇 열 대를 지원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럼 최대한 몇 개나 주실 수 있으신데요?”
장목화가 반문했다.
고민하던 울리히가 답했다.
- 다섯 개입니다.
“그건 너무 적습니다.”
이번엔 성건우가 장목화 대신 답했다.
-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울리히의 태도는 강경했다.
‘순순히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건우를 방주에 들여보내 창고를 닥닥 긁어오게 할 거야! 그래도 괜찮아?’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럼 사흘 동안은 그것만이라도 남겨주세요. 그 사이에 다른 곳에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장목화는 레드스톤 마켓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머신 헤븐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자신들은 타르난에서 레드스톤 마켓을 거쳐왔다는 사실도 드러냈었다. 그러니 머신 헤븐 추격대가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물론 장목화도 이에 관해 일찍이 여러 방안을 세워뒀지만, 그래도 최대한 신중하게 구는 게 좋았다.
- 그러죠.
울리히는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그는 고성능 배터리 다섯 개를 내주고 이 유적 사냥꾼 팀을 떨굴 수 있다면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들이 그에 대한 값을 치르지 않을 것도 아니지 않은가.